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아침. 회백색의 돛단배가 하늘의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돛단배는 한 척 뿐이었고, 나머지는 온통 바다였다. 그러나 거기에 바람은 없었다. 돛단배는 갈 데 없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려 애써 보았지만, 끝내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밑으로 가라앉았다. 침몰한 돛단배는 바스라져 추락했다.
그것은 비를 뿌리고 있는 매지구름의 모습이었다. 매지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비가 도달한 곳은 열대아의 밀림이었다. 비가 내리자 동물들이 식물 밑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노래를 부르고 있고, 비와 바람만이 춤을 추고 있다. 햇빛은 그들의 관람객이다. 자연이 빚어낸 화려한 극장 한 편이 개봉되고 있었다. 동물들도 햇빛 사이에서 관람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이 그 극장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볼품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무신경한 표정으로 따뜻한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비와 바람은 그에게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어느덧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발걸음이 머무른 곳은 녹색으로 뒤덮인 폐허 앞이었다. 폐허는 과거 이곳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흔적으로 남겨 놓았으나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은 없었다. 쉬지 않고 계속된 풍화작용의 망치질 끝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물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돌멩이나 바위 같은 자연물로 퇴화되어 있었고, 그중 붕어한 왕을 위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열석들은 그 목적과 생기를 잃고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폐허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석 사이를 지나갔다. 그의 관심은 열석에 있지 않았다. 그는 원의 둘레를 이루고 있는 열석들의 중심에 비스듬히 서 있는 잔해로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잔해를 뒤적거리던 중 그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그의 눈에 걸려든 것은 잔해 속에서 비정상적인 각도로 튀어나와 있는 작은 비석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잡아 빼냈고, 그러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작고 검은 구멍이 바람소리로 방랑객을 맞이했다. 그는 그 구멍에 입을 대고 외쳤다.
"동백꽃이 향기를 잃을 때까지."
구멍 밑에서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봄은 여름이 진 다음에 올 것이다. 오랫만에 듣는 목소리군. 용케 암호는 기억하고 있군. 밧줄은 걸려 있으니 알아서 내려와."
그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우선 잔해 꼭대기에 꽂혀 있는 막대기 두 자루를 뽑은 다음 잔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그는 열쇠구멀에 열쇠를 넣듯 정수리 높이에 있는 두 틈새에 막대기를 각각 밀어넣었다. 알맞은 크기로 들어간 막대기가 제대로 고정된 것을 확인한 그는 두 막대기를 아래로 힘껏 당겼다. 그러자 사선으로 서 있던 막대기가 땅과 수평을 이루었고, 막대기 사이에 끼어 있던 돌쩌귀가 안정적으로 쓰러졌다. 돌쩌귀의 뒷면에는 온갖 철심과 철판이 붙어 있었고, 옛날의 모습과 그대로라는 점에서 그 돌쩌귀가 아직까지 지하 통로의 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몸을 웅크려 잔해 속으로 들어간 그는 땅굴을 발견했고, 땅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 그는 수직 구덩이와 함께 그 앞에 놓여 있는 긴 밧줄을 발견했다. 벽을 밟으며 밧줄을 타고 내려온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라진 풍경이 없는 지하 갱도였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보다 사람이 더 줄었군요."
"뼈아픈 지적은 나중에 해도 되네. 일단 다시 온 걸 환영하네, 베품문."
달라진 점을 또 하나 찾자면 상대방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이었다.
"사정이 좋지는 않나 보군요. 물자 보급에 이상이 있습니까, 뿌리수염?"
뿌리수염(지금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불렸다.)은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지랄맞은 병 하나 때문에 모든 근처 보급로에 지장이 생겼어. 식량과 식수를 구하려면 직접 지상으로 올라가야 해. 보급자들이 모두 병에 걸릴 줄 누가 알았겠나. 덕분에 바깥 소식은 구하지도 못하고 있어."
뿌리수염은 보급로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정보도 보급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달 담당인 보급자들이 단 한 명도 없으니 물자는 물자대로, 정보는 정보대로 얻지 못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베품문은 위를 보았다. 허름하지만 나름대로 견고한 흙지붕과 나무틀. 그곳에 달려 있는 등롱 하나가 희미한 빛을 내며 두 사람의 윤곽을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벽 쪽으로 다가가 자신이 가져온 등롱을 걸며 용건을 제시했다.
"조만간 큰 바람이 불 겁니다. 지키실 불씨는 있습니까?"
조만간 대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대비책은 있습니까?
뿌리수염은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넌 항상 은유적으로 말하지. 버릇 들이지는 마라."
다시 그에게 걸어온 뿌리수염은 탁자에 놓여 있던 지도를 건네며 물었다.
"네가 말한 그 큰 바람이 이 지도 어느 부분에 해당하나?"
뿌리수염은 그 큰 바람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 짐작은 맞았지만, 규모는 예상과 달랐다.
그는 망설임없이 말했다.
"아마 전체적으로 해당할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전투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황제를 상대로."
상식 밖의 대답을 받은 뿌리수염은 다음 질문을 찾느라 침묵을 유지했다.
"그래. 대충 상황은 알 것 같군. 제국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사방에서 봉기했다는 것이군. 마침 병 때문에 정국이 시끄러우니 제국을 뒤엎기에는 아주 적절한 상황이겠군. 제국에 전례없는 반역이 일어난다라. 오랫만에 나누는 말 치고는 너무 황당한데. 일단은 믿으마. 그런데 너는 날 도우러 온 거냐?"
"불씨가 있다면요. 다행히도 마침 있군요."
어디에?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