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lric, realising that no military help would be forthcoming from the West, had made a state visit to Constantinople in 1171 and had recognised to Byzantine emperor, Manuel I comnenus, as his overlord in return for his protection.
아모리는 [* 예루살렘 왕, 왕비가 마누일 1세의 조카손녀 마리아 콤니니였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인식했고, 그는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했는데,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에게 그를 보호해줄 대가로서 그를 그의 대군주로 인정하였다.
보두앵[* ‘나병왕’ 보두앵 4세, 그의 6촌누나가 마누일의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과 그의 보좌관들은 그의 친정 통치 시작부터 살라딘의 힘의 중심지인 이집트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해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그는 1171년에 (부친) 아모리 왕이 마련한 보호 제도를 되살리기 위해 동로마로 다시 한 번 눈을 돌렸다.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사절들은 샤티용의 르노가 [* 마누일의 황후 마리아의 의붓아버지] 이끌었다. ... 티레의 기욤은 르노 대사의 임무 결과를 ‘황제(마누일 1세)와 현재의 왕인 보두앵 사이에 거의 같은 조건으로’이 ‘황제와 아모리 왕 사이에 이미 체결되었던 협정’을 갱신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 합의는 두 분야를 포괄했다. 그 중의 첫 번째가 동로마 해군과 십자군의 이집트에 대한 공동 공격이었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Baldwin IV and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24310
마누일 1세가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꽤 성과를 거두었죠. 알렉시오스 1세의 폐쇄적인 외교 정책(4차 십자군을 생각해보면 알렉시오스 1세의 결정은 어찌 보면 타당한 면도 있긴 합니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렇긴 한데 로마 황제들은 십자군 세력을 통제하기 영 껄끄러워했던 점은 변함 없죠. 더군다나 르노 드 사티용 같은 작자도 십자군이라고 뻗대는 판이었으니... 로마 황제들은 십자군을 모집하며 서방인들을 선동한 우르바노 2세가 굉장히 짜증났을 겁니다.
동로마 입장에서는 정말 양면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알렉시아스를 언뜻 읽었는데, 그런 내용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십자군과 상호 혼맥을 맺기도 하는데 자신의 둘째 황후가 그랬고, 그 사이에서 아들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났죠. 그 며느리는 말씀하신 서방 정책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 공주 아녜스였고요.
네, 그렇죠 ㅇㅇ 그렇게 마누일 1세가 늦게 본 적장자인 알렉시오스 2세를 위해 어느 정도 안배를 해두긴 했는데, 문제는 안드로니코스 1세... 이래저래 안드로니코스 1세가 원수네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서방인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다 보니 제위 찬탈이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진짜 안드로니코스 1세가… 여러모로 문제가 컸더라고요.
서유럽 측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을 십분 활용해서 제위를 찬탈하고 서유럽인들을 대량학살한 인물이기도 해서 서방 측의 로마에 대한 반감을 더 키워버린 장본인이기도 하죠
자기 제위 해먹겠다고… 그 때문에 동로마가 잃은 게 상당하더라고요. 그의 찬탈로 인해 남편 알렉시오스를 잃고 과부가 되어버린 아녜스 공주에 대한 강제결혼 사건은 당대에도 경악을 불러온 행동이라고 들었고, 이게 서유럽을 모욕했다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마누일 1세가 친서방 정책을 펴면서 꽤 성과를 거두었죠. 알렉시오스 1세의 폐쇄적인 외교 정책(4차 십자군을 생각해보면 알렉시오스 1세의 결정은 어찌 보면 타당한 면도 있긴 합니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렇긴 한데 로마 황제들은 십자군 세력을 통제하기 영 껄끄러워했던 점은 변함 없죠. 더군다나 르노 드 사티용 같은 작자도 십자군이라고 뻗대는 판이었으니... 로마 황제들은 십자군을 모집하며 서방인들을 선동한 우르바노 2세가 굉장히 짜증났을 겁니다.
동로마 입장에서는 정말 양면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알렉시아스를 언뜻 읽었는데, 그런 내용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십자군과 상호 혼맥을 맺기도 하는데 자신의 둘째 황후가 그랬고, 그 사이에서 아들 알렉시오스 2세가 태어났죠. 그 며느리는 말씀하신 서방 정책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 공주 아녜스였고요.
작은 자줏빛역사
네, 그렇죠 ㅇㅇ 그렇게 마누일 1세가 늦게 본 적장자인 알렉시오스 2세를 위해 어느 정도 안배를 해두긴 했는데, 문제는 안드로니코스 1세... 이래저래 안드로니코스 1세가 원수네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서방인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인물이다 보니 제위 찬탈이 더 쉬웠던 것 같습니다
진짜 안드로니코스 1세가… 여러모로 문제가 컸더라고요.
작은 자줏빛역사
서유럽 측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을 십분 활용해서 제위를 찬탈하고 서유럽인들을 대량학살한 인물이기도 해서 서방 측의 로마에 대한 반감을 더 키워버린 장본인이기도 하죠
자기 제위 해먹겠다고… 그 때문에 동로마가 잃은 게 상당하더라고요. 그의 찬탈로 인해 남편 알렉시오스를 잃고 과부가 되어버린 아녜스 공주에 대한 강제결혼 사건은 당대에도 경악을 불러온 행동이라고 들었고, 이게 서유럽을 모욕했다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자체를 초토화시키고 역대 황제들 무덤까지 파괴하는 식으로 나간 데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의 만행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진짜 안드로니코스 1세가 정말 원수 중에 원수네요. 스노우볼이 단단히 굴러갔네요. 애꿎은 선대 황제들은 무슨 잘못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