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역주행한, VR 글래스 '바이브 플로우(VIVE FLOW)' 체험
VR하면 보통 머리에 '뒤집어 쓰는' HMD(Head Mounted Display) 형태의 제품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HTC사가 출시한 '바이브 플로우'는 여러 모로 흥미로운 제품이다. 경량화, 소형화를 거쳐 머리에 '뒤집어 쓰는' 형태가 아닌, 귀와 코에 걸치는 안경 형태로 만든 독립 구동 VR 디바이스, 일명 'VR 글래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VR 디바이스가 HMD 형태로 출시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보다 작은 크기의 액세서리에 가상현실을 불어넣기엔 아직 충분한 소형화를 이루지 못했고, 어떻게 노력해서 만든다고 해도 가격은 비싸고 성능은 떨어져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홀로렌즈가 있다. 홀로렌즈의 가격은 500만 원으로 굉장히 비싸지만, 40만원 대 보급형 VR HMD보다 부족한 성능을 보여줘 일반 소비자 입장에서 선뜻 구매하기 꺼려진다.
그런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VR 글래스 제품을 출시한 HTC사의 도전은 상당히 과감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연 바이브 플로우는 VR 산업의 미래를 비추는 혁신적인 제품일 것인가? 구매하여 직접 체험해 봤다.
※ 본 체험기는 협찬 및 대여가 아닌, 직접 구매한 제품으로 진행됐습니다.
| 바이브 플로우 | |
| 무게 | 189g |
| 프로세서 | 퀄컴 스냅드래곤 XR1 옥타코어 |
| 메모리 | 4GB |
| 저장용량 | 64GB |
| 디스플레이 | 3,200x3,200 통합 해상도 / 75Hz 화면 주사율 / 100° 시야각 |
| 배터리 | 18Wh 이상의 외부 보조 배터리 |
| 유무선 연결 | USB-C / Wi-Fi / BT 5.0 |
| 가격 | 69만 9,000 원 |
가볍고 착용감이 뛰어난 VR 글래스, 바이브 플로우
바이브 플로우는 3200x3200 통합 해상도와 75Hz 화면 주사율, 최대 100도의 시야각을 가져 고품질 영상을 즐기기에 그래픽 성능에 부족함이 없다. 퀄컴 스냅드래곤 XR1 칩셋과 4GB 메모리, 64GB 내부 저장공간을 가져 각종 미디어 콘텐츠를 다운로드 받고 재생할 수 있는 독립 구동 가능 모델이기도 하다.
기기 무게는 약 189g로 굉장히 가벼우며, HTC의 노하우가 깃들어 있는 인체공학적인 설계 덕분에 착용감이 굉장히 뛰어나다. 특히 동공 간 거리(IPD)를 설정하는 방법이 인상깊다. 안면폼을 제거하고 전용 코 받침을 장착한 후 6단계로 조절이 가능한 디옵터 렌즈를 통해 사용자의 눈에 가장 적당한 IPD 값을 찾는 과정을 거치는데, 확실한 기준이 잡혀 있어서 설정도 쉽고 착용 시 선명한 화면을 얻을 수 있어 좋았다.
뒤집어 쓰는 것이 아닌, 안경처럼 귀와 코에 걸쳐서 사용하는 바이브 플로우
자신의 눈에 적합한 IPD를 찾지 못하면 화면이 흐릿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이브 플로우는 6단계로 조절이 가능한 디옵터 렌즈를 통해 사용자에게 가장 알맞은 IPD를 찾아준다
바이브 플로우 구동 시 볼 수 있는 화면, 여기까진 괜찮았다.
제품 가격은 69만 9,000원, 엄청 저렴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간 HTC사가 출시해온 바이브 시리즈 평균 가격이 최소 100만 원을 넘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제품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패키지 기본 구성품은 바이브 플로우 본체, USB C to C 케이블, IPD 조절용 코받침, 보관용 파우치, 제품 보증 및 설명서로 휴대성을 강조한 제품답게 상당히 단출하다.
착용감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제품
위 설명만 보면 가격, 성능, 편의성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역대급 VR 디바이스가 탄생한 게 아닌가 싶을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 구동이 가능한 작고 가벼운 안경형 VR 디바이스라는 정체성을 모조리 부정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바이브 플로우는 기기에 대용량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지 않다. 독립 구동이 가능한 제품인데 엉뚱하게도 외부 전원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흔히 스마트폰 등을 충전할 때 사용하는 휴대용 보조 배터리로 전원을 공급해야 한다. 즉, 189g이라는 가벼운 무게는 기기 내부에 대용량 배터리가 탑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다.
기기 구동을 위한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지 않아 보조 배터리 등을 통해 외부 전원을 연결해야 한다.
기기를 안경을 쓰는 것처럼 착용해야 하기 때문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부득이하게 배터리를 외부로 빼냈다는 것은 백보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다. 그렇게 착용감을 높여도 정작 기기 성능이 좋지 못해 결과적으로 사용감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바이브 플로우에 내장된 칩셋은 퀄컴 XR1으로, 꽤나 구식 모바일 플랫폼이다. 퀄컴 XR1과 XR2의 연산 성능이 상당히 차이 난다는 것과 2020년 출시된 메타 퀘스트 2가 퀄컴 XR2 칩셋을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2022년에 출시된 제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납득이 가지않는 구성이다. 또 오로지 자체 기기 성능을 활용한 독립 구동만 가능하기 때문에 PC와 연결하면 성능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추가 기능도 없다.
여기에 추적을 위한 카메라가 단 2개 뿐이다. 약 5년 전 출시된 윈도우 MR 기반 VR HMD들이 대부분 2개의 카메라를 탑재했는데 트래킹 성능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최근 출시되는 제품들은 안정적인 트래킹 성능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 4개 이상 추적 카메라를 탑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또한 구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출시된 제품치곤 알고보면 구식인 부분이 많은 바이브 플로우
무엇보다 전용 컨트롤러가 없어 스마트폰을 연동해 컨트롤러 대신 사용해야 한다. 스마트폰의 터치 스크린이 버튼을, 자이로센서가 움직임을 대신한다. 트래킹은 성능은 처참하다. 스크린 터치라는 대략적인 가상 입력 방식, 자이로센서라는 대략적인 움직임 산출 방식은 입력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대신하여 움직여야 하는 VR 컨트롤러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다소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안드로이드 9 이상 스마트폰만 연동이 가능하다는 점도 뼈아프다. 아이폰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 만약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 구형이거나, 아이폰이라면 바이브 플로우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바이브 플로우는 스마트폰을 연동해 컨트롤러로 사용한다.
스마트폰을 컨트롤러로 쓰다니, 최악의 발상이다.
바이브 플로우는 착용감을 제외한 모든 점이 최악이었다. 안경을 쓰듯 가볍게 걸쳐서 착용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말이 좋아 독립 구동이지 사용을 위해서는 보조 배터리와 스마트폰을 추가로 연결해야 해서 번거로웠고, 내장된 칩셋 또한 구형이라 성능이 낮다보니 최대 3.2K 통합 해상도를 지원하는 그래픽 성능을 충분히 이끌어 내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일반 영상 시청은 큰 문제가 없지만 입체 영상이나 VR 게임을 즐기려고 할 때 특히 불편하다. 스마트폰 컨트롤러 트래킹 성능이 워낙 좋지 못하다 보니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했으며, 가장 문제는 이처럼 사용이 원활하지 못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인지부조화가 발생해 멀미가 난다는 점이다.
도자기 만드는 게임, 스마트폰 컨트롤러로 해봤는데 정말 불편하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VR 영상, 개인적으로 실감보단 멀미만 느껴졌다.
바이브 플로우로 무엇을 해야할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인터넷 서핑, 영상 시청, 게임 플레이 등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못하다. 굳이 쓸 곳이 있다면 침상에 누워서 편하게 영상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어차피 스마트폰과 연동해야한다는 점에서 그냥 스마트폰을 거치해서 보는 것이 화면은 좀 작겠지만 수십 만 원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영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갈 길이 먼 VR, 적어도 퇴보하진 말아야
십수 년 전부터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뇌파로 아바타를 조종하는 등 물리적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활동을 즐기는 꿈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 것과 달리 현대의 가상현실은 다소 초라하다. VR을 소재로 하는 유명 소설, 애니메이션 '소드 아트 온라인'의 배경이 2022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의 VR이 얼마나 '상상 이하'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의미로 여전히 '상상 이하'인 가상현실 세계. 사진은 '소드 아트 온라인 엘리시제이션 리코리스'
말이 좋아서 HMD(Head Mounted Display)라고 부르지 사실상 머리에 고정해서 사용하는 모니터나 다름없으며, 다소 직관적이지 못한 형태의 전용 컨트롤러를 사용해야 해서 양손이 부자유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상보단 현실에 의존하는 면이 더 크다. 특히 물리 조작적인 면에서 키보드와 마우스가 훨씬 편리하다는 점에서 가상현실은 갈 길이 멀다.
현재 VR 업계가 당면한 과제가 있다면 물리적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다. 뇌파 조종까지는 아니더라도, 움직임면에서 부자유와 인지부조화를 가져오는 형태의 물리 컨트롤러에서 최대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다행히 미래는 밝다. 마이크로소프트, 메타(구 페이스북) 등 IT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가상현실 기술을 연구하고 있고, 실제로 AI를 활용해 별도 컨트롤러 없이 손동작을 인식하는 '핸드 트래킹' 기술을 앞세워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메타버스'의 도래로 수 많은 IT 기업들이 가상현실의 발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바이브 플로우는 오히려 퇴보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실망스러운 제품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역주행한 제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삼성 기어 VR을 마지막으로 그 명맥이 끊긴 '스마트폰을 활용한 VR 디바이스'를 최악의 형태로 다시금 선보였다.
바이브 플로우는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잠깐 VR 입체 영상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 나름 의미 있는 제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착용감 하나는 인정할만 하다. 부디 HTC는 바이브 플로우 개발을 통해 쌓은 경험으로 더 의미 있는 VR 디바이스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바이브 플로우는 최신 VR 기술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라면 구매를 추천하기 어렵다. 인체공학적인 설계와 경량화로 착용이 굉장히 편리하지만, 성능 및 기능의 한계로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하고, 구동을 위해 보조 배터리와 스마트폰이 필요한 등 유명무실한 독립 구동 방식으로 사용성이 떨어진다.
| 안민균 기자 ahnmg@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