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꽃피는 환상향
인간 마을의 소바 가계에서 일하는 저스틴은 외래인이다. 보통 어쩌다가 환상향에 들어와 버린 외래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운이 좋게 전생자에게 보호되어 마을로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그를 보호한 전생자는 다케시 시라미. 원래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여자였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한 뒤에도 저스틴은 종종 시라미와 만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친절한 시라미에게 그가 반해버린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일에는 소바 가계에서 서빙과 배달에 힘쓰는 한편, 휴일에는 시라미를 만나려 서당을 기웃거리는 나날.
참고로 시라미는 케이네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임시 교사직을 하고 있다.
금발의 외국인 청년 저스틴은 오늘도 시라미의 연심을 사로잡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린 정장 차림으로 그녀가 머물고 있는 서당 근처의 직원 숙소로 발길을 옮긴다.
*
"다케시양 이씁니콰?"
여자만이 출입이 허가되는 직원 숙소의 여자 구역에 머리가 내밀은 저스틴이 사랑스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일자로 쭉 이어진 복도의 끝까지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에 반응한 몇몇이 방문을 열고, 소리친 자의 얼굴을 확인한다.
"쯧. 저 인간 또 왔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는 듯한 묘령의 여성이 묘하게 신경질 적인 얼굴로 혀를 찼다. 그 외에 다른 여성들도 그녀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한 여성이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방문을 쳐다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시라미! 너의 그이가 또 왔어."
여자들 사이에서 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시라미의 방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그녀들을 향해 쑥스러운 외침을 내질렀다.
"그만들 하라니까!"
그런 새침한 반응에 여자들의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시라미는 볼을 부풀리며 퉁명스럽게 투덜댔다.
"저스틴이랑은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야야. 그런 관계가 아니란다~."
한 여자가 다른 여자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면서 얄밉게 굴었다. 보다 못한 저스틴이 시라미를 거들고 나섰다.
"시라미양은 저의 목숨의 은인. 그..그런 불쏜한 콴케 아님니돠!"
"어라어라~ 이름을 막 부르네? 너네들 언제 그런 사이로 발전 한 거야?"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할 뿐.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시라미는 방문을 닫고 도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괜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창피를 주게 된 저스틴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여자들도 악의는 없다는 듯 급히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미안~. 너네들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너무 놀러 버린 지도 모르겠네."
"언니도 차암. 지나쳤다고."
"맞아. 저스틴 엄청 풀 죽었어."
"나도 알아. 안 다고! 너네들도 같이 놀러 놓고 나만 나쁜년 만들기야?"
"가장 적극적으로 놀린 게 누구더라?"
사과가 어느새 여자들의 다툼으로 발전했다. 정말이지 이런 여자들의 생태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저스틴은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발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녀들은 그런 하잘 것 없는 다툼을 이어 간다고, 저스틴이 돌아간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아 차렸다.
직원 숙소에서 멀어진 저스틴은 축 처진 어깨로 털레털레 걸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어느 한 벤치에 체중을 실고 앉았다. 오늘은 완전 꽝이구나. 비록, 여자들의 방해가 있었다곤 하나 시라미에게 그런 창피를 준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만회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멍하게 먼 치를 바라보던 도중이었다. 그에게 반가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저스틴!"
틀림없다. 그녀, 다케시 시라미였다. 아까까지 풀 죽어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그는 들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케시야아앙!"
기쁜 나머지 그만 목소리를 크게 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한 저스틴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는 입안에 고인 침을 식도 넘어로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고 말했다.
"다케시양. 아카는 정말 제송해쓰미다!"
본의 아니게 창피를 준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러나 시라미는 '으으응~'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오히러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걸."
"그..그게 무순 소리임네카?"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한 거."
저스틴은 방금 시라미가 한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 시라미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는 투덜대는 투로 작게 말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부정할 건 없잖아."
삐친 듯이 내뱉은 그녀의 얼굴은 한 가을의 단풍잎처럼 붉었다. 뭐라고 했는지 잘 못 알아들은 저스틴이 눈치 없이 물었다.
"방큼 무슨 마를 한 검니카?"
"아.. 아무 것도!"
그렇게 부정하려는 찰나, 시라미는 말을 잇지 못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오려다 만 말들이 목구멍 안으로 도로 삼켜진다.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입을 오물 거렸다.
"나도 저스틴이.."
오늘 따라 자신이 왜 이런 건지, 시라미는 이런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 제대로 자신의 기분을 전하고자 뒤를 쫒아 온 것인데, 막상 중요한 순간에서는 소심해져 버리니 말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 버린다면 저스틴과의 관계는 계속 평행선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래. 말 하는 거야!'
시라미는 콩알만 한 가슴으로 용기를 쥐어짜 보기로 했다.
"실은 나도 저스틴이.. 조.. 좋아!"
했다. 결국, 저스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해버리고 말았다. 이 순간 시라미는 태어난 이례로 가장 부끄러운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저질러 버리긴 했지만, 이 뒤의 일을 생각지 못 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하며,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 얼굴을 양손으로 감추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런 고백에 혼란스러운 것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저스틴은 제 귀를 의심하면서도 있을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실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있었다. 그토록 바래왔던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이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둘은 거의 동시에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동시에 서로이 이름을 불렀다.
"다케시양!" "저스틴!"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실로 젊은 남녀 간의 풋풋한 풋사랑이 따로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 지긋한 어르신이 있었다면 청춘이구먼, 하고 훈훈한 감상에 젖어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먼저 용기를 낸 것은 저스틴이었다. 그는 불끈 쥔 주먹을 가슴에 갖다 대고서 있는 힘껏 자신의 기분을 뱉어냈다.
"기뻐요. 다케시양! 저.. 다케시양을 계속 조아해써요! 사.. 사..."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이 목에 걸러 좀체 나오지 않았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시라미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기다렸다. 몇 번인가 '사'를 반복하던 저스틴이 쉰 목소리로 그 문장을 완성했다.
"사기어 주세요오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라미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네. 기꺼이."
이로서 두 남녀의 관계가 단순한 은인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풋풋한 두 남녀의 달콤하고 끈적끈적한 사랑의 이야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염장을 지르게 만드는 빌어먹을 러브 스토리가
시작 될 것 같으냐!!!!
*
"내가 기대한 건 치열한 배틀물일 건데, 왜 이렇게 염장을 지르는 일들뿐인 거지?"
"그건, 봄이라서 그럴 거예요."
이런 쪽으로 내성이 없는 유카리를 이해시키는 것은 야쿠모가의 영원한 마스코트인 네코마타 요괴, 첸이었다. 환상향을 개편으로 누구든지 자신의 강함을 수치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환상향 전체가 다른 이세계로 옮겨진 지금, 시시한 연애물을 찍을 게 아니라 이세계인과의 배틀물을 찍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카리를 비롯한 고인물들의 바람일 뿐. 현실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려갈 따름이었다.
"유카리님.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잖아요.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떻겠어요?"
"그러네. 첸, 네 말대로 너무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을지도."
첸의 의견은 지극히 지당했다. 환상향을 이세계로 통째로 이주한 건 이제 겨우 한 달. 그 동안 자신들을 자극할 만한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요즘 너무 분홍빛이지 않니? 어딜 가나 뇌가 핑크색으로 절여진 놈년들로 넘쳐나니.. 원."
유카리가 이런 노처녀 히스테리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녀는 겉보기엔. 겉모양만은 절세 미녀였지만, 겉모습만 예쁜 탓에, 겉만 번지르르한 안타까운 미녀 취급이었다.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그런 외형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야쿠모 유카리는 인기가 없었다.
나이가 네 자리 수를 기록하고도 여태껏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신기할 정도로 남자와의 연이 없는 그녀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따질 것이다. 겉모습만은 미녀이니까, 얼굴만 따지는 남자와 사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유카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신의 내면 따위 중요치 않은 그저 얼굴만 보는 남자. 그 중에서 잘생긴 쪽만 골라서 사귀어 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보는 바와 같이 대실패였다. 아무리 얼굴만 따진다 해도 내면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만큼 유카리의 내면은 심각했던 것이었다.
어느 저능한 잉여신은 민폐를 끼쳐도 귀엽기라도 하지. 유카리는 그것도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데다가 유치하면서도 괴팍하며 심지어 극도의 나르시즘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상대하길 꺼리는 환상향 최고의 폭탄녀로 통하고 있었다.
물론, 유카리 스스로가 자신의 이런 내면을 바꿔보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면, 지금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대하는 란의 태도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탓에 란으로부터 하극상을 겪은 적은 수도 샐 수 없다.
방 안에서 한가로이 마을 인간들을 훔쳐보며 자신의 관음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여념이 없던 유카리는 몰카 같은 스키마를 닫고, 첸에게 이 자리에 없는 식신의 부재를 물었다.
"근데, 이 얘는 대체 어딜 간 거람? 첸, 혹시 란에게 어딜 간다는 소리 못 들었니?"
"못 들었어요."
첸의 대답을 들은 유카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하네?'하고 중얼거렸다. 혹시, 또 하극상을 일으킬 생각인 건지. 아무리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식신이라고 해도 어딜 나갈 때에는 향상 주인인 자신에게 보고를 하던 란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를 뜨다니.
조금 신경쓰이긴 하나, 조만간 알아서 돌아오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유카리였다.
*
한편, 그 시각. 환상향 바깥에 위치한 어느 산맥. 수많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그곳에 생겨나 있는 한 천연 동굴의 깊은 안 쪽. 그곳에서 잊혀졌던 한 남자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어느 이름 모를 행성에 보내졌던, 김성건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차가운 눈을 한 여인이 있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유카리님. 곧 그 동안 지은 죗값을 물을 때가 올 겁니다."
황금색으로 넘실대는 아홉 개를 꼬리를 흔들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그녀는 다름 아닌 유카리의 식신인 란이었다. 주인에게 아무 말도 없이 외출했던 그녀는 질리지도 않고 매번 실패로 돌아갔던 하극상을 다시 한 번 일으킬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야 말로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