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 내성적인 이들을 위한 다정한 세계 만들기
‘당신의 판타지 라이프’라는 슬로건으로 국내 온라인 게임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마비노기’가 어느덧 서비스 15주년을 맞았다. 풍부한 생활 콘텐츠와 자유로운 성장 시스템, 여러 매력적인 NPC와의 상호작용 등 ‘마비노기’가 보여준 자유도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것이었다. 덕분에 수많은 게이머가 ‘마비노기’를 또다른 삶의 터전으로 삼고 크고 작은 인연과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오랜 서비스 기간만큼이나 유저들에게 있어 순수한 애정보다는 애증(愛憎)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 강렬한 관심 자체가 ‘마비노기’의 커다란 영향령을 방증하는 셈이다.
기념비적인 서비스 15주년이라서일까, 혹은 모바일 버전인 ‘마비노기M’ 출시가 목전이라서 일까. ‘마비노기’ 초기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데브캣 스튜디오 ‘나크’ 김동건 본부장은 새삼 24일(수),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EXON Developers Conference, NDC)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마비노기 개발 전설’이란 제목으로 기조 강연을 진행했다. 과연 2000년대 초 ‘마비노기’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국내 온라인 게임의 역사를 함께해온 ‘마비노기’가 다음 세대로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지 함께 살펴보자.
왜 지금 마비노기인가?
대부분 컨퍼런스의 기조 강연이라 함은 자사와 업계에 대한 거시적 방향 설정이나 덕담이 주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와 서비스 15년차 게임의 포스트 모텀(Post-mortem, 사후 분석)이라니. 이에 김동건 본부장은 최근 옛날 게임 모으기에 취미를 붙인 것이 금번 강연의 단초가 되었다고 밝혔다. 해외의 경우 30년도 더 된 작품이라도 아마존을 뒤져보면 금세 찾을 수 있고, 개중에는 ‘페르시아의 왕자’처럼 아예 소스 코드가 공개된 것도 있다. 반면 국산 게임은 개발 역사와 자료가 도대체 남아있질 않더라는 것이다. 패키지 시절에는 자료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온라인, 모바일로 넘어와서는 옛 게임을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탓이다.
김 본부장은 미래를 바라본다면 우선 과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게임은 전부 똑같고 발전이 없다는 유저들의 지탄, 거기에는 개발자의 책임도 있지만 과거가 너무 빨리 유실된 악재가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모두의 기억과 경험 속에 있는 노하우를 기록하고 나누었다면 보다 나은 게임 개발 생태계가 되었으리라. 따라서 오늘날 서로 단절된 체 점으로 남아있는 국산 게임들을 서로 연결하여 미래로 나아갈 선을 그려내야 하며, 아직까지 관련 자료와 개발 인력이 많이 남아있고 서비스도 진행 주인 ‘마비노기’ 포스트 모텀이 그 첫 걸음이라는 것.
새로 이사 온 아이의 장난감
‘마비노기’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김동건 본부장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아마추어 게임 제작에 뛰어든 1세대 개발자로, 이미 대학에 다닐 무렵 첫 패키지 게임을 출시했다. 3년을 꼬박 투자한 김 본부장의 데뷔작은 3,000장가량 팔렸으며 숙식 등을 고려하면 적자였지만 젊은 개발자의 꿈을 키우기에 충분한 성과였다. 그러다 당시 막 붐이 일던 인터넷 통신을 접하고는 지금은 ‘파파랑’으로 잘 알려진 이은석 디렉터와 ‘둠 2’ 멀티 플레이를 즐기곤 했다. 이러한 경험이 이어져 대학 텔넷으로 접속하는 BBS(Bulletin Board System, 게시판)를 직접 만들었는데, 재미있게도 이것이 훗날 ‘마비노기’ 개발에 토대가 되었다고.
김 본부장이 운영한 BBS는 단순히 글을 쓰고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경험치를 얻고 아이템 파밍까지 하는 등 게임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는 이곳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늘 상주하는 일명 ‘죽돌이’들을 보며 새로운 MMORPG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온라인이란 플랫폼은 내성적이지만 친구를 사귀고픈 이들을 위한 훌륭한 사교 공간이 되어줄 수 있다고, 그런 게임을 만들자고 말이다. 가령 아파트에 새로운 아이가 이사를 왔다고 가정해보자. 놀이터에는 이미 서로 가까운 친구끼리 모여 있고, 아이는 무리에 끼고 싶지만 다가설 용기가 없다. 그래서 아이는 다른 애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장난감을 들고 서성이며 다가와주길 기다린다. 친구를 사귀고픈 사회적 욕구, 그걸 위해 신기한 장난감을 구하는 행위가 곧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목적과 과정이란 설명이다.
김동건 본부장은 다름아닌 자신이 그 이사 온 아이였으며, 내성적인 사람을 위한 게임을 만들기로 다짐했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2000년 1월 1일 넥슨에 입사한 그는 ‘부루마불 온라인’, ‘모험의 바다’, ‘소사리언 온라인’, ‘슈퍼로봇대전 온라인’ 등 이제 보면 솔깃한 기획을 여럿 냈으나 모조리 반려되고 말았다. 당시만해도 프로젝트를 킥오프하는 과정이 중구난방이어서 경력이 없는 신입 개발자는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튀는 제목과 원대한 기획으로 있어 보이게 꾸며낸 작품이 바로 ‘마비노기’. 과거 BBS를 운영하며 쌓은 노하우와 아이디어를 반영하여 나름의 법칙으로 굴러가는 자유로운 판타지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해외에 ‘울티마 온라인’ 같은 성공 사례가 있긴 했지만 ‘마비노기’는 여기에 다정함을 더하고자 했다. 동물과 아이가 많이 나오고, 캠프파이어 둘러앉아 먹을 것을 나누거나 NPC가 생일을 기억해서 축하해주는 ‘마비노기’ 특유의 분위기는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원대한 기획 vs 기술적 불안요소
확 튀는 기획으로 프로젝트를 잡긴 했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비노기’ 개발팀이 설정한 최중요 목표는 3D화와 DB 구축이었다. 김 본부장이 꿈꾸던 진짜 판타지 라이프를 구현하려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이 매우 중요했고, 그러려면 3D화가 필수불가결했다. DB는 BBS를 운영하며 파일기반 서버의 한계를 체감했기에 안정성과 운영 품질을 위해 꼭 갖추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넥슨에 3D를 해본 팀이 없었고 모든 프로젝트가 DOOMVAS라는 파일기반 서버를 사용해 DB 구축 경험도 전무했다. 결국 비교적 3D 활용이 원숙하던 콘솔 게임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고, 그 중 세가의 ‘젯 셋 라디오’에서 큰 감명을 받아 카툰렌더링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이렉트X 7에는 셰이더조차 없었기에 카툰렌더링 구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원색 위주의 캐릭터에 외곽선을 주어 형태를 강조하는 기법은 놀랍게도 아래한글에서 표 만드는 코드와 유사하다고. 카툰렌더링 특성상 명암을 주기 힘들었는데 조명을 한 번에 하나만 쓸 수 있어서 주광과 지역 광원을 상황에 따라 골라 받도록 조정했다. 아울러 주광 방향으로 그라데이션을 깔아 대기감과 공간감을 조성하는 방식은 TV 애니메이션에서 따왔다. 대부분 눈속임에 가까운 궁여지책이었지만 결과는 썩 훌륭했다. 이 모든 것은 자체개발한 3D 엔진 덕분이었으나, 서비스가 장기화되며 낮은 버전의 다이렉트X API가 최신 하드웨어를 따라가지 못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다음으로 DB. 여기서 말하는 DB는 오라클, MSSQL 같은 분리된 솔루션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 넥슨은 자체 파일기반 DB만 사용했으나 김 본부장은 윈도우 서버를 쓰고 싶었다. 때문에 이미 잘 돌아가고 있는 여타 프로젝트의 코드는 하나도 유용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파일기반 서버에 비해 속도가 너무 떨어졌다. 베타 기간 중 유저데이터를 기록하는데 5분씩 걸렸는데 도중에 서버가 다운되기라도 하면 모조리 날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DB는 훗날 ‘마비노기’ 라이브 서비스를 이어가며 혁혁한 공을 세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되었다.
전투와 이야기, 그리고 음악
2000년대 초 게임의 전투란 대부분 턴제였다. 실시간처럼 보이는 온라인 게임도 실은 MUD에서 기반한 일정 시간마다 자동으로 턴을 주고 받는 방식이 내제되어 있었다. 김동건 본부장은 이 턴제를 벗어나보고자 대전격투 장르에서 착안한 카운터>강공격>가드>약공격 상성 시스템을 도입했다. 여기에 카운터 중에는 이동 불가, 가드 중에는 달리기 불가라는 제약을 넣어 단순히 너 한 대 나 한 대 치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재미있는 점은 턴제를 탈피하려 도입한 가위바위보 전투를 보고 유저들은 되려 ‘마비노기’가 턴 기반이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유저는 블로우되어 공격기회가 바뀌는 것까지 턴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상적인 일대일 전투와 달리 다대다 상황에서는 메커니즘이 기대만큼 매끄럽지 못했고 수백시간 플레이하는 온라인 게임으로서는 너무 피로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스토리는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분신이므로 불사신이다’라는 대전제를 깔고 출발했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주도적을 참여하는 메인 스토리를 짜고 당시로선 생소하던 컷씬 연출도 적극 활용했다. 게임 세계가 낙원이고 낙원이라 생각했던 곳이 현실이라는 반전에 가까운 세계관 설정도 처음부터 잡혀 있던 것이다.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일체감을 주기 위해 고집스럽게 추구한 디테일도 적잖은데, 가령 내가 보는 방향을 캐릭터가 자연스레 주목하며 그 외에 두리번 거리거나 하는 의도치 않은 모션은 가급적 배제했다. 이런 기능은 판타지 라이프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나 너무 자연스러웠던 나머지 역으로 그 존재조차 모르는 유저도 많았다.
‘마비노기’하면 떠오른 또다른 아이덴티티라면 역시 작곡과 연주다. 애초에 제목부터가 ‘음유시인의 노래’라는 의미이고 실제로 게임 내에서 악보 작성과 연주 시스템을 지원하기도 했다. ‘마비노기’의 악보는 MML(Music Mock-up Language)로 이루어졌는데 정작 김 본부장은 개발 당시 MML이 뭔지 몰랐다고(혹은 없었거나). 사실 그 시절 컴퓨터 잡지에는 악보 코드가 실리는 일이 흔했고 이걸 그대로 쓸수 있도록 8비트 MSX 컴퓨터에 들어있는 베이직 명령어 플레이 문법을 따라한 것이다. 아울러 웹에서도 들을 수 있게 하려고 MIDI 플레이 API를 사용했는데 MIDI 채널 수 부족으로 합주 시 음이 안들린다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합주는 유저들이 100%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놀이 문화였기 때문이다.
마비노기에서 마비노기M으로
끝으로 김동건 본부장은 ‘마비노기’에서 나오와 함께 마스코트로 활약 중인 소녀 로나와 검은 양 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로나와 판은 ‘마비노기’ 디렉터인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대본 작업에도 참여한 일종의 ‘자캐(自 Character)’라 할 수 있다. 로나는 현실에서 내성적이고 자신감 없는 학생으로 일상에 치여 살았지만, 게임 속 세계인 에린에 와서 많은 것을 새로이 경험하고 여러 인연을 만나 행복하다고 말한다. 김 본부장은 이러한 ‘마비노기’ 정신이 이제는 ‘마비노기M’으로 계승되었으며, 구버전의 충실한 복각이 아니라 전하고자 했던 느낌을 현 시점에 맞게 다시금 만드는 작업이라고 첨언했다. 모바일 MMORPG ‘마비노기M’은 연말 출시를 목표로 개발 중이다.
비록 PC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플랫폼은 바뀌었지만, 내성적인 이들을 위로해주던 ‘마비노기’ 정신이 여전하길 바라며 작중 로나와 판의 대화로 기사를 마무리하겠다.
"에린에 오면 내가 굉장히 활발한 사람이 된 거 같아."
"어라, 너 원래 그런 거 아니었어? 폭력소녀라고 다 들통났어."
"글쎄… 여기 오기 전에는 수줍음도 많이 타고 자신감도 없고 그랬어."
"믿어지지 않아, 로나."
"늘 공부만 해서 친구들도 없고, 운동이나 노래나 뭐하나 잘하지도 못하고."
"정말?"
"에린에서도 처음에는 난 여자애니까 전투 같은 건 못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해보니까 재미있어. 잘하게 되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던전에도 가보고 아레나에서도 이겨보고… 그러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무슨 생각?"
"그냥 내가 너무 겁먹고 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 못하면 안된다, 항상 잘해야 된다는 생각에 뭔가를 시도하기가 두려운거…."
"여기선 곧잘 하잖아."
"응. 그러니까 여기가 좋아. 하지만 이제는 에린 밖에서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로나가 조금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
"히히…."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