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동로마를 멸망시킨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십만대군을 이끌고 유럽의 헝가리를 침공, 핵심도시인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다.
당시 헝가리의 왕은 겁에 질려 오스트리아로 도망쳐버렸고,
교황은 모든 성당은 베오그라드에서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는 헝가리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종말이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당시 다른 세력들의 시기로 권력을 잃었던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는 베오그라드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려고 했지만
다른 귀족들은 오스만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부분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당시 교황청에서 성전과 십자군을 선포하며 추기경 카피스트라노를 보냈고,
비록 정예병은 아니지만 농민군 약 4만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야노슈 후냐디는 오스만의 수군(베오그라드는 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을 격파하고 베오그라드로 입성할 수 있었지만
열세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오스만이 이끌고 온 300문의 대포는 베오그라드의 성벽에 가장 크나큰 위협이었다.
계속되는 공방전 끝에 베오그라드의 성벽이 무너져내렸고, 오스만은 야습을 시도했다.
일몰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지속된 이 전투에서 예니체리가 필두로 오스만군이 성안으로 진입해 시가전이 벌어졌지만
헝가리군은 기지를 발휘, 무너진 성벽 주위에 불을 질러 추가적인 적군의 진입을 막고 고립된 오스만군을 역포위해 섬멸했다.
더더욱 놀라웠던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다. 약 2천명의 농민군이 자리를 지키라는 후냐디의 명령을 어기고
성벽을 나가서 오스만군에게 돌격한 것이다. 그들을 지휘하던 카피스트라노 추기경은 그들을 제지하려다가 결국 막지 못할 것임을 알고
선두에 서서 같이 오스만군에게 돌격했다.(또 놀라웠던 것은 당시 카피스트라노 추기경의 나이가 70이었다!)
그리고 이런 예상치 못한 돌격에 당황했는지 오스만군은 전열이 무너져 단체로 탈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메흐메트 2세와 예니체리가 직접 전장에 나서서 분전하며 전황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상황을 주시하던 후냐디가 전군을 재편성하고 전장을 덮쳐버리자 오스만군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메흐메트 2세는 이 와중에 사기를 높이기 위해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기까지 했지만
결국 화살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 예니체리에게 결사적으로 구출해오는 신세가 되었고,
오스만군은 야밤을 틈타 중장비를 모두 버리고 도망쳐오게 된다.
이 사건으로 메흐메트 2세는 음독■■을 시도할 정도로 충격에 빠졌으며
오스만의 유럽침공은 60년 이상 늦춰지게 되었다.(다시 베오그라드를 공격, 함락시킨게 60년후.)
안타깝게도 헝가리를 구한 후냐디와 카피스트라노는 곧이어 닥쳐온 전염병에 걸렸고,
후냐디는 3주후, 카피스트라노는 3달후 사망한다.
(사후 후냐디는 그리스도의 챔피언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카피스트라노는 성인으로 추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