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4]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나는 추억 따윈 되지 않아

| 제목 |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 출시일 | 2020년 4월 10일 |
| 개발사 | 스퀘어 에닉스 | 장르 | 액션 RPG |
| 기종 | PS4 (1년 기간 독점) | 등급 | 15세 이용가 |
| 언어 | 자막 한국어화 | 작성자 | Graz'zy |
게임계 호사가들의 만년 떡밥이었던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가 드디어 출시됐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스퀘어에닉스 망할 즈음 나온다고들 했는데, 진짜로 개발사가 망해가며 꾸역꾸역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창세기전 4’로 충분히 봤는지라… 아직 스퀘어에닉스 중진이 건재할 때 리메이크가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파이널 판타지 7’은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아직 스퀘어소프트가 에닉스와 합병하지 않았던 1997년 출시됐다. 이정도면 이 글을 읽는 독자 상당수가 실제 플레이가 아닌, 구전되는 명성 혹은 ‘어드벤트 칠드런’과 같은 영상물로 본작을 접하지 않았을까 싶다. ‘파이널 판타지 7’은 6편부터 싹을 틔운 키타세 요시노리 특유의 센스가 만개한 작품이었다. 독특한 세계관과 탄탄한 서사, 매력적인 등장인물과 당시만해도 혁신적인 그래픽까지. ‘파이널 판타지 7’이 왜 명작인가는 너무 많이 회자된 주제이므로 굳이 길게 적진 않겠다.

출시된 지 23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최고의 '파이널 판타지'로 손꼽히는 7편.
그럼에도 필자는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가 긁기만 하면 당첨되는 복권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과거와 현재의 시장 상황이 엄연히 다르고 뭇 게이머가 공유하는 경험도 상이하다. 제아무리 전설이라 불리운 작품이라도 이제와선 낡고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수십 년 묵은 게임을 리메이크한다면 단순히 그래픽을 개선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서사와 시스템 전반을 살피고 복원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훌륭한 재해석이고 어디서부터 천인공노할 원작 훼손인지 명확치 않다는 것이다. 결국 전설의 복원이란 마냥 노다지라기보단 독이 든 성배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다면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전설적인 원작을 얼마만치 잘 계승 및 발전시켰을까. 본격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려면 게임의 온갖 요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그간 본지가 게임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스포일러를 최소화한 리뷰를 해왔지만, 이 작품은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선 핵심에 접근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이에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총평을 먼저 남긴다. 노무라 테츠야 디렉터의 야심 찬 전설 복원 작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다. 다양한 인물의 풍부해진 묘사와 그들이 발산하는 케미가 무척 매력적이며, 실시간과 턴제를 결합한 전투 시스템 역시 깊이 있고 도전적이다. 비록 메인 스토리에 비해 서브 퀘스트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드문드문 저질 텍스처가 신경 쓰이지만 평가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다. 다만 노무라 디렉터의 야심이 과하지 않나 싶을 부분이 있어서 23년 만에 리메이크임에도 원작을 모르면 당황할만한 내용이 나온다. 당초부터 말이 많았던 분할 판매에 대해선 엔딩을 보고 나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전설의 귀환, 정도로 정리하기에는 디렉터 노무라 테츠야의 야심 가득한 작품이 나와버렸다.
※ 이하 본문은 강력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엔딩을 본 후 읽기를 권합니다.
확장된 세계, 회귀하는 이야기
사람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쉬이 잊혀지고 변질된다. 필자가 ‘파이널 판타지 7’을 즐긴 건 워낙 어렸을 적이라 이제와 원작이 어떠하다 논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금 원작을 플레이하며 리메이크와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살폈다. 정가로 구매했다가 피눈물을 흘린 애물단지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이 드디어 도움이 됐다.
일단 기계적인 1:1 이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원작을 조금만 해봐도 알 수 있다. 오랜만에 다시 잡은 ‘파이널 판타지 7’은 필자가 추억하던 것보다 훨씬 대사가 적고 인물 및 배경 묘사도 미흡했다. 늘어진 전선을 붙잡고 슬럼가에서 플레이트까지 올라가는 등 말도 안되는 전개도 적잖다. 그도 그럴 것이 1997년이면 캐릭터 소개를 두꺼운 매뉴얼이 어느정도 대체해주고, 현실적인 축척의 배경이나 물리 효과가 필요치 않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사전 예약하고 피눈물 흘린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이 드디어 뭐라도 쓰임새를 찾았다.

23년 묵은 게임을 기계적으로 이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재해석은 필수적이었다.
거기다 1997년 원작만 놓고 보면 클라우드를 비롯한 주요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미묘하게 다르다. 이것은 엄밀히 따져서 ‘파이널 판타지 7’이 지난 23년간 봉인되었다가 갑자기 리메이크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번 리메이크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전개된 일련의 ‘파이널 판타지 7’ 프리퀄, 시퀄, OVA 즉 ‘컴필레이션 오브 파이널 판타지 7’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여러 외전을 거치며 살이 붙은 캐릭터성과 전반적인 미술적 지향점을 흡수하여 다시금 원작으로 회귀하는 작품이 바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다.
노무라 디렉터에게 ‘컴필레이션 오브 파이널 판타지 7’은 리메이크가 도달 혹은 넘어서야 할 확고한 기준이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원작에서 작은 맵 하나로 퉁쳐버린 슬럼가, 철도, 마황로 등을 확장하고 NPC, 퀘스트, 퍼즐, 미니 게임 등으로 충실히 채워 넣었다. 덕분에 원작에서 못해도 두 시간이면 만나던 에어리스를 열 시간 걸려야 볼 정도로 미드가르 편의 분량이 크게 늘었다. 이 와중에 얼핏 완전히 새로 만든 듯한 맵에도 깨알 같이 원작의 기믹을 재현하여 향수를 자극한다. 본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소품을 퍼즐로 재해석한 부분도 있다.

'컴필레이션 오브 파이널 판타지 7'으로 정립된 미술적 지향점이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의 토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초반에 잠시 머물던 슬럼가는 여러 NPC와 서브 퀘스트를 갖춘 활기 넘치는 거점으로,

스치듯 지나가던 지역들은 시간을 들여 돌파해야 하는 던전으로 대대적인 확장을 거쳤다.
이러한 양적, 질적 개선은 비단 시각적인 요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원작부터 훌륭한 OST를 자랑하던 ‘파이널 판타지 7’은 프리퀄, 시퀄, OVA를 거치며 이미 상당량의 어레인지 곡을 확보해두었다. 금번 리메이크에선 여기에 더 많은 곡을 삽입하여 각 지역이나 상황별로 최적의 BGM을 깔아준다. 반가움, 쾌활함, 애틋함, 긴박함, 우울함, 두려움 등 온갖 감정이 BGM과 어우러져 몰입을 배가시킨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몰아치다가도 금세 지브리 애니메이션마냥 서정적으로 흐르는 신묘한 연출은 OST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깊어진 면면, 새롭게 맺어가는 인연
무대를 넓혔다면 다음은 그 안에서 활약할 배우를 고를 차례. 노무라 디렉터는 원작에서 일개 단역에 불과했던 아발란치 멤버 제시, 빅스, 웨지에 주목했다. 이들은 비록 단역이지만 7번가 플레이트 방어전에서 비장한 최후로 월마켓까지 이어진 가벼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이었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이들에게 저마다 인간적인 배경과 성격, 관계를 부여하여 다가올 희생의 무게감을 더했다. 제시의 주검 앞에서 진심으로 신라 타도를 맹세한 이가 어디 필자뿐이랴. 명실공히 리메이크의 최대 수혜자인 셈이다.

금번 리메이크의 최대 수확을 딱 하나만 고르라면, 기자는 아발란치 이 녀석들을 꼽겠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23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한번 터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조연 가운데 아발란치가 가장 눈에 띈다면 양대 히로인 티파와 에어리스의 묘사도 이에 못지않다. 1997년에는 게임이 먼저 나오고 두 히로인이 점차 인기를 얻었지만 리메이크는 상황이 다르다. 이미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전체를, 어쩌면 스퀘어에닉스 작품 전체를 통틀어 손꼽히는 블루칩인지라 이들을 조명하는 연출이 노골적으로 늘어났다. 클라우드가 두 히로인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교감하는 장면이 굉장히 많아 어딘가 미연시스럽기도 하다. 누가 ‘파이널 판타지 7’을 23년간 지탱해왔는지 생각해보면 마땅히 누릴만한 대우라 하겠다.
원작 초반부는 두 히로인의 비중이 다소 들쑥날쑥한데 리메이크에선 이 부분을 서브 퀘스트로 벌충해준다. 3부 세븐스 헤븐 서브 퀘스트는 티파와, 8부 재회의 꽃 서브 퀘스트는 에어리스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다만 내용면에서 특별히 히로인의 서사를 보강해준다 보기 어렵고 과정 자체도 흥미롭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고 아예 서브 퀘스트를 무시하려니 100% 완료 시 발생하는 이벤트는 또 중요해서 이래저래 계륵 같은 콘텐츠. 최악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처럼 빼어난 메인 스토리와 나란히 두기에 부끄러운 수준이다.

히로인들의 비중이 원작과 비교도 안되게 늘었다. 대사만 놓고 보면 미연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JRPG 최대의 난제, 티파냐 에어리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클라우드 이 죄 많은 남자 같으니라고.

반면 서브 퀘스트는 실망스럽다. 그 자체로는 평범한 편이지만 메인 스토리와 비교했을 때 격이 떨어진다.
새로이 데뷔한 캐릭터들은 성공과 실패가 뒤섞여 있다. 바이크 액션신이 늘어남에 따라 중간 보스격으로 투입된 서드 클래스 솔저 로체는 꽤나 인상적이다. 원작에서 보기 드문 네임드 솔저와 대전인데다 ‘어드벤트 칠드런’ 사념체 삼인방의 아크로바틱한 바이크 액션을 흡수하여 호쾌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월마켓의 세 추천인과 레즐리 또한 향락의 거리라는 설정을 부각시키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해주는 훌륭한 감초들이다.
반면 서브 퀘스트에서 등장하는 키리에 카난은 거짓 선전에 좀도둑질까지 비호감만 쌓을 뿐 이렇다 할 매력이 없다. 리뷰를 준비하다 알게 된 바로는 ‘더 키즈 올라이트: 턱스 사이드 스토리’라는 소설의 여주인공이라는 모양인데. 단순히 소설 독자를 위한 찬조 출연인지 앞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선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천재 소년 채들리의 경우 시크릿 리서치라는 콘텐츠만을 위한 존재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짧은 등장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리메이크의 오리지널 캐릭터, 서드 클래스 솔저 로체.

반면 소설에서 수입된 키리에 카난처럼 그다지 존재 가치를 알 수 없는 캐릭터도 늘어났다.
티파와 에어리스가 예쁘면 된 거야
‘파이널 판타지 7’이 출시된 1997년은 3D 게임이 크게 도약하던 시기였다.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 닌텐도 64 등 5세대 콘솔은 이전과 비교도 안되는 고성능으로 3D 게임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다. 이즈음 ‘파이널 판타지 7’와 어깨를 견준 ‘007 골든아이’, ‘토탈 어나이얼레이션’만 봐도 저마다 각자 장르에서 한 획을 그은 명작들이다.
‘파이널 판타지 7’이 단지 그래픽만으로 평가받을 작품은 아니지만 그 그래픽이 흥행이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때부터 스퀘어 에닉스는 ‘파이널 판타지’ 정식 넘버링 타이틀만큼은 언제나 최상의 그래픽을 추구해왔다. 이러한 특유의 비주얼리즘은 ‘파이널 판타지 8’ 무도회 장면에서 한차례 절정에 달하였으며 ‘파이널 판타지 X/X-2’, ‘파이널 판타지 라이트닝 사가’, ‘파이널 판타지 15’를 거쳐 금번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에 이르렀다.

23년 전, 5세대 콘솔에 힘입어 당시로선 최고의 3D 그래픽을 선보인 '파이널 판타지 7'.

이후 '파이널 판타지'는 비주얼 하나만큼은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지를 다져왔다.
말하자면 ‘파이널 판타지’ 정식 넘버링 타이틀은 당대 그래픽 수준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가 된 셈이다. 일본 게임 업계가 전반적으로 약세를 보이던 2010년대 중반에도 ‘파이널 판타지 15’가 자랑하는 유려한 그래픽만큼은 누구도 평가절하할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역시 게임이 흥하든 망하든 적어도 비주얼은 돋보일 거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스퀘어 에닉스가 이 작품에 최대한의 자본, 기술력, 성의를 다할 게 분명했으니까.
실제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티파와 에어리스의 미모를 표현하는데 있어선 지고한 경지에 올랐다. 물론 클라우드, 바레트, 제시, 빅스, 웨지의 묘사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빼어나다. 각진 폴리곤 덩어리에 불과하던 캐릭터들이 풍부한 표정과 생동감 넘치는 몸동작을 지닌 진짜 사람으로 환골탈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그래픽 품질이 균일하지 못하다는 것. 주조연급까지는 흠잡을 데 없지만 몬스터, 기타 NPC, 배경순으로 텍스처가 급격히 나빠진다. 심지어 일부 배경은 텍스처 품질이 너무 떨어져 버그가 아니냐는 오해를 샀을 정도다.

에어리스의 미모만 따지자면 그래픽으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를 당할 게임은 없다.

그런데 몇몇 배경은 PS1 시절을 추억하듯 말도 안되는 저질 텍스처로 대충 마감되어 있다.

심지어 에어리스의 꽃밭처럼 최대한 아름답게 연출되어야 하는 배경조차 별반 다르지 않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그래픽의 기술적인 완성도보다는 전체적인 미관, 즉 미장센이 훌륭한 작품이다. 원작의 일견 음울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완벽하게 되살려냈다. 따라서 다소간 저질 텍스처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스퀘어 에닉스에게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작품이었다는 게 놀랍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현재로서도 충분히 봐줄 만하지만 일본 게임 업계의 기술력을 대표한다는 위상은 퇴색되고 말았다.
실시간 액션의 박력, 턴제의 깊이
지금으로부터 약 10개월 전, E3 2019에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를 시연하고(분량은 출시 직전 공개된 데모와 비슷했다) 짤막한 체험기를 작성한 바 있다. 당시 필자는 전투 시스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이었는데, 실시간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는 옛 개발자의 아집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필자의 식견이 너무 짧았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의 전투 시스템은 대단히 완성도 높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짧은 데모만으로는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 ATB 시스템의 진가를 파악하기 어렵다.
조금 뜬금없지만, 올해 초 출시된 ‘용과 같이 7’과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를 나란히 놓아두면 재미있는 비교가 될듯하다. ‘용과 같이 7’은 시리즈가 15년간 고수한 실시간 액션을 버리고 턴제로 선회했다. 역으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23년 만에 턴제에서 실시간 액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필자는 ‘용과 같이 7’ 리뷰에서 갑작스러운 장르 변경을 이렇게 해석했다.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파티 플레이가 먼저고 그걸 구현하고자 턴제를 선택했다고. 파티 플레이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턴제 전투 시스템이 필수불가결하다고.
그런데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실시간 액션을 채택하면서도 원작의 기본 틀이었던 파티 플레이를 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노무라 디렉터가 제시한 해법이 바로 발전된 형태의 ATB(Active Time Battle)다. 평타, 방어, 회피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시간을 정지시켜 아군의 다음 행동을 지시하거나 아예 조작 주체를 전환하여 동시에 여러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실시간 액션이면서도 턴제에 근접한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절충안인 셈이다.

턴제로 이루어지던 3인 파티 플레이를 실시간 액션으로 구현하기 위한 절충안이 바로 ATB다.

실시간으로 펼치는 평타, 방어, 회피는 빠르게 반응하고 몰아치는 피지컬이 요구되며,

시간을 멈추고 커맨드를 고를 때는 아군의 ATB 게이지, 적의 약점 속성 등을 고려하는 뇌지컬이 주효하다.
앞선 E3 2019에서의 오판에 대해 살짝 변명하자면, 이 전투 시스템은 짧은 시연만으로는 손에 익지 않는다. 클라우드로 적을 베어 넘기고 대검을 뉘어 방어하며 굴러서 피하기까지 하는 와중에 다른 캐릭터를 신경쓰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하지만 한번 익숙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다채로운 연계가 가능해지며 그만큼 파고들 여지가 많은 전투 시스템임을 깨닫게 된다. 캐릭터별 어빌리티와 장착한 마테리얼의 속성 및 배치, 기술 발동 범위와 장애물, 적의 위치(특히 높이), 여기에 소환수까지 고려하며 펼치는 전투는 피지컬과 뇌지컬을 동시에 요구한다.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의 ATB는 분명 난해하지만 그만한 손맛과 전술적 선택지를 제공한다. 이른바 만족스러운 복잡도다. 노무라 디렉터에게는 그냥 턴제를 유지하거나 아군을 AI로 떠넘긴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대신 거의 전례가 없는 새로운 전투 시스템을 놀랍도록 탄탄하게 완성시켰다. 여기에는 원작의 몇 가지 조건이 잘 맞아떨어졌는데, 최대 3인 파티를 넘지 않으며 틀에 박힌 탱딜힐 구성도 아니었던 덕분이다. 만약 지금의 ATB에서 파티원이 네다섯 명을 넘어갔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원작에서도 전투의 핵심이었던 마테리얼이 한층 다양해져, 플레이 방식에 따라 세팅을 달리할 수 있다.

무기 또한 일차원적인 성능 구분이 아니라 저마다 특화된 부분이 달라 선택의 자유도를 높였다.
운명을 넘어, 백지가 된 미래로
끝으로 팬덤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온 18장 그리고 엔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원작을 오롯이 재현하는 정석적인 리메이크가 아니다. 18장 운명의 특이점을 통째로 할애하여 기존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해버렸다. 사실 무언가 달라졌다는 조짐은 극초반부터 감지했지만 그냥 분량을 늘리는 와중에 소소한 변경점인 줄 알았다. 그러다 필러가 횡행하고 에어리스가 묘한 전파계로 바뀌고서야 어느정도 사태 파악이 됐다. 바로 직전에 원작을 복습했기에 필러의 역할이 무엇인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거하게 질러버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원작에서 에어리스 구출 후 미드가르를 벗어나기까지 플레이 타임은 대략 8시간 전후, 전체 분량으로 따지면 20% 정도 진행한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월드맵 이용이 가능해지는 등 플레이에 변화가 오므로 1부를 마감하기에 적절해 보인다. 남은 분량도 미드가르 편만큼 콘텐츠가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단순 계산으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5부작이 될 것이다.

에어리스와 첫 만남에서 세피로스의 허상이 보이고 시커먼 보자기들이 꼬일 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원작 훼손을 용서치 않는 필러 군단, 클라우드 일행이 운명에서 탈선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다.

1부가 원작의 20%(8시간 분량)이니까 산술적으로는 총 5부작이란 계산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1부 엔딩에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가 사실상 리부트로 판명됨에 따라 이러한 예측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됐다. 앞으로 클라우드 일행이 어디로 향할지, 무슨 일을 겪을지, 누가 죽고 누가 살지, 최종 보스가 세피로스가 맞기나 할지 우리는 전혀 모른다. 필러 프라이코를 토벌함에 따라 운명은 힘을 잃고 미래는 백지가 되었으니까. 노무라 디렉터는 바로 다음 편에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를 끝낼 수도 있고 10부작까지 늘려버릴 수도 있다.
1부가 후반부 충격 반전과 함께 엉망진창이나마 기승전결의 구색을 갖춤에 따라 분할 판매가 상술이라는 비판도 다소 애매해졌다. 하나의 기다란 이야기를 맥락 없이 끊어버린다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저마다 기승전결을 지닌 여러 편을 엮으면 평범한 시리즈물이기 때문이다. 가령 ‘킹덤 하츠’는 장장 17년만에 다크시커 편을 완결냈지만 아무도 분할 판매라 생각치 않는다. 물론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 순 없겠으나 노무라 디렉터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파이널 판타지 7’ 기반의 장대한 서사시를 구상해두고 1부라는 식으로 시장의 반응을 떠보는지도 모른다. 원작 팬으로선 기대 반 걱정 반, 아니 기대가 3 걱정이 7 정도일까.
결과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는 새롭게 유입된 게이머보다는 원작 팬을 위한 작품이 됐다. 17장 초반까진 그럭저럭 주어지는 정보만으로 이해가 되겠지만 이후의 정신나간 전개는 원작을 모르면 도저히 쫓아가기 힘들 듯하다. 과연 신규 유입된 게이머가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너무 궁금하다. 어쨌든 안정적인 길을 놔두고 과감히 승부수를 던진 야심만큼은 인정해주고 싶다. 1부가 기대의 부응하는 완성도를 보여줬으니 남은 건 백지가 된 미래를 어떻게 채색하느냐다. 추억 속에 가만히 머물러 달라는 일부 팬덤의 바람에 노무라 디렉터는 마치 세피로스처럼 답하고 있다. ’파이널 판타지 7’은 추억 따윈 되지 않는다고.

The Unknown Journey Will Continue… 이제 노무라 디렉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나.
작성 및 편집: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