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작업 하다 말고 가만히 서 있을 때가 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린 탓 이다. 이럴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무엇을 하고있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컴퓨터 사용중에 " 응답없음 " 메세지를 본 느낌이다. 좀 더 과거로 가 보자면 명령어 입력 후 커서만 깜빡이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상태다.
프로그램이 멈췄나 싶어서 살펴보면 CPU 사용량은 100%다. 뭔가 하고는 있는것 같은데 계속 응답은 없다.
이때 사용자는 선택 할 수 있다.
기다리거나 작업을 종료하는 것 이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작업 종료를 택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는 하던 일을 포기 하고 다른 일을 시작 한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하던 도중에 문득 전에 하다가 중단한 일이 생각나서 다시 그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면 도중에 " 응답없음 " 생태가 되어 일을 중단하고 다른일을 한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 사람을 우리는
" 일머리가 없다. " 라고 표현한다.
초등학생인 아이는 집중을 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집중 시간이 10분을 넘기기 힘들다. 아이 엄마는 여느 학부모와 같이 아이가 평균은 되어 학급 분위기에 따라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직접 공부를 돕는다.
하지만 아이는 10분이 지나면 더이상 문제를 읽지 못한다.
문제를 읽지만 풀수는 없다.
" 응답없음 " 상태 인 것이다.
나는 아이를 이해하기 때문에 흥분한 아이 엄마를 진정시키고 아이에게 게임이나 유튜브를 하거나 보면서 집중력을 환기 시키고 오라고 보낸다.
누군가는 집중력 부족으로 10분 이상 집중 할 수 없다면 10분 집중하고 쉬었다가 다시 10분 집중 하면 될 거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얼마동안 환기를 해야 집중력이 돌아올지는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못했다.
책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한줄 읽으면 한 줄을 잊어버린다. " 응답없음 " 상태에서는 어떠한 입력도 의미가 없다. 책을 몇줄 읽던 그것은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좋아해서 이따금 책을 구입해서 읽기도 하는데, 학생시절 소설책을 1시간 반 만에 다 읽는 다는 친구들이나 평균적으로 3시간이면 다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 일이 있었다.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책이란 것은 읽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고 읽은 뒤에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읽은 뒤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5번 까지 읽은적이 있는데, 마지막 5번까지 읽었을 때도 내가 읽은 적 없는 대사가 나왔다. 읽은적이 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다.
소설책은 그나마 좋아하고 재미가 있으니 다 읽기라도 했지. 교과서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헌줄 읽으면 한줄 내용이 지워진다.
사람들은 이런 증상을 " 난독증 " 이라고 부른다.
나는 사교성이 없다.
말주변이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글도 잘 쓰지 못한다.
시간에 여유가 있는 글쓰기 라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말싸움이 일어나면 이길 수 없다.
아니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물어봐도 대답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 하려고 하면 떠오르지 않는다.
" 응답없음 " 상태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정지한 상태는 아니기에 내가 들은 내용 중에서 떠오르는 답변 몇가지만 애써 대답한다.
그렇다 보니 대답은 완전하지 못하고 때때로엉뚱한 대답을 한다.
이것이 나의 사교술의 전부다.
아내가 아이에게 공부를 돕다가 점점 인상이 나빠진다. 아이에게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아이는 대답을 할 뿐 나아가지 못한다.
나는 옆에서 보고있는다. 성적은 중요하지 않다던가 성적을 포기하자는 내 나름대로는 현실적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대안을 할 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아서 도움을 줄 수 없다.
나 역시 "응답없음 "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띄엄띄엄 이어지는 생각으로 몇날 며칠 고민하다가 아내에게 때 늦은 조언을 하면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 하다.
결국 아내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조언을 듣고온다.
듣고 온 조언은 내가 해준 이야기와 동일하다.
늘 그렇게 나는 무시당했다. 하지만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아내에게 말하지 못한다.
올해 초 아내가 내게 이제는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내는 나와 아이에게 어떠한 말을 해도 변함이 없는 것이 마치 벽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것 같으며 가정 속에서 고립되어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내가 아이 교육과 치료 방송중에서 ADHD에 관한 방송을 보고 나에게 확인해 보라며 들뜬 모습으로 내게 이야기 해서 찾아보니 나의 이야기 였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며 아이 역시 나와 같으니 아이가 어릴 때 부터 심리발달쪽에서 전문가를 몇번 만나봤으나 모두 정상이라고 했었는데, 영상 속에서 보이는 문제는 모두 나의 문제이자 동시에 아이의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ADHD는 유전이라고 했다.
우리는 대형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기로 했고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가서 무려 6시간이나 걸려서 테스트를 진행했다.
후에 검사 결과를 들으러 함께 갔는데, adhd는 확실 하고 집중력은 100명중에서 97등 정도로 매우 나빠서 adhd가 맞다는 것 이외에 다른 ( 성격 지능지수 등 ) 검사 항목의 결과는 신뢰도가 낮아서 믿을 수 없는 수준이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의 진단이 나오자 나의 진단은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어른의 경우는 테스트 방법이 없고, 애초에 정의 자체가 유소년기의 ADHD가 낫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라 했다.
의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내가 물었다.
" 그런데 왜 의사는 약 복용을 권하지 않지? "
내 물음에 아내는 놀라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 여보 말 했어요. 당신 기억을 못하는군요. "
그렇다. ADHD인 나는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일부의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기억입력 자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이는 약을 복용 하기 시작하면서 눈에띄게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와 눈을 마주칠 수 있고, 물어보면 대답이 가능하며,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면 내용을 기억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 이제 소통이 된다.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난다. "
라고 한다.
나도 함께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는 3일째에 나타났고 그 소감을 아내에게 전했다.
" 여보! 이게 정상인의 삶이야?? 난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거지? "
이렇게 말을 하며 오랜만에 게임기를 켰다.
어렸을때부터 나는 그란투리스모 라는 레이싱 게임을 좋아했는데, 늘 20분 정도 되는 내구 레이스는 달리는 도중에 실수해서 코스아웃 하는 바람에 클리어 할 수가 없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레이스를 남겨놓고 게임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확인 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집중력 부족으로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을 약을 먹고 집중력이 남아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너무나 궁금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한번에 성공했다. 그동안 내가 좋아하면서도 클리어 하지 못한다는 심리적 좌절감을 맛보게 한 게임을 해본지 몇년이 지났건만 별다른 실수 없이 클리어 한 것이다.
약을 먹으면서 느낀 소감은 치트인생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어렵지 않게 방을 치울 수도 있고,
앉아서 영화를 볼 수도 있고
20분짜리 게임을 할 수 있고
앉아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읽었던 책 내용을 기억 할 수도 있고 떠올릴 수도 있다.
글을 쓸 수 있게 되어서 블로그도 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 얼굴을 보고 이름을 말할 수 있고
굽고있던 고기를 태우지 않게 되었다.
작업하는 도중에 그만두고 게임이나 음악을 들으며 환기 하지 않아도 되고
보다 안전하게 운전 할 수 있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고 ( 전에는 못샀음 )
누군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내와 사람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불안장애로 아내에게 짜증을 내지 않게 되었다.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아이는 붙임성이 좋아져서 이제 사람이 사는 화목한 분위기가 되었다.
아쉬운점은 불치병이라서, 약효가 지속되는 8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 응답없음 "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 8시간 동안 사람이 된다.
그래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