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소설을 씁니다. 아니, 한때 소설을 썼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사실 만화를 좋아합니다. 제 일생의 대부분이 만화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지요.
만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프로로 데뷔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누군가 봤을 때 내용을 알아보고 이해할 정도만이라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관심분야가 비슷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었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림 실력이 도저히 따라주질 않았습니다. 제 그림 실력은 만화를 그려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될만큼 심각했습니다.
그림을 연습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러는 대신 대체제를 찾았습니다. 그것이 글,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고, 따져보자면 오히려 좋아하는 축에 속했기에 그것은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거라고 착각할 정도였죠.
그래서 저는 그림을 연습하는 대신 글을 연습했습니다. 그림 대신 글을 선택한 데에는 성급한 제 성격도 한몫 했을 겁니다. 그림은 단 한 장을 그리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소설은 만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많은 양을 집어넣을 수 있으니까요.
맞춤법을 공부하고, 소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작법서를 찾아보았습니다.
언젠가 저는 제가 원했던 수준에 다다랐음을 깨달았습니다. 처음부터 프로로 데뷔하려던 것도 아니고, 그만큼 잘 쓰려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용을 이해하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서 장애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었던 것이니까요. 저는 그저 인터넷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 정도 실력에는 다다랐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실력은 그림실력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시궁창이었기에, 나름,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단지 그것은 제가 원했던 그림 실력이 아니라 글 실력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소설을 썼지만, 어쩐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왠지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슬럼프에 빠졌고, 그렇게 소설 쓰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미련은 줄곧 남아 있었습니다.
어딘가에서 계속, 무언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는 만화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나마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수단은 글이었고, 저는 짧은 글 두어줄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습니다. 뭔가를 표현하고 싶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어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더 이상 어린애로 남아있을 수 없는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 그런 때도 지난 오랜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것을.
사실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글을 위해 투자했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서 애써 외면했을 뿐.
저는 줄곧 만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만화와 소설은,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그림과 글이라는 특성상 아주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만화는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한 눈에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글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내가 표현하고 싶은 정보만 제한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를, 그대로 그려서 보여주면 사람들은 한눈에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주인공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엑스트라의 행동까지 하나하나 동시에 보여주면서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해주죠. 주인공 뒤에 지나가는 엑스트라의 복장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세계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감추는' 것입니다. 소설은 작가가 언급한 부분이 아니면 독자가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감출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남자인 줄 알았던 화자가 사실은 여자였다, 라는 식의 서술 트릭은 만화로서는 쉽게 엄두낼 수 없는 기술이죠. 그것이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것은 전자였습니다. 저는 이야기보다 배경세계관을 좋아했습니다. 소설도 좋아했지만 만화를 더 좋아한 제 취향이 그것을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 자체를 사랑하곤 했지요.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세계를 활짝 보여주고 싶었어요. 글은 그러한 데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수단이었습니다.
그림을 다시 공부하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금방 관두게 되더군요. 새롭게 그림을 공부하는 것보다 이미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글 실력을 더 끌어올리는 게 효율적인란 생각이 머리 어딘가에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만화를 그리게 되더라도 성급한 내 성격에는 안 맞을 거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무의식중에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와서 무얼 새삼, 이라는 생각이 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냥 게으르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제 인생에 있어 취미라는, 어쩌면 가장 크고 중요할지도 모르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의를 따라 더 원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와 다른 길로 되돌아가고 싶어졌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선 지난한 노력이 필요할 거라는 거지요.
어차피 취미 활동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다시 시작해도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어쩐지 한탄만 자꾸 생겨나네요. 그냥 그렇다구요.
내용 없는 긴 한탄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마음 전 이해할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