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디지털 미술과 메타버스, '가상정거장 - 에란겔: 다크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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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란겔: 다크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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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퍼포먼스는 2017년, 성균관대 게임 수업에서 최초 시도 되었던 'PUBG' 게임 속 수업 프로젝트에서 한발 나아간 것이다. 당시의 강사진이었던 오영진, 이경혁 등이 주축으로 참가하였고 작가와의 대화에서도 그 첫 시도에서부터 나온 작업임을 이야기했다.
다크 투어리즘은 비교적 최근에 쓰이기 시작한 용어로서, 일본의 이데 아키라에 의해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 이름에서 풍겨지는 인상 만큼이나 확 느껴지는 개념의 투어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다크 투어리즘은 말그대로 어두운 장소들(어떤 비극, 참사가 실제로 있었거나 또는 그 사건의 대표성을 가지는 곳)을 방문하고 그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데 중심을 두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아우슈비츠나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등을 방문했었고, 그런 것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걸 나중에서야 알고는 했다. 다른 말로는 ‘폐허 관광’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뉴욕의 911 테러 폐허, 그라운드 제로.
폐허는 묘한 매력을 가진 단어이자 개념이다. 사실상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후로부터 생겨난 개념이라 할 수 있고, 문명의 종착지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폐허에 대한 낭만은 문명이 발생한 이후로 쭉 있어왔다. 최근의 사례를 찾아보자면 일제 수탈시기 국내에서 발행되었던, 염상섭이 활동한 것으로 유명한 문학지 ‘폐허’ 가 있으며, 유명한 퍼시 비시 셀리의 소넷 ‘오지만디아스’ 도 폐허에 대한 낭만(그것이 비록 긍정적이지 않더라도)을 품고있다.
이처럼 폐허의 낭만은 꾸준히 있어왔던 것이지만, 그것이 ‘투어리즘’ 으로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용어의 시작을 보듯 최근에 가깝다. 폼페이가 수천년, 아우슈비츠가 근 백년 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이러한 관광 요소는 계속 존재했지만 이것을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것은 최근의 일이 셈이다. 그 근원은 바로 ‘구소련-동구권의 붕괴’ 라는 인류 문명사의 거대 사건이 기폭제였다.
유튜브의 유명한 다크 투어리즘 채널.
어쩌면 이를 폐허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구권의 붕괴는 우리가 가장 최근에 접한 어떤 ‘문명’ 의 붕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은 다시 독립국가연합으로 재탄생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소련의 유산이 버려지고 파괴되었으며 현재 동구권의 문명과 단절되었다. 유튜브에서도 구소련의 유산, 폐허를 찾아다니는 다크 투어리즘 영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동구권의 폐허라는 모티브를 가진 에란겔 섬의 디자인 역시 그런 다크 투어리즘다운 기반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 전투, 살상이라는 주제를 내려놓았을 때 이 ‘에란겔’ 이 다크 투어리즘의 장소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즉, ‘PUBG’ 라는 게임 내에서 전투의 현실감, 디테일을 위해 만들어진 메소드가 전투라는 룰을 내려 놓았을 때는 탐방, 관광을 위해 완전히 적합한 메소드가 된다는 점이 참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저 ‘총을 쏜다, 서로 죽인다’ 라는 암묵의 룰을 어김으로서 플레이 자체를 다크 투어리즘으로 변화하게 만든 것이다.
이 작업 자체가 뭔가 전에 없던 개념, 또는 감상을 주었던 것은 아니다. 폭력의 현장에서 비폭력으로 전환했을 때 생기는 이질감, 새로운 발견 같은 것은 우리가 여러 번 목격했던 감상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게임 속에서, ‘전투’ 라는 룰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장의 다른 용도를 찾아가고 또 그 안에서 플레이어-관객-퍼포머의 연대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게임은 수십년째 현대 미술, 예술의 매체이자 매개로서 실험되고 있고 이 또한 그중 하나이며, 보다 근본적으로 게임 내에서 게임 자체의 룰을 훼손하지 않으며 게임 자체로 의미를 담아내고자 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상세계의 디지털 예술을 어떻게 현실로 끌어낼 것인가
한가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점은, 이 게임 속 ‘에란겔’ 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예술 작업을 어떻게 현실로 끌어내어 현실의 관객에게 보여주고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수단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산발적으로 난립하고 있는 ‘메타버스(Metaverse)’ 에 대한 의문과도 맞닿아 있었다.
‘에란겔: 다크 투어’ 는 철저히 메타버스 내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자, 메타버스 내부에서와 또 외부에서의 시점이 명백하게 달라지는 작업이기도 했다. ‘에란겔’ 이라는 메타버스 내에서 작업을 관람하는 이들은 외부 시점에서는 그들 또한 작업을 구성하고 실행하는 퍼포머가 된다. 즉, 이 작업에서는 관객 또한 서로 다른 경험으로 나뉘어진다. 게임 내에서 참여한 이들은 퍼포머이자 개인의 화면으로 작업을 보고 실행하게 되고, 외부의 관찰자는 편집된 다중화면 중계로 정제된 내용을 보게 된다.
에란겔 내의 퍼포먼스는 현실로 이렇게 송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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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임 내의 작업을 외부의 현실세계로 끌어내는 방식은 마치 e스포츠의 중계와도 닮아있었다. 앞서 이번 ‘가상정거장’ 에서 공연했던, 그리고 지난해에도 선보였던 김지선 작가의 ’슬픔의 집’ 은 이 방법을 ‘보는 게임’, 즉 스트리밍이라는 변주로 풀어낸 바 있었다. 결과적으로,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는 방법에서 게임을 둘러싼 다양한 콘텐츠들(예술작품에서 스포츠 중계까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며, 개척의 과정에서 결국 비슷한 형태를 띌 수 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작가와의 대화에서 오영진 기획자의 답변이 재미있다. 그는 이 작업의 궁극적인 저장 및 전달 형태를 ‘리플레이 파일’ 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즉 단순히 평면 영상이라는 열화된 포맷이 아니라, 말그대로 이 예술 작업의 모든 움직임, 모든 서사, 모든 내용이 고스란히 데이터로 저장된 ‘리플레이 파일’ 이 예술 작업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플레이어의 플레이이며, 그것이 각 파일(작업)이 가진 오리지널리티가 된다. 즉, 같은 형식의 리플레이 파일이더라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와 창작자의 의도, 그리고 해석에 달려있다.
그런고로, 이 ‘에란겔: 다크 투어’ 와 ‘슬픔의 집’ 을 디지털 미술로 분류할 때 현재 디지털 미술이 가진 난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데이터 형태로 저장되어 무한히 복제될 수 있고, 그래서 앞으로 리플레이를 비롯한 디지털 파일이 우리가 흔하게 공유하고 향유하게 되는 예술의 매체가 된다면 기술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환경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건 역시 예술 작업으로서 ‘오리지널리티’ 를 보존할 수 있는 불변성을 디지털 파일에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현재의 화두 중 하나인 ‘메타버스’ 와 ‘NFT’ 가 등장한다.
디지털 미술, 예술은 어떻게 보존되고 전파될 수 있는가
현재 메타버스 담론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는 바로 NFT(대체불가토큰) 다. 철저히 경제적인 영역에서 다루어지던 NFT는 디지털 미술로 넘어오며 기현상을 만들고 있다. 그림 파일이 NFT 가 붙었다는 이유로 수억원에 경매장에서 거래된다. 그러니까, 메타버스 속 물질에 경제적 가치(즉, 현실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NFT라는 수단으로 인위적인 희소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경매에서 수백억원에 낙찰된 NFT 디지털 미술품 '에브리데이즈: 첫 5000일'
무엇을 오리지널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어떤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정의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사진의 발명과 이런 담론을 거치면서 그전까지 ‘희소성’ 과 동일한 개념으로 여겨지던 ‘대체불가성’(즉, 오리지널리티)는 점점 분리된 새로운 개념으로 나아갔다. 이전까지는 예술품이라고 하면 완전 동일한 물건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희소성이 오리지널리티라고 보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미술품의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오리지널리티’ 라는 개념은 물질적인 것에서 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재정의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미술 시대에는 또다른 도전이 가해진다. 바로 ‘데이터’ 기반이기 때문에 위변조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또다른 재창조의 작업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최초 창작자의 의도대로 구현된 ‘오리지널리티’ 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부각된다. 즉, 작품의 일부가 아니라 ‘오리지널리티’ 자체가 훼손될 수도 있다는 것. 여기서 바로 필요한 것이 이 데이터의 위변조를 방지하거나 또는 위변조 기록을 남겨 원본과 추후에 분리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 장치다.
사진의 발명 이후로, 그리고 영상의 발명 이후로 미술과 예술은 크게 변화했다.
디지털 미술의 시대에서는 더 큰 변혁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흐름은 오히려 ‘원본’ 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물리적인 것으로 제약하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작품 내’ 의 오리지널리티로서 ‘복제 가능한, 다수의 원본’ 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변화인 셈이다.
NFT는 결국 인위적으로 금전적 희소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의 적극적인 복제 및 전파를 전제로 하되 원작자의 권리와 원작자가 구현한 ‘원본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창작자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용도로서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고 가치가 보전되며 관객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예술품으로서 가져야 하는 대체불가성은 작품 내에서 이미 오리지널리티로서 구현되어야 하며, NFT로 인위적으로 부여된 희소성이 대체불가성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단지 경매장 같은 기존의 예술품 판매망에 올라타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으로 밖에 볼 수 없으며, 작품의 대체불가능하고 독립적인 가치는 그 안에 내제되어야 한다. 그저 NFT 같은 인위적 희소가치를 부여함으로서 어떤 예술품이 고평가 받는다면 그건 오리지널리티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오히려 NFT는 경매시장이라는 비정상적인 소비시장에서 미술품이 드디어 벗어나서,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면서 팝컬쳐로서 경제성을 가질 수 있는 방향성이다. NFT를 통해 원본의 무결성을 보장받고, 원작자의 권리와 수익을 보장하면서 대중들이 폭넓게 ‘원본’ 으로서의 디지털 미술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이는 전례없는 예술계의 혁명이고, 게임 그 자체, 그리고 게임에서 파생한 디지털 예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다. 그것이 경매장과 예술품을 고가의 사치품으로 밖에 보지 않는 이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대 미술을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기술이다.
스팀 같은 형태로 디지털 미술을 퍼블리싱할 수는 없을까?
사실 게이머들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NFT를 데누보 같은 보안 프로그램으로만 바꾼다면 현재 ESD를 통한 게임의 유통구조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대중과 괴리를 쌓아가고 있는 현대 미술이 다시금 만인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결론 - 디지털 미술의 변혁은 게임을 닮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너무 넓은 범위까지 나아간 것 같다. 그처럼 ‘에란겔: 다크 투어’ 와 ‘가상정거장’ 은 현대 기술과 미술&예술의 접목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이미 게임은 복합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기존의 예술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아직은 게임의 구성 요소 중에서 예술성을 인정받는 부분은 서사의 비중이 가장 크며, 앞으로 게임은 그보다 폭넓게 예술로서 인정 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의 플레이 메커니즘 부분에서의 기교, 가상세계에서만 가능한 주제와 그 접근법 등 여러 측면의 시도가 필요하다. ‘예술’ 혹은 ‘미술’ 이라고 해서 어렵고 고상한 생각만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게임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파고 들면 자연히 의미는 발생한다.
게임에서는 주제의식과 결합한 좋은 플레이 메커니즘 그 자체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명규 기자 sawual@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