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의 저택
본격적으로 글을 쓴지 10년째 되는 해.
나는 오랜 무명작가 딱지를 벗고 드디어 첫 장편소설 <눈물의 맛>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출판인들이 선정하는 올해의 소설상 트로피도 거머쥐었고 이후 크고 작은 상을 몇 번 더 타면서 수상소감을 읊는 게 익숙해졌다.
그때 난 여러 파티에 불려 다니며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이 뻔한 수식어 말고는 대체할 단어가 없다. 지긋지긋하고 절망적이던 ‘지난 10년’이란 터널을 빠져 나와 완전히 새로운 삶이 눈앞에 펼쳐졌으니까. 난 매일 밤 파티에서 술에 절어 헛소리를 주절대면서도 아침만 되면 신기할 정도로 정신이 말짱해졌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내 인생의 절정기였고 힘이 넘쳐흘렀다.
어느 날, 에이전시 대표와 근처 레스토랑 야외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으며 칵테일파티 이야기가 나왔다.
대표는 어느 돈 많은 거물급 인사가 자서전을 냈는데 그 출판기념파티에 그녀와 나를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명 배우, 가수... 아무튼 꽤 많이 모일 거래. 근데 난 도저히 시간이 안 돼.”
“뭐하는 놈인데 그렇게 모여요?”
“자세한건 나도 몰라. 파티비용을 대신 내주기로 유명한 물주라는 것 외엔...”
그녀는 내게 검은 초대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네 책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가봐.”
내게 파티는 일상이었다. 파티에서 난 아무렇게나 내뱉은 개소리로 마음에 드는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북적대지 않는 조용한 자리로 상대를 이끌고 내 무명생활의 에피소드 중 하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해 팔아먹었다.
막 성공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고독한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 이후 주고받는 몇 마디 대화에 따라 곧장 호텔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탈지 아니면 연락처를 교환하는 사이가 될지가 결정되었다.
재미를 보지 못한 날도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가능성이었으니까.
동전 던지기와도 비슷한 확률의 가능성이 날 미치게 만들었다. 오늘 밤도 그런 기대감에 들떠 파티가 열리는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은 호수가 보이는 외곽에 위치한 조용한 곳이었다. 난 조금 늦게 도착했다.
격식이 필요 없는 가벼운 칵테일 파티였기에 사람들과 섞이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신이 나를 저버렸는지,
내가 내뱉는 즉흥적인 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티니를 들이키며 대화의 흐름을 휘어잡을 기회를 노렸지만 쉽지 않은 상대가 버티고 있었다.
그 날의 주인공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운 좋게 각본상을 탄 애송이 감독이었는데 어느 해안가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뤘다나 뭐라나.
무리 중에는 얼굴이 익숙한 몇몇 배우들도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조각상을 감상하는 관광객처럼 황홀한 눈빛으로 그의 말 한 마디에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송로버섯이 들어갔다는 것만 알 수 있는, 화려하게 장식된 요리를 접시 채 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보드카토닉을 마시며 그걸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동안 살이 피둥피둥 찐 중년남자와 젊은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와 내 앞을 지나쳤다.
조금 눈치가 보여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자 젊은 남자가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중년남자는 입 꼬리가 처진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젊은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마치 낯선 손님을 경계하는 페르시안 고양이 같았다.
다시 술을 한잔 마시려는 찰나 갑자기 응접실 전체가 울릴 정도의 큰소리로 고함 소리가 귀를 찔렀다.
“작가님의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소!”
난 왜 저렇게 크게 소리치는지 의아했지만 순간 저 중년남자가 출판기념 파티를 주최한 돈 많은 작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 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치켜뜬 눈썹과 내리깐 눈망울, 지퍼주머니처럼 생긴 입술, 부드러운 반죽을 두 손으로 대충 버무려놓은 것 같은 볼 살과 두툼한 목살,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영락없는 히치콕의 환생이었다.
“멋진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 막혀서 늦은 바람에 인사를 못 드렸네요.”
자리에 일어나 악수를 권했지만 히치콕은 옆에 선 젊은 남자의 귓속말에 집중하느라 나를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내 말을 전해들은 후, 그는 덥석 내 손을 잡고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보아하니 귀가 잘 들리지 않은 모양인데 그냥 악수를 먼저 하는 게 뭐가 어려운지. 참 꽉 막힌 작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님의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소. 하지만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그는 똑같은 말을 큰소리로 반복하며 내 부족한 인내심을 자극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세상에 내놓는 순간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니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독자의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고 그걸 받아들이는 일도 나름 즐겁거든요.”
나는 대화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해 지극히 정석적인 답변을 토해냈다.
히치콕은 젊은 보좌관의 귓속말을 전해 들으면서 두꺼비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지금 즐겁소?”
그 오만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진저리가 났다. 더 이상 이런 기괴한 방식의 대화를 이어나갈 기분도 아니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치콕은 여전히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재수 없는 별장을 당장 빠져나가고 싶었다. 내가 등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가려 하는 순간,
젊은 남자가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는 너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부님께선 제철소를 운영하셨을 적 고압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있으니 이해해주십시오.
하지만 작가님의 책을 침대 곁에 두고 몇 번이나 읽을 정도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강하세요.
사실 이 파티도 작가님을 뵙고 싶어 마련한 자리입니다.”
그 말은 내 기분을 조금 누그러뜨리긴 했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건 몰랐군요. 그런데 급히 어딜 좀 가야해서...”
난 대충 얼버무리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작가님과 계약을 맺고 싶어 하세요.”
계약? 갑자기 히치콕이 제시할 액수가 궁금해졌다. 나는 문손잡이에 손을 떼고 옷깃을 정리한 뒤, 군말 없이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계약이라면 제 에이전시를 통해서 전해도 됐을 텐데요? 이렇게 갑자기 제안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젊은 남자의 통역을 전해들은 히치콕은 재미난 계획이 떠오른 아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틀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솔직히 말씀드리죠. 러시아 인형 같은 대화는 질색입니다. 이 자리에서 주고받을 게 뭔지 확실히 하는 게 어떤가요?”
히치콕은 귓속말로 내 말을 전해들은 뒤, 두툼한 두 손을 배 위에 얹고 말했다.
“이틀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 이유를 말씀드리죠.”
***
나는 아파트의 짐을 정리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교외에 마당이 딸린 주택을 미리 구했고 그곳에 새로 산 가구들은 옮겨둔 상태였다.
그래서 여기서 쓰던 정든 가구와 물건의 대부분을 업자를 불러 헐값에 처분했다.
내가 아끼는 잡동사니가 든 상자와 책들, 그리고 얼마 전에 산 와인냉장고만 옮기면 이사는 끝이다.
11년간의 보금자리. 하지만 미련 따윈 없다. 잠들지 못하는 불안한 영혼의 흔적이 남아있는 좁고 깊은 구렁텅이에 불과했으니까.
내게 끊임없이 자살의 유혹을 불러일으키던 어둡고 텁텁한 공기.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하얀 벌판 위에 검은 병정들을 미친 듯이 채워가며 사투를 벌였다. 그렇게 얻어낸 새 출발이었기에 난 짐을 싸고 떠나면 두 번 다시 이 염병할 동네에 얼씬도 하지 않은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해질녘의 노을이 방안을 붉게 물들였다. 눈부실 정도로 황홀한 빛과 아름다운 색감.
나는 순간 504호와의 이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뻔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짐정리를 마무리했다. 난 지독한 놈이었으니까.
나는 짐을 내리고 렌트한 픽업트럭에 물건을 실었다.
운전석 문을 열던 찰나, 맞은편에서 윤기가 흐르는 회색 마이바흐 한 대가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차의 뒷문을 열고 내린 것은 다름 아닌 며칠 전 파티에서 봤던 히치콕의 젊은 보좌관이었다.
그는 그 날처럼 짜증날 정도로 사근거리는 미소를 띠며 내게 다가왔다.
이런 후진 동네를 떠나기 직전 그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난 이미 마당이 딸린 주택을 샀다고!’ 라고 비명을 지를 뻔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작가님.”
“어떻게 알고 왔어요?”
“대부님께선 출판업계 쪽에도 인맥이 두터운 편이십니다.”
“두터운 인맥으로 남 뒷조사나 하는군요.”
“오늘 저녁식사에 함께 하시죠. 후회하지 않을 제안을 드리죠.”
“후회하지 않을 제안? 그게 뭔데요?”
“후회하지 않을 액수라는 표현은 너무 직설적이라 피하고 싶었습니다만.”
후회하지 않을 액수... 그 단어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이런 제안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 여유 만만한 미소가 내 화를 돋우었다.
“내가 그 따위 미끼를 물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안하지만 난 낚이지 않아요.
가서 당신 대부니 뭐니한테 전하쇼. 나를 쓰고 싶으면 정식으로 계약서를 보내라고. 이런 허접한 수법으론 씨알도 안 먹히니까!”
***
날 태운 마이바흐는 교외를 지나 숲속에 둘러싸인 히치콕의 저택으로 향했다.
정문을 지나 모습을 드러낸 저택은 ‘ㄷ’ 자 형태의 3층짜리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었다.
저택의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외관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창문이 건물 안쪽에만 있고 바깥쪽에는 한 개도 없는 폐쇄적인 구조라는 사실이었다.
저택 앞에는 여러 대의 세단이 세워져 있었는데 아마 이 부자의 컬렉션인 듯 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마르스나 아테네 따위의 대리석 조각상이 양 옆에 늘어서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양쪽에 드넓은 잔디밭이 가꿔져 있었다.무슨 오래된 대저택을 개조해 만든 호텔에 온 것만 같았다.히치콕의 보좌관은 뒷짐을 진 채 앞장서서 걸었는데 이 자식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내가 주변을 둘러보느라 한눈을 팔 때도 나와 정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는 화려한 발코니 난간 아래에 움푹 들어간 아치형 정문에 도착해 벨을 누르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발코니를 떠받치는 기둥들을 손으로 훑으며 열린 문을 향해 들어갔다.
내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젊은 보좌관이 다가와 내가 벗은 프록코트를 받았다.
홀에는 중세 유럽의 하인과 하녀 차림을 한 네 명의 남녀가 두 손을 모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젊은 남자는 단추대신 운동화 끈처럼 생긴 줄로 가슴 부분이 조여진 셔츠를 입은 하인에게 내 코트를 건네주었다.
이런 웃기는 복장을 입혀놓는 히치콕의 취향에 소름이 끼쳤다.
바닥에는 푸른색 카펫이 깔려있었고 거대한 샹들리에 2층으로 향하는 완만한 양 갈래 계단을 은은하게 밝혀 주었다.
곳곳에 가스램프가 켜져 있긴 했지만 홀은 너무 거대해서 깊은 동굴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대부님의 저택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죠.”
놈은 깍듯이 목례를 하며 홀 뒤편으로 나를 안내했다. 예상대로 그는 히치콕의 집사였다.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는 양쪽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계단참에 걸린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였다.
프라도 박물관에서 훔쳐온 게 아닌 이상 모조품이겠지만 어쨌거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저런 그림을 집에 걸어놓진 않는다.
그 외에도 고야의 <악마의 연회>나 일리야 레핀의 <폭군 이반, 아들을 죽이다> 등 음침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저택의 묘한 분위기와 맞물려 가짜들은 기괴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문득 히치콕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과연 어떤 종류의 변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