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다음날.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어제와는 달리 말끔한 정신상태와 평온함을 가진체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방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마침 날씨가 거짓말처럼 쾌창했다. 모든것을 쏟아내고 한결 가뿐해진
듯한 하늘이었다. 조금 더 감상적으로 말하면 웃는것 같기도 했다. 컨딕션 최고. 미래가 순조로울 것 같
은 근거없는 확신마저 드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뭐 좀 알아낸 것 있어?]
내가 내준 홍차를 홀짝 마시면서 그녀는 반대로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면서 뭔가 시
작될거 같은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인간이 이렇게 썪은 표정을 하고 있다니. 언제나처럼 불길함이 엄습
해오는 기분이다.
[고객님. 왜 그렇게 죽어가시나요.]
나는 하고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므로 바로 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득하던
내 얼굴도 다시 언제나처럼의 얼굴이 되어가고 있다.
[...어제 먹은 술이....우윽...]
...너 임마 술 마셧냐. 야 그리고 찻잔이랑 테이블에 뭐 쏟을 생각마라.
[평소엔 입도 안대더니 어쩐일이래.]
[쉬면서 푹 자려고 하다가. 또 유명하다길래...]
[하. 짐작이 가는구만.]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 야들렌은 대륙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외지지만 마을을 대표하는 수식어로써
쓰이는 말이 있다. 일명 축제의 도시. 야들렌. 그렇다. 이곳은 의외로 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이 있으며
다른곳보다는 높은 빈도로 축제를 연다. 뭔가를 축하하는 일을 대해 대단히 거창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
는 이곳 토박이들의 전통들은 현재 너무 많은 폭죽과 음식들을 낭비시키고 있다. 관광하는 입장에서야
특별한 하루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여겨질테지만 금전적인 이해득실이 발생하지 않는 거주민으로썬 과
하게 웃어재끼는 웃음소리와 너무 많은 사람들의 행렬은 좀 심하게 말하면 구토를 유발시킨다.
그리고 일단. 축제라는 단어가 붙으면 술이라는 단어 역시 바늘과 실처럼 따라오게 되는 법.
다른곳은 차나 커피를 마시는 고상한 카페들이 넘쳐난다는데 이놈의 동네는 크건 작건 술집 투성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여관에 무조건 술집이 붙어있으라는 법이 어딨단 말인가. 하지만 야들렌엔 모든 숙소
엔 작은 주점이라도 반드시 붙어있다. 단층건물조차도 어거지로 그 형식을 고수한다. 페코가 단층짜리
건물을 이용하진 않았을테지만 어찌되었든 그녀도 그런 형태에서 자연스럽게 음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겠지.
물어보지 않아도 무슨 술을 마셨는지 알 것 같다.
야들렌엔 유명한 전통주가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처음은 쿠에트로라는 전통주를 한잔 비우는 것으로
술자리를 시작하는 관습이 있다. 그녀는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진 않지만 자주 찾아오기 떄문에 쿠에트로
에 대해 몰랐을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그녀가 마신 것은 쿠에트로 사파이어. 이름처럼 색깔이 이쁘다.
쿠에트로가 옅은 갈색의 나무냄새가 물씬 나는 술이라면 그녀석은 꽃향과 바다처럼 시원한 색깔을 띄고
있다. 그리고 쿠에트로보다 배이상 독하다. 몇없는 술여행의 도전은 잘못된 선택으로 한번에 좌절되었을
것이다.
[...어라? 그러고보니 늘 따라다니는 경호원이 없네?]
[네르갈이라면 아래층에서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괴로워하고 있어]
네르갈. 그런 이름이었다. 보기만해도 위험한 분위기가 배어나오는 정말로 불길한 남자다.
비쩍 말랐지만 키는 크고 눈매는 날카롭고 이빨도 삐죽삐죽에 말도 하지 않는다. 귀도 그렇고 분명히 인
간은 아니다. 마족일듯 싶은데 그런 남자가 어째서 이런 20대 초반의 소녀 마법사의 경호원일을 하고 있
는지 항상 의문점이다.
...그나저나 그런 무서운 남자한테 서슴없이 다가가는 아주머니들이란 놀랍기만 하다.
정말로 뭔가 말할 대상이 있으면 그것이 삶의 원동력이 되는게 아닐까. 참고로 아주머니. 플라티아 부인
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건물의 주인이다. 나는 그녀의 방을 비교적 저렴한 월세로 쓰고 있다.
[그녀석도 고생이구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어떯게 됐어? 뭔가 알것 같아?]
그녀는 어제 내가 겪었을 것 같은 통증으로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갖다대면서 물었다. 그 동작과 표
정 하나만으로 어제의 숙취가 떠올라 내 얼굴은 점점 평소보다 더 인상을 찌그러뜨리게 되고 있다.
[우선 이것은 그냥 요리책인 것은 확실하다는 것?]
[그런건 나도 알거든.]
[아니아니.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니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예전 고대국가 중 일부에서 내려온 책은 겉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의 유치한
소설이었지만 사실 그 안에는 글자들의 배열로 특정하게 읽는 법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식들을 조합해서
책을 해석한 학자는 그 책이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박해받던 오닐 교의 신자가 자신들이 숨겨놓은
성유물들을 묻어두었던 장소를 가리키는 내용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문헌은 의외로 이런 종류의 책들
이 더러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아니지만. 흠.흠.
[내가 알아낸 정보로는... 최소 100년 전 이상의 서적이란 것.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요리 비법들은 물
론 옛날 방식 그대로의 레시피도 담겨져 있다는 것, 책커버에 사용된 가죽은 몬스터. <가아>의 것을 사용,
특정 가문과 저자가 적혀 있지 않아서 내 수준으론 연대를 자세히 측정할 수는 없어. 또...]
[뭐야 그냥 쓸데없는 책이란거네.]
그녀는 기대도 안했는지 덤덤하게 내 말을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모처럼 상쾌하게 시작하려던 내 하루가...
[요는 누군가에겐 가치가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책이란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느새 나는 평소의 내가 되어있었다. 아... 술마시고싶다.
[꽝이군.]
[꽝까진 아니지.]
[그래서 어쩔꺼야? 살래? 난 팔 준비가 되어 있어.]
[...]
고민된다. 어제 결심은 했지만 막상 때가 되니 머뭇거려진다.
일단 내 수중에 있는 돈은 한번 움직일 정도. 이윤을 반드시 내야 어떻게든 다음달을 견딜 수 있다.
구지 움직이지 않고 책만 넘긴다면 소정의 사레금은 받을 수 있지만...말그대로 팁같은 수준이니 그걸론
언제나처럼 또 플라티아 부인을 곤란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옛시대의 영웅은 세계를 구하려고, 현대의 왕도 나라를 다스리는데 머리를 쓰는데 일개 천민인 나의 생활
권 안에선 이것조차도 인생을 건 선택지이다. 고민된다. 고민된다....그러니까 저저번달에 장식용 모조검
을 사는게 아니었는데 젠장...왜 그런짓을 해가지고 미쳐갔고. 물건 가치 측정을 주업으로 하는 놈이...
[싸게 넘길께. 어차피 난 이런 잡동사니에 흥미없어.]
그녀에게 값진 물건이란 용들이 사는 레어라도 들어가야 생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의 케릭터가 확실하다는 것. 관심없는 것은 철저히 무관심인 능력 좋은 마녀,
돈도 많음, 나름 나랑 친분관계도 있음.
[좋아. 거래하지. 나한텐 생존이 걸려있는 결정이야.]
결의에 찬 얼굴로 내가 사내답게 대답했다. 그녀의 반쯤 뜬 눈이 0.5밀리 정도 더 크게 떠지는 기분이 들었
다.
[뭐야. 거창하게. 혹시 엄청난 보물?]
[그럴리가 있냐. 이건 그냥 옛날 요리책일뿐이야. 비장한 이유는 내 전재산을 걸고 있기 떄문이지.]
[오오? 전재산까지 걸다니. 역시 보물 아냐?]
[하하하.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로에 샤드로의 이름을 걸고 내 전재산을 공개하지!!]
나는 테이블 밑에 작은 금고형 상자를 꺼내들며 말했다. 진지함에 나도 모르게 무신론자면서 에스터 교의 십
자 성호까지 그렸다. 그녀는 예상 밖의 박력에 놀랐...기보단 재밌게 연극배우라도 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짜! 잔!!!]
상자에 열쇠를 끼고 시원하게 돌려 공개한다.
...
[...]
[...]
[...........?]
[90골드!!!!!]
정확하게는 90골드하고 은화동전 7개.
[장난치지마.]
[장난 아닙니다 멋진 마법사 선생님. 한번만 봐주세요.]
[...]
[선생님. 제 말 좀 들어봐주세요. 선생님?]
나가려고 일어서는 그녀를 붙잡고 간곡하게 따라붙는다.
[...그런 케릭터 아니지 않았어? 너. 아니 샤드로 아저씨.]
[선생님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하하하.]
[선생님이라고도 부르지 말아줄래.]
그 날. 나는 오랜만에 매우 좋은 거래를 했다. 다음에 제대로된 물건을 가져올테니 제대로된 가격과 감정을 해주
라는 약속을 받고. 어른이 강한 것은 자존심을 구길줄 알기 때문이다. 그녀보다 3살정도밖에 많지 않지만 어쨌든
상대적으로 더 어른인 나는 굴욕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느끼며 두꺼운 책 한권을 품에 안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왔다.
빈곤이 나를 간만의 외출로 이끌어주었다.
전재산을 들고 나는 그동안 죽겠다면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 도시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문화인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데 설렘을 느끼기도 했다.
대륙 신력 1023년 어느날.
감정사라는 이름을 달고 사실상 상인이나 마찬가지인 나는 그렇게 그날도 분주히 움직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