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펑 장르의 효시나 다름없었던 필립 K. 딕은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 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이 승리하고 일본과 독일이 미국을 동서로 양분해서 통치하는 세계를 그렸는데
거기서도 일뽕이 딱히 있었던 것은 아님. 일본 애들은 주역을 믿는 기묘한 종자들로 나오고, 미국 팝컬쳐에 심취해서 전쟁 전 미키마우스 인형 같은걸 거금주고 사는 애들로 그려짐.
본격적으로 일본이 사펑 장르와 연계된 것은 80년대 - 90년대부터인데,
이때는 일본의 경제적인 성장이 어마어마해서 미국에서 이른바 "일본 공포증"이 생길 지경이었음.
어지간한 산업 제품이 미제보다 일제가 좋다고들 호들갑 떠는 시절이었으니까.
이때 사펑 장르의 중흥을 이끌었던 윌리엄 깁슨 같은 경우, "뉴로맨서"를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일본이 이른바 아시아의 패권을 쥔 국가가 된 모습을 그림.
그리고 윌리엄 깁슨과 사이버펑크의 영향을 받은 이 시절 TRPG들 역시 이 설정을 많이들 차용해서,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가져가는 모습으로들 그렸지.
근데 이건 일뽕이랑은 거리가 좀 있음.
왜냐면 사이버 "펑크"라는 장르의 특성을 좀 생각해야 해.
펑크는, 인간 존엄에 대한 의문과 도전을 가진 장르임. 어떤 펑크이든 펑크에서는 거의 항상 인체나 인간 정신에 대한 개조나 변경이 나옴.
스팀펑크냐 미디벌펑크냐 사이버펑크냐 이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이버펑크 장르 자체가 사이버네틱스로 인한 인간의 비인간화를 다루는 주제가 강함.
(후기로 갈수록 공각기동대 등 비인간의 인간화를 다루는 부분도 있는데 역시나 인간 존엄의 유일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점은 동일함)
즉 이 시절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봤을 때, "인간의 비인간화"를 다루는 선두주자가 일본이었다는 것임.
그래서 사이버펑크 세계 속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국가이긴 하지만 속으로는 썩을만큼 썩었고 골병도 들만큼 들어 있는 상태가 많고
디스토피아의 머리쯤 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임.
닛폰 스고이!를 외치는 와패니즘이랑은 거리가 좀 많이 멀어.
사펑2020의 스핀오프에서 시작한 카드게임 네트러너의 경우,
과로사(Karoshi)라는 카드가 있기도 하지. ㅎㅎ
"섀도우런"의 경우 화폐 단위로 뉴엔(Nuyen)을 쓰는데, 뭐... 섀도우런은 순수 사펑이라기엔 좀 판타지니까 넘어가고
여튼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미국 문화의 "일본 공포증"도 꺼지기 시작하고, 실제 일본의 모습이 환상을 벗고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니까
사펑 장르에서도 일색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해.
TRPG 사이버펑크 2020에서는 마치 세계를 주름잡을 것 같던 아라사카가 2077쯤 오면 그저그런 대기업 중 하나가 되지.
섀도우런에서도 과거 판에서는 10대 기업 중에 3개가 일본꺼였지만 최근판에는 렌라쿠를 빼면 다 망한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말이야.
가로쉬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