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 손끝을 두드린다. 툭툭.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따라라. 귓가로 지겨운 음악소리가 들린다. 벌써 수백 번은 들었던 노래다. 오죽하면 지금 저 노래 끊긴다고 한들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들릴 정도다. 이 노래는 재즈? 아마도 그런 분류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블루스일지도 모르지. 눈을 뜨고 A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뒤집힌 A의 핸드폰에서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끌까 손을 뻗었다. 하지만 A가 생각났다. 유난히 이런 노래를 좋아한단 말이지. A의 취향은 도통 모르겠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쏴아아. 노랫소리 사이로 샤워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오감을 자극하였다. 눈을 감고 A를 상상했다. 그 매혹적인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쭉 뻗은 다리, 풍만한 가슴, 잘 빠진 골반까지. 무어 하나 아쉬울 게 없는 몸이었다. 몸만 본다면 누가 A를 40대로 볼까? 분명 그 누구도 A를 20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내가 A의 남편이었다면 어떨까? 저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겠지? 후우.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졌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방이 덥게 느껴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우. 숨을 내뱉자 온 몸의 피가 사타구니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순간이 싫다. A를 만나는 것은 좋다. 아니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다. 황홀함.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 본 황홀함은 A였다. 하지만 그런 A와 함께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이 싫다. 가령 아까 했던 생각처럼 말이다. 남편이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뭐하고 있어?”
눈을 뜨자 A가 보였다.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뜨고 A를 바라보았다. 지고 있는 석양이 그녀를 비췄다. 그 탓일까? A의 살결이 곱게 빛나고 있었다.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주듯이 A가 나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A가 침대 위로 올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야릇한 눈빛과 은밀한 감각들이 이리 오라고 유혹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A에게 다가갔다.
“아. 미안 음악 좀 끄고.”
A가 핸드폰을 쥐고는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핸드폰 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 무어가 왔는지 핸드폰이 진동을 하며 빛을 토해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봐야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나였다.
A를 한손으로 끌어안았다. 살결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이 뇌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A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유롭게 내 손짓에 몸을 맡겼다. 내 품안으로 들어와 다리로 내 허리를 감쌌다. 그 모습이 마치 뱀 같았다. 그물망 사이를 빠져나가는 뱀, 선과 악을 먹으라던 뱀과 똑같다.
A의 살결에 입술을 맞췄다. 짧은 신음소리가 들린다. 코끝으로 희미한 냄새가 느껴졌다. 숨을 들이마셨다. 스킨 냄새였다. 지긋한 중년 남성의 냄새. 목욕탕에 가면 매번 맡던 스킨 냄새와 똑같다.
늦은 밤. 눈을 뜨고 나니 텅 빈 천장이 보였다. 몸을 뒤척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나 홀로 누워있었다. 손을 뻗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퉁퉁. 침대를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 손이 허공에서 맴돌자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후 A가 누워있는 쪽을 보자 작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오늘 즐거웠고 또 보자.
여전히 미련 없는 쪽지였다. 쪽지를 내려놓고 A가 누워있던 자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얼굴을 침대에 파묻었다. A의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희미하게라도 무어라도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느껴지는 것은 진한 밤꽃 냄새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A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나 혼자였던 것 같다. 나 혼자 모텔로 와서, 나 혼자 사랑을 나눈 것처럼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옷을 다 입고 곧장 방을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밤 12시. 어쩌면 이 시간이라면 대중교통도 끊긴지 오래일 것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고민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A가 없다면 더 이상 이 방에 있을 가치는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일행분 나가시던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집에 가는 거예요.”
“이 시간에요?”
주인은 이어 내게 무어라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길로 문을 열고 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새벽 2시. A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다못해 문자라도 남겨놓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핸드폰에 A의 번호를 입력했다. 문자를 보내려고 타자를 치는 순간 A의 핸드폰이 떠올랐다. 뒤집혀있던 A의 핸드폰. 주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몸을 떨던 핸드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용일까?
A가 떠오른다. 조용한 거리가 A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까 즐겼던 달콤한 시간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A는 지금쯤 무어를 하고 있을까? 이른 새벽, 방을 나갔다면 어디로 간 걸까? 집으로 간 걸까? 집에 가서 남편의 곁에서 잠을 자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간 걸까? 다른 곳에서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는 걸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우웅. 핸드폰 진동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보자 B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지금 온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보니 대략 4시간 정도 전에 왔던 문자였다. 아무래도 주인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내 핸드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수업시간에 나갔잖아.
로 시작된 문자가 대략 10통정도 이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까 뒤이어 부재중 통화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조용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내가 수업시간에 나왔던가? 글쎄. 그다지 기억에 없었다. A에게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 것은 기억난다. 하지만 그게 수업시간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도 없으니 기억할리 없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 A에게 연락을 못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연락할 마음 따윈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가만 밤하늘 희미한 달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B와 만난 것은 다음날이었다. 점심시간 B가 내게 다가왔다. 학교 근처 음식점을 가자고 하기에 따라 나와 둘이서 밥을 먹으러 갔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가게에 들어와 주문을 하자마자 B가 내게 물어보았다. 눈을 깜빡이고 B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잠시 생각해보다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그리고 보니 어제 문자가 왔었지. 또 까먹었나보다. 어젯밤 집으로 가서 A 생각을 하느라 깜빡했다.
“아 그거. 별 일 없었어.”
“그래? 근데 왜 갑자기 수업 시간에 나갔어? 그것 때문에 교수님께서도 뭐라 하시던데......”
“그래. 그렇구나.”
눈알을 굴렸다. A는 지금 무어를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먹었다면 누구와 먹었을까? 손가락 끝을 튕겼다. 툭툭.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또 그 여자야?”
B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미간 사이가 좁아지면서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B는 유한히 A를 싫어했다. 무어가 그리 싫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건 B가 A를 심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처음 B에게 A 얘기를 했을 때 장기 밀매 업자는 아니냐고 추궁했다.
“뭐, 그런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B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딱히 B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나서서 A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B가 물어본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너도 징하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B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시작인가? 지긋이 B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쒸익 쒸익. 오늘도 조용히 지나갈 생각은 없나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어찌 오지랖이 저리 넓은지 신기할 뿐이다.
“가능한 순간까지? "
“미쳤어? 농담하는 거지?”
미치지도 않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정상이고 굉장히 진지하게 답한 것이다. 진심이었다. 가능하다면 A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그렇다. 눈알을 굴렸다. A가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 대체 왜 그 여자한테 그렇게 목을 매다는 거야?”
“글쎄.”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겠네.”
B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쿵하는 소리가 들리자 점원이 움찔거렸다. 음식을 가져온 점원이 어색하게 음식을 내려놓았다. B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음식을 받고 ‘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점원이 음식을 내려놓고 떠나자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그래봐야 얻는 게 뭐야? 생각해봐. 그 여자 남편도 있잖아. 좋게 얘기해봐야 장난감이야. 장난감. 심지어 장난감만도 못할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얘기였다. 무어 하나 틀린 얘기가 없었다.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집었다. 입을 벌리고 파스타를 한 입 먹었다. 매콤한 소스가 입안에서 퍼졌다. 후루룩. 넘어가는 목 넘김이 시원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이 가게는 처음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매웠다. 입안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물로 입안을 헹구며 A를 떠올렸다. A가 이곳에 온다면 좋아했을 텐데.
“생각해봐.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아니.”
단칼에 대답하자 B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원하는 것 따윈 없어.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좋아. 그렇게 잘 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 그저 그 사람이 날 원하면 갈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단지 그거면 난 만족해.”
“미친 거 아니야?”
B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B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 B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이따금씩 B가 나를 쳐다보았지만 계속 밥만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가게를 나오자 핸드폰이 울렸다. 재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니 A에게서 온 문자가 보였다. 서둘러 핸드폰 잠금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화면은 서서히 커졌다.
-지금 만날 수 있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쨍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낮이라. 낮에 불리는 건 또 처음이다. 게다가 평일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떠하리?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어디가? 수업 안 들어?”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B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B를 쳐다보았다. B가 손에 힘을 주자 어깨 위로 묵직함이 느껴졌다.
“오늘도 결석이면 위험하다고, 애초에 말이야. 너 출석도 아슬아슬하잖아.”
오른손을 들어 B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놓았다. 더 이상 B는 내게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글쎄다. 미친 거지.”
몸을 돌렸다. B를 뒤로 하고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지하철로 향하는 동안 B의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A와 나의 관계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득이 없는 관계였다. 어차피 끝은 이미 파탄으로 정해졌다. 내게 득은커녕 실만이 가득한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를 원하고 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줄곧 A를 원했다.
처음 A를 만난 것은 작은 파티였다. 파티라고 했지만 사실 다과회 같은 거였다. 주최자가 아는 분이라 갔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잔뜩 있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구석에서 창문이나 보고 있었는데 A가 내게 다가왔다.
“심심한가봐요?”
“네?”
고개를 돌리자 A가 있었다. 처음 만난 A는 기묘했다. 단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끌려갔다. 달이 지구에게 끌리듯이 나 또한 A에게 끌려갔다.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끌렸다. 굳이 말하라면 A라서 끌렸던 것이다.
그렇게 A를 만났다. 잠깐의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서로가 통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갈래요?”
한참을 얘기하다가 A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A와 같이 나왔다. 처음 만났지만 모텔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어째서 내가 A를 안고 있는 건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우리는 모텔로 들어가서 몸을 뒤섞었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서로를 원했다. 서로를 안고 서로를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A를 떠올렸다. 나는 A에게 왜 이렇게 끌리는 걸까? 그 이유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좋아했던 여자들은 이유가 있었다. 성격이 좋다던 지, 몸매가 좋다던지, 얼굴이 예쁘다던지, 하다못해 돈이라도 많다던지, 제각기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런데 A는 유독 다르다.
내가 A에게 끌리는 것에 이유 따윈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었다. 생물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생존을 갈구하듯이 나 또한 A를 갈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A에게 나는 무엇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A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생각해본 적 없다. 의문은 들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차피 A의 곁에 머무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장난감도 좋다. 쓰고 버리는 휴지도 괜찮다. 심심풀이로 만나도 좋고, 진지하게 만나도 좋다. 어찌됐건 A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
하지만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당신에게 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관문 앞에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그간 A를 알고 지낸지 꽤나 시간이 흘렀는데 A의 집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런 것이 그녀의 집은 내 집이 아니니까.
문을 두드리자 A가 나왔다. 일어날지 얼마 안됐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흘러내린 잠옷 사이로 하얀 살결이 보였다. A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집안을 살펴보았다. 집안 가득 A의 흔적이 넘쳐났다. 책장에 A가 좋아하는 재즈 노래부터 식탁에는 A의 사진이 있었고 건조대에 A의 원피스가 걸려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뒷골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뭐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상한 감각은 온 몸을 휘감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질감…….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느낌인 이질감이다. 그러한 이질감은 내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이 순간 가장 어색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였다. 그렇기에 이 집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얼른 나가라고.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문제 있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커다란 A의 눈동자 사이로 내가 보였다. 내 모습을 A가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이토록 이질적인 나를 어째서 당신은 나를 만나고 있는 걸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A가 다가와 내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당겨 침대 위로 넘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서로가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입을 맞추고, 타액을 교환했다. 옷을 벗기고 살결을 느끼며 탄성을 질렀다.
타오르는 A의 품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생각이든, 무슨 의미이든, 지금 A를 느낄 수 있었다. A의 곁에 있었고 A를 안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B의 말이 떠오른다. 잘 될 거라. 그딴 건 상관없다. A를 세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울리는 A의 신음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렇게 점점 A에게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