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의 아류를 넘어서 가라, ‘원신’ CBT 체험기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외부로부터 수없이 많은 간접적인 영감을 받고 필요하다면 그것을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기도 한다. 그림 그리기의 첫 걸음은 좋아하는 작가를 모작하는 것이며 신상 개발을 하려면 우선 시장에서 1등하는 제품을 살피기 마련이다. 개도국의 산업 대다수가 적잖은 데드카피를 양산하며 성장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가 그러한 데드카피의 편리한 변명이 되어선 안되겠다. 그림 실력을 키우기 위해 모작을 할 순 있지만 그걸 자신작이라 자랑스레 내보이지 않듯이. 모방은 결국 모방일 뿐 떳떳한 창작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수위에 따라서 가벼운 오마주인지,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는지, 빼도 박고 못할 표절인지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잡설이 길었다. 지난 19일부터 내달 7일까지, 미호요의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원신(Genshin Impact)’ 국내 CBT가 진행 중이다. 첫 공개 당시부터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와 유사성이 지적된 바로 그 작품이다. 확실히 두 게임을 나란히 놓고 보면 비슷하긴 하다. 그렇다고 대뜸 ‘원신’을 아류작 취급할 수는 없겠지만 ‘젤다의 전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거짓말일 것이다. ‘원신’은 분명 ‘젤다의 전설’이라는 그늘 아래 머물러 있다.
미호요가 만든 오픈월드 RPG '원신' 국내 CBT가 내달 7일까지 진행된다.
어디서 본듯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우선 눈에 들어오는 외형부터 살펴보자.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이하 야숨)’는 미려한 빛 표현과 파스텔톤 색감으로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기에 문명의 흔적이 소실된 광활한 대지와 풍부한 자연물 묘사가 만나 하이랄을 당장이라도 달려가고픈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어줬다. 불꽃과 번개 등 각종 이펙트 또한 이러한 그래픽과 잘 어울렸다.
솔직히 ‘원신’을 접했을 때 첫인상 역시 감탄이 나왔다. ‘야숨’하면 떠오르는 따스하고 청명한 느낌을 제대로 살렸고 그래픽 품질 자체는 그 이상이다. 당연히 스위치 사양에 최적화된 ‘야숨’보다 PC의 넉넉한 자원을 활용하는 ‘원신’이 유리한 지점이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흠잡을 데 없는 솜씨다. 자연물 외에 캐릭터와 각종 오브젝트 디자인 및 배치도 어설프게 따로 노는 것이 없다. 캐릭터 모델링의 경우 ‘야숨’과 달리 외곽선이 뚜렷한 전통적인 카툰 렌더링인데, 아마도 애니메이션풍 미소녀를 묘사하기에 이쪽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원신'의 세계 티바트는 그야말로 아름답다. 외형적인 완성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의 경우 외곽선을 살린 보다 전통적인 카툰 렌더링이다. 디자인은 훌륭하다.
캐릭터는 남녀 선택이 가능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활달한 정찰병, 능글맞은 기사, 모범적인 단장, 열정적인 꼬마 요리사 등 다채로운 인물상이 등장한다. 각 캐릭터는 저마다 서브 퀘스트를 통해 몰입할만한 서사를 지니고 있으며 디자인도 썩 훌륭하다. 이 부분은 미호요가 충분히 잘해온 바이고 ‘야숨’과 방향성이 아예 달라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여기까진 좋은데, 어째 이야기의 또다른 축인 몬스터의 경우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야숨’에서 따온 것이 많다.
여기저기 부락을 이룬 츄츄족은 보코블린을 연상시키고 사악한 심연 메이지는 위즈로브를 닮았다. 키이스, 옥타, 츄츄(그러고보니 이름이…)도 마찬가지로 대응하는 몬스터가 있다. 외형이야 그렇다 쳐도 행동양식까지 모방한 것은 좀 지나치다. 인간형 캐릭터를 보면 디자인 역량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비슷하게 만들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설마 오마쥬인가?
네 녀석들은 츄츄! 뭐? 츄츄족은 따로 있다고?
그러면 이 마법사 녀석도 위즈로브가 아닌 건가…
후술하겠지만 ‘원신’은 다양한 원소를 활용한 전투 시스템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문제는 이 원소가 발현할 때 이펙트가 ‘야숨’과 매우 유사하다. 이펙트는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발사의 아트파워를 가늠하는 척도일만큼 중요한 요소다. 폭탄이 터지고 벼락이 치는 똑같은 현상을 놓고도 게임에 따라 이펙트는 천차만별이다. 가뜩이나 전반적인 색감과 빛 표현이 닮았는데 이펙트까지 빼다 박아버리니 게임 그래픽 전체가 ‘야숨’ 모작처럼 보일 수밖에.
선형적 이야기와 비선형적 무대의 괴리
사실 ‘원신’이 겉모습 이상으로 ‘야숨’에서 영향을 받은 대목은 오픈월드를 구현하고 채워 넣는 방식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이것이 ‘야숨’의 콘텐츠 구조 그 자체를 가져왔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신’은 캐릭터, 장비, 스킬마다 레벨이 존재하며 비경(‘야숨’ 사당) 입장에 레벨 제한이 걸리는 완연한 RPG다. 물론 몬스터에게도 레벨이 있으므로 캐릭터와 장비, 스킬을 충분히 육성하지 않으면 고위험 지역에서 순식간에 땅바닥과 입맞춤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레벨 기반 RPG다. 다만 사냥보다는 경험치 스크롤로 캐릭터를 육성한다.
장비와 스킬도 강화해야 한다. 고등급 장비는 비경을 공략하거나 뽑기로 얻는다.
반면 오픈월드의 구성만큼은 ‘야숨’을 거의 그대로 따라했다. 각국의 중심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산과 들판이며 그곳에는 온갖 종류의 퍼즐과 미니게임이 가득하다. 바람개비를 만졌더니 허공에 원이 생겨서 날개(를 가장한 패러세일)를 펴고 통과한다든가 제한 시간 내에 모든 풍선을 쏘아 맞추고 떠도는 정령을 인도하여 등불을 밝히기도 한다. 츄츄족 부락을 싹 정리한 후 보물상자를 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상자를 열 때 특유의 BGM도 흡사하게 들린다. 어디든 등반이 가능하며 신상에 특정 재화를 받쳐 스태미나 총량을 늘리는 방식도 똑같다.
문제는 레벨 기반 RPG라는 ‘원신’의 정체성과 ‘야숨’에서 따온 오픈월드 구성이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한다는 것. 흔히 오픈월드라면 ‘어쌔신 크리드’나 ‘엘더스크롤’이 떠오르지만 ‘야숨’은 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마을과 던전, 거기에 딸린 서브 퀘스트의 밀도를 낮추는 대신 탁 트인 풍광과 곳곳에 숨겨놓은 크고 작은 퍼즐로 ‘멸망한 하이랄에서 펼쳐지는 용사의 모험’이란 테마를 극대화했다. 중앙 분지에서 출발하는 링크의 여정은 철저히 비선형적이며 그렇기에 서사 또한 다소 불친절할 정도로 느슨하게 짜여졌다. 레벨 기반이 아니므로 링크는 네 마리 신수 중 어느 쪽이든 먼저 갈 수 있고 아예 딴 길로 새서 자신만의 모험을 즐길 수도 있었다.
크고 작은 퍼즐로 가득 채운 오픈월드는 소소한 발견의 즐거움, 모험의 설렘을 준다.
패러세일 비슷한 날개도 있다. 다만 말 같은 탈것이 없어서 장거리를 오가기 지루하다.
신상에 공물을 바치면 스테미너를 늘려준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를 했다면 익숙할 것이다.
이에 반해 ‘원신’은 아주 일반적인, 선형적인 서사구조의 RPG다. 어쩌다 오빠(또는 여동생)을 잃고 이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은 가까운 몬드성으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리며 현지 기사단과 관계를 쌓고 나아가 타락한 바람의 용에 얽힌 음모를 함께 파헤쳐간다. 메인 스토리는 시작부터 주인공을 꽉 잡고 계속해서 다음, 다음 이야기로 이끈다. 얼른 풍마룡을 갱생시키고 사라진 남매도 찾아야 하는데 여유롭게 유랑을 즐길 최소한의 개연성이 없다.
물론 메인 스토리에서 유도하지 않더라도 오픈월드를 돌긴 돌아야 한다. 캐릭터와 장비를 육성하고 쥐꼬리만한 스테미너도 늘려야 하니까. 여기서 더욱 황당한 점은 게임이 어느 순간 메인 스토리를 끊고 플레이어를 방치한다는 것이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려면 그만한 모험 등급을 달성해야 하는데 이게 서브 퀘스트 좀 한다고 통과되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다.
메인 스토리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모험 등급이란 장벽으로 막아버린다.
맵은 다 밝혔는데 서브 퀘스트는 부족하고… CBT라서 그런 거라 생각하겠다.
가령 프롤로그 제2막에서 제3막으로 넘어가려면 모험 등급 Lv.18을 달성해야 한다. 일단 지도에 표시된 서브 퀘스트를 모두 완료하고 일일 퀘스트까지 해봤지만 택도 없길래 몬드성 다음 지역인 리월항까지 진출하여 접근 가능한 모든 신상을 활성화했다(‘야숨’ 시커 타워와 같다). 오픈월드에 널린 퍼즐도 여럿 풀고 상자도 많이 열었지만 소용없었다. 해결책은 비경을 반복해서 돌거나 장기간에 걸쳐 일일 퀘스트를 성실히 완수하는 정도. 이런 건 콘솔 게임의 방식이 아니다. 이건 모바일 게임에서 콘텐츠 소모를 늦추는 장벽에 가깝다.
한 사람의 무기와 능력을 여럿이 나누다
다시 ‘원신’의 원소와 전투 시스템으로 돌아가자. 작중 세계관인 티바트는 일곱 가지 원소를 기반으로 창조된 곳이며 주인공을 비롯한 주역 캐릭터는 저마다 원소 하나씩을 다루는 능력을 지녔다. 서로 동일한 원소의 힘을 보유한 캐릭터도 있으며 그럴 경우 사용 방법이 달라진다. 쉽게 말해서 불의 검을 쓰는 전사도 있고 불화살을 쏘는 궁수도 있다.
일곱 가지 원소와 그걸 다루는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뽑기 운이 좋다면 얘기지만.
이들 원소는 각종 소재 그리고 또다른 원소와 상호작용하여 여러가지 효과를 낸다. 가령 츄츄족이 나무방패를 들고 있다면 불화살로 태워버리고 물가에 모여든 적은 전격 한방에 모조리 감전시킬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물의 원소를 다루는 캐릭터로 상대를 흠뻑 적신 뒤 벼락으로 쓰러트리거나 강풍을 부르고서 불을 붙여 화염 회오리로 바꾸는 게 가능하다.
확실히 원소간 상호 작용은 인상적인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닌가? 이처럼 창발적인 플레이를 시스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야숨’의 핵심 컨셉이었다. 들판에 붙을 붙여 상승 기류를 만들고 잠자는 몬스터 배 위에 강철 방패를 놓아 벼락을 유도할 수 있는 게임이 바로 ‘야숨’이다. 물론 ‘원신’에 존재하는 원소간 상호 작용 가운데 ‘야숨’에 없는 것도 있고 ‘야숨’에서 가능한 활동이 ‘원신’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원신’이 스스로를 대표한다는, 가장 중요한 시스템을 경쟁작에서 따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원소간 상호 작용은 퍼즐과 전투에 폭넓게 쓰인다. 머리 위에 현재 적용된 원소가 표시된다.
불과 전기를 섞으면 과부화로 큰 충격을 준다. 물론 RPG인지라 레벨을 초월하는 효과는 아니다.
이 시스템을 보조하는 원소 시야라는 것도 있다. 초록색은 나무를 의미하며 불에 잘 탄다.
정리하자면 본래 링크 한 사람이 지녀야 할 다양한 무기와 능력을 여러 캐릭터로 쪼개 놓은 꼴이다. ‘원신’의 경우 ‘야숨’보다 훨씬 등장인물이 많고 왁자지껄한 모험담이기에 이러한 시도는 꽤 영리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한 사람의 무기와 능력을 여럿이 나눴으니 그 개개인은 다소 얄팍할 수밖에 없다는 것. 조작키가 이동, 평타, 특수기, 필살기, 회피, 뛰기가 전부다.
이렇게 된 또다른 이유는 ‘원신’이 모바일과 크로스 플랫폼을 추구하는 게임이라서다. 즉 모바일로 곤란한 조작은 애초부터 논외라는 콘솔 게임으로선 상당히 뼈아픈 제약이 걸렸다. 그 탓에 캐릭터 하나만 사용하는 ‘원신’의 전투 시스템은 PC, 콘솔 기준으로 최대한 좋게 봐줘도 평균 이하다. 어차피 원소간 상호 작용을 노리느라 캐릭터를 바꿔가며 싸우긴 하지만 이게 또 RPG 아닌가. 복수의 캐릭터를 적정 레벨만큼 육성하려면 경험치 스크롤이 엄청나게 필요하다. 그리고 CBT라 그런지 몰라도 서버랙으로 캐릭터 변경이 안되는 상황이 꽤 자주 있었다.
화려한 이펙트에 가려 티가 덜 나지만 액션은 단조로운 편. 모바일 조작을 고려한 탓이다.
콘솔 감성과 모바일 시스템의 동상이몽
분명 ‘원신’의 첫인상은 매력적인 캐릭터와 스토리, 드넓은 오픈월드까지 더해진 번듯한 콘솔 게임이었다. 거의 AAA급이 아닐까 싶었을 정도다. 그런데 갈수록 모바일 게임에서나 볼법한 팍팍한 육성 방식과 이야기 흐름을 끊어 먹는 콘텐츠의 높은 장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게임은 뽑기가 있다. 그렇다. ‘원신’은 흔히 말하는 ‘가챠겜’이다. 뽑기를 하면 낮은 확률로 추가 캐릭터와 고등급 장비를 얻을 수 있으며 중복 획득을 통해서만 해금되는 특성도 있다.
결국 크로스 플랫폼이 묘한 혼종을 낳은 셈이다. 콘솔과 모바일 사이 그 어디쯤 자리잡은 ‘원신’을 보노라면 지난해 “콘솔 게임 같은” 수식어를 달고 나왔던 ‘어나더 에덴’이 떠오른다. ‘가챠겜’이면서도 싱글 플레이에 초점을 맞춘 방향성이 얼추 비슷하다. 당시 ‘어나더 에덴’이 괜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모바일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원신’ 국내 CBT를 체험한 기자의 감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바일 게임으로서는 대작임에 틀림없지만 콘솔 게임으로는 애매하다. 향후 이 작품이 어떤 방식, 어떠한 BM으로 서비스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나더 에덴' 때도 느꼈지만, 뽑기(가챠) 붙은 게임이 콘솔 감성을 운운하긴 한계가 있다.
노는 캐릭터는 스무 시간씩 탐색을 보내기도 한다. 애초에 장기간 플레이를 염두에 둔 구조다.
‘원신’을 그냥 콘솔에서도 돌아가는 모바일 게임으로 본다면 ‘야숨’과의 직접 비교는 무의미하다. 오마주냐 데드카피냐를 떠나서 모바일로 이만한 오픈월드를 구현한 점은 칭찬할만하다. 다만 이걸 콘솔 게임으로 보고 “미소녀가 주인공인 ‘야숨’이다!”라는 감각으로 접근하는 건 말리고 싶다. 모바일 게임의 요소가 결합된 만큼 플레이 방식과 호흡도 그에 맞춰져 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원신’은 ‘야숨’에서 스킨만 바꿔 씌운 그런 뻔한 데드카피는 아니다. 어쨌든 무어라도 첨가했다는 측면에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최소한의 요건은 충족한다. 그러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시까지 남은 기간 동안 스스로의 장점을 더욱 끌어올리기 바란다. 다종다양한 캐릭터와 선형적이기에 더 탄탄할 수 있는 메인 스토리는 ‘원신’이 앞서 나갈 수 있는 지점이다. 아, 그리고 게임성과 별개로 한국어 더빙이 굉장히 훌륭한 작품이다. 미호요의 뛰어난 현지화에 박수를 보낸다. ‘원신’이여, 모쪼록 젤다의 아류를 넘어서 가라.
아류라는 주홍글씨는 계속 따라다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게임으로 완성되길 기대한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