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전사가 도시를 훌쩍 떠난지 일주일 째, 도시의 백성들은 영 불안한 눈빛을 띄고있다. 그래도 불패의 전사라는 이름 값이 있지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으나, 하루에 한번 이상은 순찰돌거나, 골목의 아이들과 노니거나, 식당엔 언젠가 가게를 털어버릴 정도로 먹어치우겠다는 둥 도시의 모든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비추곤 했는데 그가 돌연 사라지자 백성들은 불패의 전사의 부재에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거센 돌풍처럼 두려움으로 번진다. 불패의 전사가 일주일 만에 도시에 돌아온 것이다. 외팔이에, 오른다리는 붉은 빛의 끔찍한 무언가가 되어서, 상처 입은 채로. 거리의 백성들은 큰 부상을 입은 전사의 모습에 당황해 아무 말도 못한다.
"랜달."
"불패의 전사님...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요?"
"잠시 지옥에 정벌을 다녀왔다. 나도 늙어서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네."
의원에서 접수를 보고 있던 랜달이 그에게 달려가 용기를 내어 질문하자 불패의 전사는 망설임 없이 답한다.
"당장 의원으로 오세요."
"더 급한 일이 있어. 의원은 그 다음이다."
전사의 거절에 랜달은 더 정중하게, 더 강력하게 의원에 올 것을 요청한다.
"전사님. 전사님은 지금 환자십니다. 도시의 의원은 결코 환자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의원에서 치료를 받는 걸 거절하시겠다면, 당신의 백성들을 둘러보십시오. 전사님의 그 모습에 기쁨을 느낄 자들은 이 곳에 없습니다."
전사는 랜달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왼팔을 들어올리자, 랜달은 지난 번에 꿀밤을 맞았던 기억이 확 떠올라 움찔 웅크린다. 그러나 랜달의 정수리에 꽂힌 것은 딱콩하는 꿀밤이 아니라 인정의 손길이었다.
"자네 같은 자가 있어 더욱 더 안심이군. 나와 이 도시는 축복 받았어."
"접수 부탁하네, 랜달."
랜달의 말에 따라 의원에 들어간 불패의 전사는 의사에게 향하기 전에 랜달에게 귀뜸한다.
"혹시 브렌다가 오면 바로 내게 알려주게. 환자실에 들이닥치든, 소리를 지르든, 아무튼 브렌다보다 빨리."
"알겠습니다."
불패의 전사가 진찰 받으러 복도 너머로 발걸음을 옮기자 의원의 의사들에게 둘러쌓인 동안, 랜달은 오늘 불패의 전사의 방문을 기록하며 왜 갑자기 그가 지옥 정벌을 다녀온 건지, 그게 브렌다와 무슨 관계인지 고민하던 차에
"아저씨 어딨어."
랜달이 고개를 올려다보자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크고 불패의 전사를 압도하는 덩치의 아가씨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눈동자는 선명하나 생기가 돌지 않았고, 붉은 머릿결은 기괴할 정도로 흐트러져 랜달을 음산하게 내려다보는 여인의 정체는
"브렌다?... 브렌다?"
"브렌다!!!!"
랜달은 그 기괴한 모습이 정말 브렌다가 맞는지 당황한 채 그녀의 이름을 두어번 읊다가, 불패의 전사가 귀뜸해줬던 얘기가 머리에 스치자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잘했다, 랜달!!"
"잠깐, 전사님, 환자분!"
전사의 귀에 랜달의 경고가 닿는 순간 그를 칭찬함과 동시에 발길질로 유리창을 깨뜨렸고, 이에 의사 선생들이 기겁한다.
"브렌다, 따라와라. 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설산으로 와라. 랜달, 창문 값은 외상으로 달아둬!"
"아저씨, 왔으면 좀 얘기를 해달라고."
그 말과 함께 브렌다는 안돌아보고 의원을 뛰쳐나갔지만 그 찰나의 순간 랜달은 브렌다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음을 확인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랜달,"
랜달이 벙쪄있는 동안 복도에서 랜달의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 넌 의회에 가서 이 일을 알려라."
가파른 설산 정상 언저리에서, 불패의 전사는 만년설에 두 무릎을 꿇다 못해 남은 왼팔 마저 눈에 처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쉰다.
"불패 아저씨, 벌써 지친 거야?!"
그를 뒤따라 온 브렌다가 전사를 다그친다. 브렌다 역시 숨을 몰아쉬지만 코와 입가에서 뿜어나오는 김이 그녀에게 혈기가 철철 넘치는 것을 증명한다.
"불패라는 이름은 좀 빼줘, 땅딸보."
전사는 다그치는 브렌다에게 대꾸한 뒤, 천천히 일어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왼손에 움켜진 눈을 흩뿌린다.
"내가 정말로 모든 투쟁에서 이겨온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잖나."
"그렇다면 질 때가 왔다는 거지? 그렇지?"
그녀는 서리 낀 바람에 붉은 머릿결을 흩날리며, 즐거운 듯 잇몸을 싹 드러낸다.
"그래. 지금의 나는 너보다 약해. 지난 번의 기습을 막아냈을 때보다 더."
"이 날만을 기다려왔어."
브렌다는 한 걸음, 전사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아저씨한테 도전하겠어."
한 걸음 더,
"아저씨를 죽임으로써,"
전사의 코앞에 다가왔을 무렵 브렌다는 주먹을 쥐어 자기 가슴을 호기롭게 두들긴다.
"내 모든 것을 바칠게."
"그러고 천년이든 만년이든, 계속 아저씨의 백성들과 함께 해줘."
전사는 고개를 높이 올려 브렌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그에 대한 대답이다, 브렌다."
그는 한숨을 쉬듯이 고개를 떨군다.
"300년 전에 내가 백성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기억하나?"
전사는 다시 고개를 치켜든다.
"너 역시 예외는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아는가? 마법을 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죽이는 일은 없어."
브렌다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지며 분노를 토해낸다. 그녀는 전사의 하나 남은 왼팔을 양팔로 잡고 콩 타작하듯이 쉴 새 없이 휘두르다 큰 힘으로 만년설에 내리찍자,
"다시 지옥에 가자. 천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절대로 지지 않는 마법을 걸ㅁ"
전사가 그 사이 브렌다의 손아귀를 풀고 팔을 타고 올라 의족 하나로, 그리고 오른다리를 브렌다의 목을 거세게 조른다.
"그럴 줄 알고 이미 악마들에게 충고해뒀지, 그 망할 지옥문은 여기 설산 정상에 있었다."
전사는 상체 전체가 피로 떡칠 되는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브렌다의 목을 조르며 이전보다 훨씬 선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설명한다.
"지금 없는 걸 보니 이미 닫았군. 그럴 계획은 꿈도 꾸지마."
시뻘건 피가 타고 내려와 브렌다의 뺨을 적시자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허벅지를 낮춘 뒤, 그 반동으로 그대로 설산을 향해 뒷통수를 들이박는다. 전사는 지면에 닿기 전에 목을 조르던 발을 풀었지만 산 정상을 뒤흔드는 충격에 열댓번 굴러떨어진다. 브렌다는 고통을 호소할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눈알을 부라리며 전사를 향해 도약한다.
"왜애애애애애애애!!"
브렌다가 전사의 몸뚱아리 위에 마운팅하며 착지하자, 전사는 피 안개를 토하며 만년설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하지만 브렌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위를 점한 상태로 전사의 머리에 주먹을 내지른다.
"앞으로 아저씨가 지킬 수 많은 생명들을 생각해보라고, 그까짓 맹세 때문에 미래에 있을 모든 백성들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그녀의 주먹이 설산에 내리꽂히자 정상에 눈보라 몰아치기 시작한다. 불패의 전사가 왼팔로 머리를 가드하면서 허리를 겨우 기울여 얇은 각도로 브렌다의 주먹을 피한 것이다.
"예외는 없다고 이미 말했"
그의 말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브렌다는 더 빠르게, 그리고 셀 수도 없이 전사의 면상에 주먹을 내리찍는다.
"헛소리, 기근이 들면? 역병이 돌면?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쩔 거냐고?!"
"당신보다 더 강한 적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누가 지킬 욱?!"
"브렌다, 네가 있잖아."
브렌다가 쉴 새 없이 주먹을 내리치는 데 집중하는 동안, 전사는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브렌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는다. 설산의 날카로운 봉우리보다 높게 날았다가, 고통을 이겨내고 두다리로 만년설에 착지한다.
"그게 뭐가 어쨌단 거야."
브렌다가 입가의 피를 뱉으며 묻는다.
"잘 생각해봐, 내가 모든 것을 직접 통치했을 적에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어."
전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는데, 사방에 있는 만년설이 피로 잔뜩 번져 마치 해골 모양 처럼 보인다.
"흉년이 들면 그래도 비축해둔 식량이 있다. 그보다 훨씬 길어진다해도 나는 내 백성들이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전사는 주먹을 쥐며 경건하게 자기 가슴을 두드린다.
"정치는 의회가 알아서 잘 할거다. 그래도 그들이 영 시원찮다면 백성들이 창과 칼을 들어 반항할 거다."
그는 고개 언저리에서 주먹을 뒤흔든다.
"역병이 돌아 거리에 환자가 넘치게 되거든, 이 도시에 의원이 있는 걸 잊지 마라."
전사는 브렌다에게 기억해내라는 시늉을 하듯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린다.
"그리고 브렌다, 바로 네가 있다. 네가 이 도시를 지킬 것이다."
이윽고, 전사는 브렌다를 가르킨다.
"더 이상 불패의 전사라는 건 필요 없다는거다. 브렌다 너는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거나, 뭔가 다른 이유로 계속 내게 도전한거다."
"내가 죽는 걸 원치 않는 거지? 브렌다. 이제 그만 상실을 받아들여라."
"아니,"
브렌다는 호흡을 고르다가, 고막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외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단 1초라도 살아있는게 뭐가 나쁜데, 그게 백년이 되고 천년이 되는 게 뭐가 나쁜데?!"
전사는 브렌다의 호소에 고개를 끄덕인다.
"틀린 건 아무것도 없다. 상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전사는 힘을 다했다는 듯 시뻘건 만년설에 무릎을 꿇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로 인해 네가 죽거나 영혼 조차 사라진다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어."
전사와 브렌다 사이에 서리낀 바람이 휘감는다. 적막은 아주 잠시,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진다.
"맹세를 지키기 위해 너에게 상실을 안겨준다는 건 나의 이기심이겠지.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겪어왔듯, 상실이란 건 원치 않는다고 안오는 게 아니다. 간다, 브렌다."
전사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브렌다를 향해 직선으로 도약한다. 브렌다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는 주먹을 치켜올리고 더욱 더 빠르게 회전한다. 브렌다는 두려움과 각오가 새겨진 눈빛으로 크게 주먹을 내지른다.
"잘 가, 아저씨"
두 주먹이 맞닿았을 때 전사의 왼팔은 살갗이 차례대로 분리되어 뼈 뿐이 남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 뼈조차 완전히 바스라져 사라진다. 거대한 충격파가 설산을 휘감자, 천년 동안 꿈쩍도 않던 만년설이 무너져내린다.
"아저씨."
브렌다는 눈사태에 깔린 전사를 맨손으로 파내기 시작한다.
"브렌... 다..."
"아직 살짝 미련이 남아서."
양팔도 날아간데다, 악마에게서 받은 흉측한 의족조차 어디 떠내려가버렸는지 오른다리 하나뿐인 채 흉한 모습의 전사.
"나 정도면 아저씨의 임종을 지켜줄 자격이 있겠지."
"땅딸보... 이 기특한... 것..."
"두... 손이... 남았... 다면 널... 쓰다듬어... 줬을 텐데..."
전사의 생명은 다 녹은 촛농 위의 촛불 처럼 불길이 사그라지며, 호흡 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옅어지고 있다. 브렌다는 무릎을 베게 삼아 전사의 머리를 편히 눕힌다. 브렌다는 전사의 최후까지 함께할 것이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건... 가?..."
그러나 그녀의 대견함 속에서, 전사는 브렌다가 아직 뭔가 할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통로에서 호롱불 같은 혼들이 쏟아져 나온다. 영혼들은 각양각색으로, 빛을 내지만 미약해서 어둡게 보이는 영혼, 반딧불이의 초록빛처럼 은은하게 빛을 뿜으며 잠자리처럼 다양한 공중 기동을 펼치는 영혼, 그저 보통 빛에 아무런 동선 변경 없이 직선으로 가는 영혼.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태양처럼 밝고 사람 머리만한 커다란 영혼. 어찌나 밝은지 주변에서 영혼을 잡아채는 작업을 하던 악마들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다. 그 영혼은 점차 위로 붕 뜨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합금으로 이루어진 관을 타고 동서남북을 오간다.
"정복자.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군."
그 뜨거운 영혼이 빠르게 위로 상승하더니 뿅하고 관에서 튀어나와 도착한 곳은 악마들의 왕의 손.
"정말, 진짜로. 쳐다보기도 괴로워."
코트를 걸친 악마들의 왕은 남은 한 손으로 빛을 막다가 코트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그의 콧대에 걸쳐둔다.
"온 세상을 비출정도로 밝지만, 이렇게 보면..."
선글라스를 통해 왕이 영혼을 똑바로 바라보자, 음산한 분위기의 초록색 아우라가 영혼 주위로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이기심, 소유욕, 정복욕."
"결국 이게 본질이란 말일세. 왕자, 그 물건을"
"예, 전하."
푸른 피부의 왕자가 악마들의 왕의 지시에 커다란 랜턴을 건네자, 왕은 랜턴을 열고 영혼을 어떻게든 우겨넣는다.
"이제 제법 괜찮군."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영혼은 촛불만큼 쪼그라든채, 음산한 녹색빛을 은은히 뿜어낸다.
"귀빈을 모셔라."
정복자가 떠난 직후, 악마들은 정복자가 알려준 정보와 혈액을 토대로 지옥문을 닫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옥문은 일개 인간의 사념이 담긴 주술로 모든 시간대에 고정되어, '닫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푸른 왕자가 지옥문을 연 당사자의 영혼이 아직 지옥문에 묶여있음을 알고 제한적인 소생술로 지옥문을 구성하던 시체를 부활시키기 전까지는.
"아... 악마들의... 족장님...?"
"부르고 싶은데로 불러도 상관없네."
지옥문을 연 당사자, '귀빈'은 뼈가 다드러난 앙상한 몸으로 주술용 지팡이에 의지한 채 왕좌에 도달했다.
"받게, 선물일세."
"ㅅ... ㅅ..서서선 물!"
악마들의 왕은 랜턴을 귀빈에게 직접 건낸다. 귀빈은 아들의 영혼이 담긴 줄도 모르고 그것을 넙죽 받는다.
"그게 있으면 지옥 어디서든 덥지도, 춥지도 않을 것이고, 그대가 위험에 처해도 보호해줄 걸세."
"감사합니다.. 족장님! 근데..."
"제 구멍이란 구멍에 날붙이가 달린 줄을 쑤셔 넣진 않나요?"
왕은 그 질문이 두려움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보다 더 불쾌한, 환희로부터 우러나온 의문.
"우리가 영혼을 고문하는데 그런 도구를 쓰곤 하지. 하지만 솔직히 아무 의미도 없기는 해.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지. 자네에게 그럴 일은 없을 걸세."
"그... 그런"
"얘기가 다 끝난게 아닙니다."
귀빈이 아쉬워하려던 참에 왕자가 끼어든다.
"당신 할 일이 생겼어요. 당신이 지옥문을 여는 바람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그렇다면 역시 고문을"
"아니. 귀빈께서 할일이 있습니다. 당장 그 랜턴을 들고, 온 지옥을, 영원히 돌아다니면서 지옥문이 열리는 조짐을 감지하거나 열리기 전에 닫으세요. 그게 당신의 일입니다."
귀빈은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쭈그려 앉아 움츠려들다,
"끼얏호!"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정을 떠난다.
"아비나 아들이나. 전부 괴물뿐이군요."
악마 왕자가 이마를 훑으며 답이 없다는 듯이 내뱉는다.
"후우... 그래도 이걸로 된거다. 더 이상 지상이 지옥에 관여할 일은 없을거다."
악마들의 왕은 천년 묵은 체증이 사라진 것 마냥 가쁜 숨을 내쉰다.
귀빈은, 전사의 아버지는 궁정을 지나 지옥 주민들의 거처를 지나 붉은 빛이 내리쬐는 황무지를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질주한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서더니
"아,"
"그래도 항상 같이 지옥을 봐주던 우리 아들이 없으니 좀 외롭군."
귀빈은 외롭다는 듯이 녹색 빛을 뿜는 랜턴을 휘젓다 끝없이 펼쳐지는 황무지를 홀로 거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