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6월~7월 사이에 있었던 누르하치와 조선의 대명 사은사 신점간의 만남은 아주 잠깐이었고, 덕택에 두 사람은 조선과 건주 사이에 존재하던 첫 번째 문제인 월경 채삼인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 만남 이후 누르하치는 본래의 예정대로 명 조정에 직첩과 추가적인 위소관 칙서를 청원하는 동시에 조선과 건주간 국경에서 발생한 월경 채삼인 살해 사건에 대한 탄원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명 조정 역시도 확실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그로 말미암아 해결이 연기되었다. 누르하치는 결국 이 문제를 향후 얼마간 본인의 마음 속에 담아두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조선-건주 세 세력이 얽힌 사건은 고작 채삼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건주의 외교실무자이자 누르하치의 심복으로서 명나라로부터 도독지휘의 직첩을 받았던 마삼비1가 명나라측에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왜란'에 건주가 명과 조선을 도와 참전할 가망성을 타진한 것이다.
이 사건은 흔히 누르하치의 임진왜란 파병 제안으로 설명되며, 지난 10여년간 급격히 성장한 누르하치가 외부 확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하려 한 것으로 설명된다. 서술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누르하치가 이 당시 상당한 수준의 역량을 갖춘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깊게 파고 들자면 단순히 '누르하치가 영향력 확대를 위해 명나라에 임진왜란에 참전하고자 하는 의사를 타진했다'고 파악할 수 만은 없다. 사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원군을 파병하겠다'고 제안한 것도 아니고 그의 휘하에 있던 실무자 마삼비가 최초로 꺼낸 사안이기도 하며, 꽤 복잡한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해당 사건은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해당 사건은 1592년 음력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 건주의 마삼비가 한참 임진왜란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명나라측에 '지금 조선이 왜노(倭奴)들에게 침탈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는 건주까지 침범을 당할 것입니다. 누르하치 휘하에 마병 3~4만과 보병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한 정예병사들입니다. 조공서 회환했을 때 도독(누르하치)께 이 사안을 말씀드리면, 그 분께서는 충성스럽고 용맹하신 분이니 한겨울 강이 얼 때를 기다리다가 강이 얼면 곧바로 넘어가 왜적들을 소탕하고 공을 황조(명나라)에 바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2
동이고략에서도 비슷한 서술이 등장한다. 동이고략의 서술에 의하면 조공을 바치기 위해 명나라에 들어온 마삼비3가 왜란에 관한 소식을 듣고 '건주는 조선과 맞닿고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충의로우며 궁사 수만명을 휘하에 두고 있으니 왜를 정벌해 보답하고 싶습니다.'라고 발언하였다고 한다.4
명의 병부는 이를 전달받고 요동도사를 통해 재차 조선에 자문을 보냈는데, 조선측은 처음에는 건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이내 이들의 진입을 허가한다면 제 3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건주와는 오랜 원한이 있다'면서 해당 제안을 거부했다. 명나라측은 조선이 거부하자 이 안건을 그대로 덮기로 했다. 건주를 끌어들이면 파병 명군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을 수도 있을 터지만 사실 그들로서도 건주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으며 뭣보다도 당사국인 조선이 거부한다면 이 문제를 계속 밀고 갈 수도 없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건주의 참전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의한 사이 누르하치는 본인이 직접 명나라에 참전 사안에 관하여 타진을 했다.5 아마도 마삼비가 실제로 누르하치에게 해당 사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들은 누르하치가 본인이 직접 참전에 관한 의견을 명나라 병부에 타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나라 병부는 해당 사안이 조선과의 논의로 말미암아 이미 끝난 사안이라고 판단했기에 여기에 대해 답변치 않았고 누르하치 역시 답변이 없자 더 이상 해당 사안을 언급치 않았다. 그로서 해당 문제는 더 이상 재론되지 않고 종결되었다.
해당 사건의 전개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이 사건이 진행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마삼비의 건주군 조선파병 사안에 대한 누르하치 설득 공언 → 2.병부의 요동도사를 통한 조선에 대한 자문 → 3.조선의 거부 의사 표명과 병부의 확인 →4. 마삼비의 조언을 들은 누르하치의 파병 제안 → 5.명나라 병부의 불허 혹은 미응답으로 인한 사건 종식
즉, 처음부터 누르하치가 파병을 제안한 것은 아니며 최초에는 건주의 외교실무자 마삼비가 사안을 꺼냈고 이후 명과 조선간에 건주를 참전시키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사이에 누르하치가 실제로 파병을 제안했으나 회답이 없어 사건이 그대로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문제에 관하여 누르하치가 실제로 파병의 의지가 있었는가는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 당시 누르하치는 여허를 위시로 한 대(對) 건주 연합을 상대하고 있었다. 당시의 건주의 역량으로서는 여허 하나만 상대하는 것도 꽤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주셔리와 너연, 호이파와 하다는 확실하게 여허와 협력하고 있었으며 울라는 이미 이전부터 여허와 동맹에 가까운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이 시기까지는 코르친의 참전까지는 확실시 되지 않았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누르하치와 대건주 연합간 전력차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비록 1592년 당시에는 명나라의 이목이 동쪽에 집중된 참인지라 서로간에 교전을 자제하고 있긴 했으나, 누르하치로서는 여전히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적대세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전력을 쪼개어 그들을 조선에 실지로 파병코자 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이에 관하여서는 여허를 위시로 한 적대동맹들과 대치하고 있던 상황의 누르하치가 상황 타개 방책의 하나로 명나라와의 연대 강화를 모색했고, 때마침 마삼비가 조선에 대한 파병 안건에 관하여 자신에게 진언하자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할 수단으로 해당 문제를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조선이 자신의 파병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음을 파악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조선의 수락 가능성이 적음은 이전에 영평부에서 있었던 신점과의 대화에서 조선이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므로 그것을 기반으로 추론했을 것이고, 명나라의 수락 가능성이 적은 것은 명나라가 자신과 조선 사이에 존재하는 외교적 문제(채삼인 살해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추론했을 것이다. 즉 누르하치는 역설적으로 파병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파병을 제안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파병을 제안하되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병력은 병력대로 아끼는 한 편으로 '충성심'은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누르하치는 파병이 받아들여질 가능성 역시 어느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파병이 받아들여진다면 누르하치는 해당 사안을 뒤늦게 번복하려 했을까? 필자가 생각키에는 만약 파병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실제로 어느 정도나마 군대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에 누르하치는 군대의 파병을 대가로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얻고 채삼인 문제의 해결을 진행하는 동시에 명나라로부터 향후 닥쳐올 여허 및 그 동맹군과의 전쟁에 대응할 무기류를 공여받거나 외교적 지원을 얻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총포류의 도입을 요청할 가능성을 주목할 만 하다. 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를 살펴보자면 누르하치는 이전부터 총포류를 도입하고자 절치부심했는데 이는 여허와 울라등 적대세력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군대는 총포류가 없었음에도 이미 상당히 강력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신진병기인 총포류의 도입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고 오히려 군대의 강화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도입을 추진해야만 했다. 건주기정도기가 쓰인 1596년에도 누르하치는 총포류 도입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는데, 상황이 그 때에 비해 확연히 좋지 않았던 1592년에는 더욱 더 총포류 도입에 적극적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키엔 아마도 이 때 명과 조선으로부터 참전이 받아들여졌다면 당시 여허와의 대립 상황을 고려, 수백에서 1천 단위 병력을 파병하는 대신 총포류와 화약의 공여를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누르하치의 파병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누르하치는 명조로부터 어느 정도 신뢰성을 얻는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누르하치에게 있어 상당한 이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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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명신종실록에는 마합탑길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2.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음력 9월 17일. 물론 애써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서도 누르하치가 이 당시 무려 9만에 달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마삼비의 과장이다.
3.동이고략에서는 마일비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오기이다.
4.모서징, 동이고략 권3 건주. 단, 마삼비가 북경에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북경에서 해당 발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말을 북경에서 처음으로 꺼낸 것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마삼비가 북경에서 해당 발언을 했다면 최소한 두 번째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마삼비가 조공목적으로 북경에 방문하기도 전에 이미 병부가 요동도사를 통해 마삼비의 청병제의에 관한 자문을 조선으로 송부했기 때문이다. 이는향후 하나의 주제로 다루도록 하겠다.
5.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2월 29일
이야.. 처음의 군세랑 비교하면 진짜 엄청 컸구나. 오늘 점심은 여기까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