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준동한 이슬람은 중동의 양대 거인 동로마 제국과 사산 페르시아가 수십년 간의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한 틈을 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야르무크에서 주력 야전군을 잃은 동로마 제국은 순식간에 이집트와 시리아, 킬리키아를 잃어버렸다. 제국은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는 이슬람 세력을 최대한 막으려 했지만 콘스탄스 2세가 조직한 해군이 로도스에서 이슬람 해군(정확히는 이슬람 점령 하의 이집트 해군)에 의해 소멸되는 타격을 입으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러한 제국의 위기를 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 내부의 갈등이었다. 3대 칼리파 우스만(644~656 재위)이 암살당한 후, 후임 칼리파의 자리를 놓고 이슬람은 5년에 걸친 내전을 겪게 되었고 이 기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은 내부를 추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슬람이 무아위야 우마이야(661~680 재위)의 휘하로 재통합되며 이슬람의 제국 공격은 다시금 거시화되었다. 672년부터 이슬람(이하 우마이야 왕조)은 대군을 동원해 제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로도스, 키오스를 비롯한 에게해의 도서지역과 키지코스, 스미르나와 같은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가가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점령당했다. 무아위야 우마이야가 콘스탄티노플을 노리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674년부터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은 당대 기술력으로는 넘어서기 힘든 요새였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제국령을 공격해 초토화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은 굳건히 버티어냈다. 수년 간의 지지부진한 공성전은 결국 우마이야 왕조가 제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물러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야욕은 멈추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 번 이슬람군과 결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 당시 제국의 상황은 심히 좋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 - 레온티오스 - 티베리오스 3세, 그리고 다시 유스티니아노스 2세 - 필리피코스 - 아나스타시오스 2세 - 테오도시오스 3세, 마지막으로 레온 3세가 황위에 오르는 동안 제국은 내전으로 인한 국력 소모를 겪어야 했고 이와 더불어 우마이야 왕조의 공격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지역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국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이슬람의 침공을 대비하여 다시금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보수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한편, 해군력을 강화했다는 점과 현 제국의 황제였던 레온 3세의 즉위로 당분간 내부 권력이 안정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온 또한 이슬람의 침공을 예측하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았다.
717년 6월,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금 군을 동원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가가 다시금 우마이야 왕조에게 점령당했고 이번에는 콘스탄티노플 근처 트라키아까지 우마이야의 군대가 진을 치기 시작했다.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육로와 해로를 모두 차단하고 포위하여 도시를 고립시켰고 레온의 평화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견고했고 동로마 제국의 해군 또한 강했다. 지난 포위전에서 처음 등장해 우마이야의 해군을 불태웠던 그리스의 불은 이번 전쟁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과시했으며 때아닌 강추위 또한 우마이야군에게 시련을 안겨주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금 막대한 육로와 해로로 지원군을 보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지만 해군 측 지원군에 속해있던 그리스도교 노예들이 우마이야군을 배신하며 지원군을 혼란에 빠뜨렸고 이 기회를 틈탄 동로마 해군의 공격으로 우마이야의 해군 측 지원군은 격파되었다. 육로쪽 지원군 또한 마찬가지 상황을 맞았고 이들 또한 니코메디아 인근에서 패배하고 후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불가르족이 제국을 도와 우마이야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며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묶여있던 우마이야의 본대 또한 막대한 손해를 입고 퇴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약 2년에 걸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제국의 완벽한 승리로 끝맺음하게 되었고 이슬람 세력의 진출 또한 이 전투를 기점으로 동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게 제국을 위협하던 외환이 사라지며 제국에 평화가 찾아오는듯 했지만 이번에는 제국 내부에서 또다른 분쟁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문제가 아닌 종교 분야에서 자라나는 분쟁의 씨앗이었다.
???" 예수님 피규어를 만들다니 우상숭배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서 성상파괴주의가 생겨났다는 주장이 아무래도 예전의 주류 학설이었지만 1970년대부터 등장한 연구자은 성상파괴주의자들을 '이콘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전부 묘사하기는 커녕 이를 분리해서 묘사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 중 예수의 육체를 묘사한 이콘은 네스토리우스파와 다를 바 없으며 신성을 묘사한 이콘은 단성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여 배격'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최근의 연구자들은 성상파괴주의를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을 배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극단적인 운동으로 보는 것 같군요 ㅇㅅㅇ;;;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해 흔히 잘못 갖는 오해가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위격만이 존재'하지 않으며(여기서부터 네스토리우스가 양성론, 단성론, 합성론과 구분) 하나의 위격에 하나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함미다. 아래에서 4가지 주장에 대해 다시금 설명하자면 네스토리우스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개의 위격(신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과 두 개의 본질(신성과 인성)이 존재하며 이 둘이 느슨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음, 이 중 신으로서의 예수는 말씀으로서 존재하나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육신에 존재. 따라서 마리아는 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예수만 낳은 여인이기에 신을 낳은 여인(테오토코스)가 아니며 인간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크리스토코스)로 불러야 함 단성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만 있으며 본질 또한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서 하나가 되었으나 예수의 신성은 바다와 같이 넓고 방대한데 반해 인성은 신성에 비해 작았기에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에우티케스는 이를 바다에 꿀 한 방울이 떨어지면 바다와 섞여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 합성론: 단성론과 비슷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단성론자들의 주장처럼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진 것이 아닌 둘이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 양성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이며 그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질이 존재하고 이 둘은 어느 한 편이 우위나 열세에 있는 것이 아닌 동등한 상태로 있음 이렇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인성만을 강조한다는 오해를 갖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가 아닌 크리스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네다 ㅇㅅㅇ
성상파괴주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소아시아 지역에 주둔하던 군인들이었죠. 이는 인접한 지역에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토대로 추측하건대, 이슬람 교리에서 극단적인 수준으로 우상을 배격하는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타당한 추론인가요? 그리고 그런 군인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했던 황제들(레온 3세 포함)은 성상파괴주의 쪽 손을 들어준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이사브리아 황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아테네의 이리니는 성상을 옹호하는 쪽이라 군인들의 반발이 굉장히 심했을 듯싶어요.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서 성상파괴주의가 생겨났다는 주장이 아무래도 예전의 주류 학설이었지만 1970년대부터 등장한 연구자은 성상파괴주의자들을 '이콘이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전부 묘사하기는 커녕 이를 분리해서 묘사하는 것으로 믿었으며 이 중 예수의 육체를 묘사한 이콘은 네스토리우스파와 다를 바 없으며 신성을 묘사한 이콘은 단성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여 배격'한 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최근의 연구자들은 성상파괴주의를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을 배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극단적인 운동으로 보는 것 같군요 ㅇㅅㅇ;;;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쪽이었고, 단성론은 신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단이죠. 그런 이단을 동시에 배격하다가 성상 자체를 배척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갔다는 거군요. 문제는 성상파괴주의에 찬동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역적인 요인 등으로 인해 구분이 명확했다는 거고요. 그런 세속적인 알력 다툼도 성상파괴주의에 대한 갈등을 부채질한 것 같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해 흔히 잘못 갖는 오해가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한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위격만이 존재'하지 않으며(여기서부터 네스토리우스가 양성론, 단성론, 합성론과 구분) 하나의 위격에 하나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주장함미다. 아래에서 4가지 주장에 대해 다시금 설명하자면 네스토리우스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개의 위격(신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과 두 개의 본질(신성과 인성)이 존재하며 이 둘이 느슨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음, 이 중 신으로서의 예수는 말씀으로서 존재하나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육신에 존재. 따라서 마리아는 신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예수만 낳은 여인이기에 신을 낳은 여인(테오토코스)가 아니며 인간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크리스토코스)로 불러야 함 단성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만 있으며 본질 또한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서 하나가 되었으나 예수의 신성은 바다와 같이 넓고 방대한데 반해 인성은 신성에 비해 작았기에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에우티케스는 이를 바다에 꿀 한 방울이 떨어지면 바다와 섞여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 합성론: 단성론과 비슷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단성론자들의 주장처럼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사라진 것이 아닌 둘이 결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 양성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이며 그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질이 존재하고 이 둘은 어느 한 편이 우위나 열세에 있는 것이 아닌 동등한 상태로 있음 이렇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예수의 위격은 두 가지로 분리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양성론이나 합성론, 단성론과는 확연히 이질적이군요. 다른 종파는 예수의 위격은 하나만 존재한다고 보았으니까요.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스토리우스파가 인성만을 강조한다는 오해를 갖게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가 아닌 크리스토코스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기 때문입네다 ㅇㅅㅇ
다른 종파는 성모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는데 말이죠 ㅇㅇ
???" 예수님 피규어를 만들다니 우상숭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