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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스] 단편 소설, 카르마 단편 소설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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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사슬

by 앤서니 레이놀즈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shackles-of-belief/

 

거대 드류바스크에 올라탄 서리 자매 토르바는 고삐를 당겨 겨울 발톱 부족의 상흔의 어머니 브리나 옆에 섰다. 털이 덥수룩한 드류바스크가 심기가 불편한지 씩씩거리자 코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얼음 이빨, 조용히 해." 토르바가 드류바스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손목에 감긴 뼈 부적과 토템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매서운 바람이 황량한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약탈조 전사들은 모두 두꺼운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지만, 토르바는 아니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남색 문신으로 장식된 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지만,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토르바에게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위풍당당한 풍채를 지닌 상흔의 어머니 브리나 역시 엄니가 솟아난 드류바스크에 올라타 있었다. 토르바의 것보다 몸집이 더욱 거대한 브리나의 드류바스크는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발굽을 크게 구르더니 토르바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브리나가 발길질을 하자 드류바스크는 다시 얌전해졌다.


브리나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자비한 전사였으나, 토르바는 위압되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상흔의 어머니만큼 이름을 떨치진 못했지만, 토르바는 꿈을 통해 신의 뜻을 읽는 '여주술사'였다. 프렐요드 최강의 여족장들조차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었다.


나머지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상흔의 어머니와 여주술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아바로사 부족의 영토로 행군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멈춰 선 그들은 안장에서 내려 뻣뻣해진 등허리와 다리를 풀었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눈과 얼음이 토르바를 향해 날아들었다.


"폭풍이 오고 있어요." 토르바가 말했다.


브리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 남쪽을 바라봤다. 브리나의 얼굴에는 오랜 흉터가 가득했다. 시력을 잃은 오른쪽 눈은 흐릿했으며 검은 머리칼 사이로 하얀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그 흔적은 여전히 선명했다. 겨울 발톱 부족에게 그런 흉터는 생존자의 징표이자 자부심의 근거, 경외의 대상이었다.


"뭔가 보이나요?" 토르바가 물었다.


브리나는 먼 곳을 계속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르바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궂은 날씨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두 눈이 멀쩡해도 아무 쓸모 없구나, 꼬마야." 브리나가 쏘아붙였다.


토르바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눈동자가 담청색으로 변하고 손가락 주위로 서리가 끼었다. 토르바는 화가 났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부분의 겨울 발톱 부족 사람들처럼 브리나는 토르바나 신앙에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토르바는 마음대로 약탈조에 합류하면서 더욱 미운털이 박힌 듯했다. 틀림없이 여주술사가 동행하면 미신을 믿는 전사들이 동요하고, 결국 목적의식과 자신의 권위가 약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토르바가 브리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탈조에 합류한 것은 막연하지만 강력한 직감 때문이었다. 그런 종류의 직감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래전 깨달았다. 신들이 토르바를 이곳으로 이끌었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저기, 멀리 남쪽에." 브리나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위 근처다, 보이나?"


토르바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눈 위로 드리운 그림자처럼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브리나가 대체 어떻게 발견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토르바는 목덜미가 간질거려 얼굴을 찌푸렸다. 형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이상했다.


바람이 거세지며 정체 미상의 형체는 다시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바로사 정찰병일까요?"


"아니." 브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눈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어. 프렐요드 출신이라면 어린아이조차도 하지 않을 실수지."


"외지인이군요. 어째서 이렇게 멀리까지 왔을까요?"


브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바로사 놈들은 전통을 따르지 않아. 그래서 남부 인간들을 약탈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거래'를 하지. 아마 저놈도 길을 잃은 무역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군."


브리나는 역겨운 듯 침을 뱉더니 드류바스크를 타고 계속 이동했다. 그러자 다른 전사들 역시 산등성이를 따라 다시 동쪽으로 드류바스크를 몰았다. 하지만 토르바는 제자리에 서서 눈보라 너머를 주시했다.


"우릴 봤을 거예요. 아바로사 부족에 알릴지도 몰라요."


"그럴 일은 없어. 저승에 있는 신들에게 알린다면 모를까. 폭풍이 거세지고 있으니 해 질 녘이면 죽을 거야. 가자,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토르바는 뭔가 마음에 걸렸다. 산마루 끝에 서서 외지인이 있던 쪽을 바라봤지만, 더욱 심해진 눈보라 때문에 겨우 몇 발자국 앞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약탈조에 합류한 이유가 '저 사람' 때문인지 토르바는 궁금했다.


"꼬마! 안 올 거야?" 브리나가 소리쳤다.


토르바는 브리나를 슬쩍 보더니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토르바는 고삐를 당겨 드류바스크를 산등성이 아래로 몰았다. 등 뒤로 브리나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토르바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따라가실 거죠?"


거대한 몸집을 한 냉기의 화신 전사, 쇠주먹 브록바르가 물었다. 10년 가까이 충직한 투사로서 브리나를 섬기며 가끔은 연인이 되어 주었던 남자였다.


"자매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부족 전체가 신들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프렐요드에서 자신과 함께 싸울 단 한 명의 전사를 고르라고 한다면, 브리나는 브록바르를 택했을 것이다. 휘하의 다른 전사들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크고 드류바스크를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센 브록바르는 믿음직한 부하였다. '겨울의 통곡'이라는 대검을 다루는 그는 실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즐기기까지 했다.


수 세기에 걸쳐 냉기의 화신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겨울의 통곡은 겨울 발톱 부족 사이에서 전설적인 무기였다. 칼자루에는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정수 조각이 박혀 있었으며, 칼날에는 날카로운 서리가 덮여 있었다. 냉기의 화신이 아닌 자는 검을 쥐기만 해도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브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록바르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미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까마귀들이 떼 지어 나는 모습부터 눈 위로 흩뿌려진 핏자국까지 모든 것이 브록바르에게는 전조이자 예언이었다. 심지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여주술사가 딛고 간 땅조차도 그는 신성시했다. 설상가상으로 휘하의 다른 전사들마저 동조하기 시작했는지, 브록바르가 나섰을 때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내뱉었다.


결국 브리나는 마지못해 전사들에게 서리 자매를 따라갈 것을 지시했다.



브리나의 말 중 하나는 사실이었다. 이 정체불명의 외지인은 어린아이보다도 프렐요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토르바는 깊은 눈밭을 헤치며 힘겹게 걸어가는 외지인을 바라봤다. 그대로 둔다면 한 시간 내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툰드라 지대를 탐험할 준비나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량한 대지를 휩쓰는 매서운 바람도 토르바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외지인은 쓰러졌다. 재차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힘이 다한 듯했다.


외지인은 토르바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멀리서부터 시야가 닿지 않는 측면이나 후방에서 거리를 좁혀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외지인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토르바는 주변을 살폈다. 만약 뒤를 쫓던 서리송곳니나 다른 맹수가 있었다면 지금이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토르바는 계속해서 접근했다.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외지인의 생김새를 더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외지인은 남자였다. 가죽옷과 모피를 입고 있었지만, 프렐요드식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창이나 도끼, 검, 활과 같은 무기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다. 토르바는 고개를 저었다. 겨울 발톱 부족은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무기를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다. '신비로운' 무기를 주로 다루는 토르바조차 언제나 세 자루의 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게다가 남자 뒤로 두 개의 사슬이 보였다. 사슬은 손목을 감싸고 있는 기이한 모양의 거대한 수갑에 연결돼 있었다.



드레그본의 사일러스는 자신이 프렐요드의 혹독한 환경을 너무도 얕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북부 지대에는 막강한 마법의 힘이 흐르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지금 사일러스는 그 힘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직접 선발한 마법사 십여 명과 북쪽의 얼어붙은 땅으로 향했지만, 눈보라와 숨겨진 협곡, 사나운 야수들에 의해 하나둘씩 목숨을 잃었다. 출발 전에는 프렐요드 야만 전사들이 가장 위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몇 주째 행군을 계속하는 동안 그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살 수 있는지 사일러스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다. 모피와 양털로 만든 옷으로 몸을 둘둘 감싸고 두꺼운 털과 육중한 몸집의 황소에 식량과 땔감, 무기, 그리고 물물교환에 쓸 주화까지 챙겼다. 자신의 고향, 데마시아의 세금 징수원과 귀족들의 금고에서 훔친 주화였다.


하지만 황소 역시 모조리 죽고 말았다. 남은 건 오직 사일러스뿐이었다.


강철 같은 의지와 데마시아 왕가와 귀족 가문의 몰락을 바라는 불타는 욕망 때문에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이미 사일러스는 데마시아 내부에서 상당한 저항을 조성하고 반란에 불을 지피기도 했지만, 불길이 계속 타오르려면 다른 연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마시아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일러스는 구할 수 있는 연대기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덕분에 북방의 강력하면서도 끔찍한 고대 마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일러스가 찾던 바로 그 '연료'였다. 죽음이 임박한 지금도 그는 자신이 찾던 마법의 힘이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고집만으로는 프렐요드의 가혹한 추위를 이길 수 없었다. 손과 발은 이미 검게 변해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고, 극심한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아까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기수 한 무리를 본 것 같았지만,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피로와 혹한으로 인한 환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 뻔했다. 살기 위해서는 북방의 마법을 찾아야 했다.


사일러스는 온 힘을 다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눈밭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지고 말았다.



토르바는 쓰러진 외지인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음 이빨을 앞으로 몰았다. 남자는 더 이상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느낄 수 없는 추위에 마침내 굴복한 것이다.


남자와 가까워진 토르바는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쓰러진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토르바는 수갑과 사슬을 다시 유심히 살펴봤다.


만약 포로라면 대체 '어디서' 탈출한 것일까?


겨울 발톱 부족은 적을 생포하는 법이 없었다. 회유나 폭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 자들은 식량만 축낼 뿐이니까. 다만 이따금 노예로 거두는 경우는 있었다. 수갑이나 사슬로 봤을 때 아바로사 부족의 포로는 아니었다. 혹시 산맥 너머의 남쪽 나라에서 탈출한 것일까?


토르바는 양손으로 지팡이를 쥐고 남자를 쿡 찔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지팡이 끝을 눈 아래로 집어넣어 남자를 뒤집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팔뚝 대부분을 덮고 있는 거대한 수갑의 무게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안간힘을 쓴 끝에, 토르바는 결국 남자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생기가 없는 남자의 몸이 뒤집어지면서 털 달린 모자가 벗겨졌다. 퀭한 눈은 굳게 감겨 있었으며, 입술은 푸른색을 띠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뺨과 눈썹에는 서리가 끼었고, 느슨하게 묶은 검은 머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토르바는 손목의 수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리 자매는 여주술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년 동안 많은 부족을 방문했지만, 수수께끼의 허연 돌로 만들어진 그 수갑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토르바는 불안했다. 절대로 풀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듯한 그 수갑은 바라보기만 해도 막연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런 꼴을 당할 정도라면 아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고 토르바는 생각했다.


남자 옆에 무릎을 꿇으며 토르바는 왜 자신이 이곳으로 이끌렸는지 궁금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는 신들의 뜻이 분명했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의식이 없었다. 혹시 이자를 구하길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가 가지고 온 무언가 때문에 이곳으로 이끌린 것일까?


토르바는 다시 수갑을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이 손을 뻗었다.


허연 돌로 된 수갑에 손이 닿기도 전에 손가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놀란 토르바는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남자는 장갑을 찢어 벗기고 토르바의 팔을 움켜쥐었다. 신성한 힘을 소환하려고 했지만,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수년 만에 처음으로 몸을 옥죄어 오는 추위를 느꼈다. 토르바는 그대로 쓰러진 채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추위에 사로잡힌 토르바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치 난로에 몸을 녹인 것처럼 남자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맙군."


남자가 손을 놓자 힘을 빼앗긴 토르바는 거친 숨을 뱉으며 눈밭에 쓰러졌다.



여주술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본 브리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드류바스크를 앞으로 몰았다.


"나를 따르라!" 브리나의 호령에 약탈조 전사들이 돌진하자 땅이 흔들리고 눈사태와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이 눈을 헤치며 질주하는 동안, 남자는 서리 자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피 외투를 벗어 바닥에 쓰러진 토르바에게 다정하게 덮어 주었다.


남자는 일어서서 지축을 흔들며 돌진하는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을 바라봤다. 남자의 뒤로 사슬이 보였다. 브리나는 창을 단단히 쥐었다.


병력의 규모를 확인한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여주술사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손을 들어 무기가 없음을 보였다. 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적을 수없이 죽여온 브리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동작이었다.


별다른 명령 없이도 전사들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남자를 둥글게 포위했다. 남자 역시 현명하게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무리에서 떨어져 늑대들에게 둘러싸인 먹잇감 신세가 된 남자는 자신을 포위한 프렐요드 전사들을 둘러봤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브리나는 남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투가 없어 근육질의 팔이 노출되었음에도 남자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희한하군.' 브리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는 키가 컸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했다. 팔에 달린 거대한 수갑의 무게 때문이었다.


"자매의 상태를 확인해." 브리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명령했다.


남자 역시 브리나를 바라봤다. 기수 한 명이 드류바스크에서 내려 여주술사를 살피러 갔다.


"난 브리나다. 겨울 발톱 부족의 상흔의 어머니이자 방패를 부수는 자, 슬픔을 부르는 자이며 드류바스크의 포효다. 넌 누구냐?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 수 없는 언어로 대답했다. 브리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남자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대답했다. "사일러스."


"사일러스? 그것이 네 이름인가?"


남자는 한 번 더 가슴을 치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미소를 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브리나는 작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죽은 듯이 눈밭에 누워 있는 토르바를 바라봤다. 전사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채 토르바의 가슴에 귀를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죽었나?" 브리나가 물었다.


"반쯤 얼었지만 아직 살아 있긴 합니다."


'반쯤 얼었다고?' 프렐요드 전사들이 동요했다. 서리 자매는 고대 신들의 축복을 받아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건만 토르바는 반쯤 언 채로 누워 있고, 사일러스라는 이름의 외지인은 맨살을 드러내 놓고 서 있었다.


브리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강철과 불, 피 외에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던 브리나였으나 휘하의 전사들, 특히 브록바르는 이 상황을 불길한 징조로 볼 것이 뻔했다.


"시간 낭비야." 브리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창을 고쳐 쥐며 드류바스크를 앞으로 몰았다. 사일러스라는 남자는 손을 들어 올리며 남부의 언어로 뭐라고 소리쳤지만, 브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 얼간이를 죽이고 가던 길을 계속 갈 생각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때 브록바르가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브리나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자매님을 해친 놈입니다." 브록바르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토르바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신들이 보는 앞에서 놈을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남자는 브리나와 브록바르를 번갈아 바라봤다. 자신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과연 이자는 알고 있을까?


브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브록바르가 드류바스크에서 내리자 그의 당당한 풍채가 드러났다. 사일러스라는 남자도 작은 덩치는 아니었지만, 브록바르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브록바르는 등에 멘 칼집에서 겨울의 통곡을 꺼내고는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토르바가 마지막으로 추위를 느꼈던 건 여섯 살도 안 됐을 때였다.


그녀는 깔깔 웃으며 눈토끼를 쫓아 얼어붙은 호수 위를 달렸다.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토르바는 얼음이 두껍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차갑고 어두운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뼈까지 시려 오는 냉기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고, 폐 속에 있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갔다. 뻣뻣해진 팔다리에는 고통스러운 경련이 일었다.


그렇게 토르바는 한참을 죽은 채로 있다가 얼음 아래에서 꺼내져 부족의 주술사에 의해 소생되었다. 그날 밤 토르바는 처음으로 신들이 내린 능력을 발휘했다.


"사람이 죽음을 경험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한단다." 주술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넌 신들의 축복을 받은 거야."


그날 이후로 토르바는 추위를 타지 않게 되었고, 맨몸으로 눈보라 속을 멀쩡하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토르바는 또다시 겁에 질린 소녀가 되어 얼어붙은 호수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다만 이번에는 눈을 부릅뜬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토르바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숨도 쉴 수 없었다. 냉기가 그녀를 가득 채웠다. 냉기가 '곧' 그녀였다.


이러기 위해서 이곳으로 이끌렸던 것일까? 외지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그를 통해 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망각으로 향하는 토르바를 주저하게 했다.


신들의 뜻에 따라 목숨 바쳐 외지인을 살린다고 해도 브리나의 손에 죽을 것이 뻔했기에... 토르바는 수면을 향해 헤엄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쇠주먹 브록바르는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남자를 일격에 끝장낼 생각이었다. 겨울의 통곡이 쇳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자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 얼음 안개가 나부꼈다.


얼음 트롤마저 반으로 갈라 버릴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외지인은 무거운 수갑을 찼음에도 빠른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사슬을 휘둘렀다. 사슬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자 브록바르는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외지인의 예상과 달리 브록바르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태산과 같이 강인하면서도 몸집에 맞지 않게 날렵한 그는 손등으로 옆통수를 강타해 외지인을 날려 버렸다. 브리나조차 놀라 움찔할 정도였다.


브록바르가 다가가는 동안 외지인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브리나는 남자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브록바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상대를 마무리하기 위해 접근했다.



사일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야만 전사의 무기를 주시했다.


칼자루에 박힌 얼음 조각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서리로 뒤덮인 칼날에서는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음 조각은 사일러스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마력을 내뿜었다. 그 마력은 원시적이고 위험하면서도 속박되어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강력한 그 위력에 사일러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여자로부터 흡수한 힘은 사일러스를 소생시켰다. 추위를 물리치고 팔다리의 동상을 치유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힘이었다. 이 힘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일러스는 기합을 지르며 프렐요드인 앞에 섰다.



외지인이 호를 그리며 브록바르를 향해 사슬을 휘둘렀다. 양쪽에서 날아든 사슬은 브록바르의 머리를 강타한 뒤 투구를 휘감았다. 외지인이 사슬을 비틀자 투구가 산산이 조각났다.


브록바르는 눈밭에 피를 뱉고, 긴 머리를 흩날리며 계속 전진했다.


사슬이 또다시 날아들었지만, 육중한 체구의 브록바르는 첫 번째 사슬을 회피한 다음 앞으로 접근하며 한쪽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두꺼운 팔뚝에 사슬이 감기도록 두었다. 그런 다음 사슬을 단단히 쥐고 외지인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기며 팔꿈치를 휘둘렀다.


공격이 적중하자 남자가 비틀거렸다. 브록바르는 자신의 발치에 쓰러진 외지인을 끝장내기 위해 겨울의 통곡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죽이면 안 돼요!" 누군가의 외침에 브록바르는 대검을 쥔 손을 멈췄다.


브리나가 험악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위태롭게 서 있는 서리 자매 토르바가 보였다.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토르바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브리나가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라 신들의 뜻이에요."



거대한 몸집의 야만 전사가 당황하며 한눈을 파는 순간 사일러스는 빈틈을 포착했다.


사일러스는 무릎을 꿇고 일어서며 사슬을 휘둘렀다. 그리고 검날에 감긴 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겨 대검을 야만 전사의 손아귀에서 뽑아냈다.


눈밭에 떨어진 대검을 향해 사일러스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씩 웃으며 대검을 집어 드는 순간...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외지인의 어리석은 행동에 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직 냉기의 화신만이 얼음 정수 무기를 다룰 수 있었다. 냉기의 화신이 아닌 자가 무기를 만지는 것은 ■■ 행위나 다름없었다.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가자 외지인은 비명을 지르며 겨울의 통곡을 쥔 손을 풀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얼어붙기 시작한 팔을 감싸 쥐었다. 손에서부터 출발한 얼음 정수의 치명적인 힘은 팔을 거쳐 심장으로 향했다.


"'이게' 신들의 뜻이라고?" 브리나가 외지인을 가리키며 코웃음을 쳤다.


토르바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들은 변덕스럽고 잔혹하기 그지없군." 브리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아니면 이자가 더 고통받길 원한 건가?"


브록바르가 아무렇지 않게 겨울의 통곡을 집어 들자 외지인은 비통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얼음 정수의 치명적인 힘이 그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고통을 끝내 줘." 브리나가 명령했다.


브록바르는 단호한 얼굴로 토르바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그 모습에 브리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신들이 정말로 저놈을 살리려 한다면 '직접' 끼어들겠지."



토르바는 프렐요드의 고대 신들을 모시고 숭배했지만, 신들의 뜻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신들이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외지인은 눈밭에 누운 채 경련을 일으켰다. 얼음 정수에 몸을 거의 다 장악당한 상태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으며 한쪽 손을 브록바르 쪽으로 뻗었다.


토르바는 이 데마시아인의 능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한 번의 접촉만으로 자신의 능력을 빼앗았는지 알고 있었다. 브록바르에게 경고할 수도 있었지만... 토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사일러스의 저항 의지는 여전히 강고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는 거대한 몸집의 야만 전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전사의 군화에 손을 갖다 댔지만, 그는 사일러스의 손을 걷어찼다.


수염이 덥수룩한 야만 전사는 마치 사일러스가 길거리에서 죽어 가는 개라도 되는 것처럼 가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데마시아의 귀족들이 천민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사일러스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에 자극을 받은 사일러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프렐요드 전사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고대의 순수한 원소 마법의 힘이 사일러스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비록 프렐요드 전사의 얼음 무기를 직접 다룰 순 없어도... 전사의 몸을 통해 그 힘을 흡수하는 것은 가능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일러스는 무기의 힘을 흡수했다.


전사는 영문도 모른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일러스는 미소 지었다. 두 눈은 얼음같이 차가운 빛으로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의 얼어붙은 팔을 바라봤다. 그리고 새롭게 얻은 힘을 사용해 얼음을 걷어 냈다. 팔을 타고 내려간 얼음이 완전히 사라지자 멀쩡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런 다음 사일러스는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전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어디까지 했더라?"



브록바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외지인에게서 뒷걸음쳤다.


"정체가 뭐지? 냉기의 화신인가?" 브리나가 사나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토르바가 믿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보다 더 특별한 존재예요..."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브리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창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안장에 올라선 다음 온 힘을 실어 외지인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곧장 날아갔지만, 외지인이 손가락을 펼친 채 손을 뻗자 앞쪽의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마치 방패처럼 솟아올랐다. 브리나의 창은 얼음 기둥을 파고들었으나 관통하지는 못했다. 약 두 뼘 깊이로 박힌 창은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외지인에게 상처 하나도 내지 못했다.


브리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솟아오른 마법의 장벽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외지인은 웃으며 서리로 뒤덮인 자신의 손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마치 바다에 잠긴 빙산과 같이 연한 푸른빛이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냉기가 서린 눈을 들어 브리나를 올려다보더니 다시 한번 고대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러자 두 손 사이에서 눈보라를 품은 듯한 마법 구체가 생겨났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무기를 만지작거렸다. 외지인이 끌어낸 힘은 프렐요드의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토르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쳤다. 브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여주술사를 바라봤다.


외지인의 언어로 이야기한 것일까?


아직 토르바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은 듯했다. 그녀를 향한 브리나의 불신은 더욱더 깊어졌다.



토르바가 외지인과 한참을 이야기하는 동안 브리나는 이를 갈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뭐라고 하는가?"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브리나가 쏘아붙였다.


"자신과 우리 부족은 같은 적과 싸우고 있으니, 서로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브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 아바로사 부족? 우린 놈들을 약탈해 왔지, 전쟁 중이 아닌데."


"산맥 너머에 있는 자신의 동족, 데마시아인들을 말하는 듯합니다."


"반역자로군. 동족마저 배신하는 인간을 왜 믿어야 하지?"


"상흔의 어머니는 네가 우리 부족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아실 것이다." 토르바가 외지인의 언어로 말했다. "네 제안은 무엇인가? 밝히지 않으면 네 영혼은 저승을 떠돌게 되리라."


사일러스가 브리나에게 직접 대답하는 동안, 토르바는 이해되지 않는 단어를 몇 번이고 확인해 가며 주의 깊게 들었다.


"오직 자신만이 아는 숨겨진 길을 통해 데마시아로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막대한 부가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으며 눈이 내리지 않는 땅에는 잘 먹은 가축들이 가득하고 길거리에는 금은보화가 넘쳐난다고 합니다."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브리나조차 눈을 번득였다. 힘겹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나? 믿을 수 없는 자다. 거짓말에 혹하느니 당장 죽여 버리는 편이 낫지."


"이자는..." 토르바는 신중하게 거짓말을 지어냈다.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꿈에서 프렐요드의 세 자매가 나타나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네요."


"세 자매!" 브록바르가 놀라서 외쳤다. "아바로사와 세릴다, 리산드라입니다!"



다른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도 놀라서 목에 걸린 신성한 토템을 어루만지며 웅성거렸다.


세 자매는 프렐요드의 전설이자 가장 위대하고 영예로운 전사였다. 오래전 영웅의 시대를 살았던 최초의 냉기의 화신이자 선택받은 자들로서, 많은 프렐요드인들은 갈등이 있거나 전투를 치를 때 세 자매의 지혜와 가호를 기원했다.


브리나가 토르바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일까?


알아차려도 상관없었다. 열광하는 브록바르의 모습에 다른 전사들도 동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거짓말이 브록바르의 신앙심을 자극하리라는 사실을 토르바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전사들에 대한 브록바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제 이들은 브리나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외지인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토르바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그리고 외지인을 주시하고 있는 브리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살짝 미소 지었다.


신들의 뜻에 따라 이자가 살아남았다고 토르바는 확신했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신뢰할 수 있는 자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현명하십니다, 상흔의 어머니시여.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약탈조에 합류시키겠다. 잘 싸우고 능력을 증명하면 제안을 들어보도록 하지. 데마시아로 향하는 숨겨진 길에 대해서도 말이야. 하지만 이자를 관리하는 일은 네 몫이다. 만약 이자가 우리를 배신하면 네 목도 달아날 줄 알아."


토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외지인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와 함께 싸워라. 그리고 상흔의 어머니께 네 능력을 증명해라. 그럼 네가 원하는 동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토르바의 마지막 말에 외지인은 활짝 웃었다.


토르바는 외지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남부 출신치고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덩치가 더 컸다면 좋았겠지만, 대신 그는 영리하고 강했다.


토르바는 외지인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


외지인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허락 없이는 만지지 않을게." 토르바는 남자가 보지 못하게 뒤돌아서며 미소 지었다.


"뭐라고 했지?" 브리나가 물었다.


"당신의 말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상흔의 어머니시여."


"좋아, 그럼 이동한다. 약탈을 시작하겠다."

 

 

 

카르마 단편 소설: 날 기억해 줘

by 데이나 루어리 쇼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karma-color-story/

 

산비탈을 깎아 만든 수도원을 올려다보며 와타이는 초조한 듯이 손가락에 낀 비취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곳은 바로 카르마의 고향인 불변의 제단이었다.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편한 무릎 때문에 여정은 고되기 그지없었다. 와타이는 심호흡을 하고 길을 따라 카르마의 명상실 앞까지 걸어갔다. 입구에는 작은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입구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와타이는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여긴 정말 지긋지긋하군.' 와타이는 60년 전 승려들의 부름을 받은 자크리와 함께 왔을 때부터 불변의 제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바닥에 쓰러져 아픈 만큼이나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와타이는 몸을 일으켰다.


"괜찮나요?"


고개를 들자 키가 훤칠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비록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어깨 장식과 마치 후광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아이오니아의 쌍둥이 용을 보고 와타이는 그녀가 '카르마'임을 알아차렸다.


"괜찮습니다." 와타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덧붙였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잘 왔어요, 여행자여." 카르마는 검은 눈을 반짝이며 기쁜 듯이 웃었다. 그리고 와타이의 손을 잡더니 말했다. "가만히 있어 봐요..." 카르마가 다른 쪽 손을 움직이자 일렁이는 초록색 빛이 차갑게 몸을 감쌌다. 와타이는 피부가 따끔거렸다. 카르마는 와타이를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좀 어떤가요?"


와타이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였다. 무릎은 멀쩡했다. 하지만 새롭게 환생한 카르마의 능력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와타이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어설 수 있습니다."


카르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말 괜찮나요? 표정이—"


"다리는 괜찮습니다 '깨우친 자'여." 와타이가 손을 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마법으로 치유할 수 없는 아픔도 있지요."


당황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카르마의 표정은 차분했다.


"맞아요." 카르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와타이를 명상실로 안내했다. "난 슬픔을 치유하지 못해요. 만약 전쟁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죄뿐이죠. 난 수년 동안 이 나라를 돌아다니며 내 결정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고통받은 이들에게 사죄했어요. 녹서스와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했던 내 결정 때문에 말이에요. 하지만..." 카르마는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아니 '아이오니아'가 맞서 싸운 것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와타이와 카르마는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또 내가 도울 일은 없나요?" 카르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와타이가 손을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날 떠난 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어요. 이 반지 기억나세요?"


카르마는 비취반지를 보더니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럼요. 내가 선물... 아니, 그 사람이 선물했죠." 그리고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카르마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을 불러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자크리와 함께 지냈던 와타이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괜찮으니까 서두르지 마세요."


60년 전, 자크리는 자신의 약혼녀 와타이에게 불변의 제단으로 같이 가 달라고 부탁했다. 평생 마을을 벗어나 본 적 없었던 와타이는 세상 구경을 할 생각에 기뻤다. 그리고 어쩌면 둘이서 함께 여행하면서 평생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와타이와 자크리는 두 달간의 여정 끝에 수도원에 도착했다.


'당신 마음에 들 거야.' 자크리가 웃으며 외쳤다. 그 미소는 와타이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졌다. '우리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당신 가족이 놀러 오면 나무술사한테 부탁해서 침실을 더 만들 수도 있어. 수도원 바로 밖에 있는 마을에서 같이 살자, 기대되지?'


하지만 두 사람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와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과 가족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크리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와타이는 비취반지를 낀 채 혼자서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또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카르마와 재회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침내 카르마가 손을 내리며 눈을 떴다. 두 눈의 홍채는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크리가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수많은 목소리와 이야기할 때 내뿜던 빛과 같은 색이었다. 자크리의 전생이었던 그 목소리는 이제 카르마의 것이 되었다. 카르마가 눈을 깜빡이자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와타이?" 카르마는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정확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와타이는 눈물이 미처 흐르기도 전에 손을 들어 닦아 냈다. "정말 자크리가 당신 안에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내 안에 있기도, 또 없기도 해요. 기억은 내 것이 되었지만..." 카르마는 갑자기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와타이는 카르마의 눈을 응시하며 자크리가 자신을 볼 수 있길 바랐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음에 쌓인 후회와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미안해, 자크리. 당신과 함께 여기서 살았다면, 당신과 함께 고향에 돌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 아닌 또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했길 바라. 당신이 혼자 외롭게 지냈을 생각을 하니 괴로워."


와타이는 비취반지를 빼서 카르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기다란 손가락을 접어 반지를 감쌌다.


"안 돼요."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말했다. 카르마의 눈은 또다시 지나간 영혼들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자크리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대를 사랑했어요.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살지 못한 채 카르마가 되었다는 것이 유일한 후회였죠. 하지만 자크리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아이오니아의 혼이 언제나 함께였으니까요." 카르마는 와타이에게 반지를 건넸다. "자크리는 그대가 반지를 맡아 주길 원해요.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말이죠."


카르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와타이는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웠다. 이렇게 하는 편이 옳았다. 자신 역시 또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사랑해, 자크리." 와타이는 떨리지만 기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카르마가 빛이 사라진 눈으로 와타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항상 금방 끝나 버려요."


와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멘 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고마운 쪽은 나예요, 와타이."


"네?"


"자크리가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열었으니까요. 공격이 시작된 이후 처음이죠. 자크리는... 실망한 듯했어요. 나보다 먼저 카르마가 되었던 자크리의 목소리와 조언을 듣지 못한 채 긴 세월이 흘렀어요." 카르마는 와타이의 손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 "덕분에 자크리가 돌아왔어요. 고마워요."





자신을 다르하라고 소개한 카르마는 와타이에게 불변의 제단에 며칠 더 머무르기를 권했다. 자크리와 작별한 이와 자크리를 다시 받아들인 이가 만났으니 함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명상실을 나오면서 와타이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충직에 감탄했다. 자크리와 와타이의 서로를 향한 사랑처럼 반지 역시 60년이 지나도록 전혀 변함이 없었다. 와타이가 죽어서 백골이 되더라도 반지는 사랑의 징표로서 그 자리에 남을 터였다.


그리고 카르마를 통해 두 사람은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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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사일러스 ㄷㄷ

돼지 저금통 | 218.144.***.*** | 19.11.2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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