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씨(全氏)
천안 전씨의 시조(始祖) 전섭(全聶)은 기원전 18년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할 때 마려(馬藜), 오간(烏干),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9사람과 함께 백제 개국의 공을 세우고, 백제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천안 전씨(天安全氏) 시조인 전섭(全聶)의 29세손인 전락(全樂)이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대구 공산전투에서 싸울 때 신숭겸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고,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천안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다방리에 위치한 비암사(碑岩寺)에서 발견된 673년에 제작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기록에 의하면전씨가 백제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한 것이 고증된다. 당시 충남 연기군 일대의 백제 유민 세력의 유력자가 전씨 성을 쓰는 백제 귀족이었다고 나온다. 비암사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신라말 도선(道詵)이 중창했다. 극락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의 정상부분에서 3점의 비상(碑像)이 발견되었는데,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국보 제106호로,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은 보물 제367호로,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은 보물 제368호로 지정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씨(馬氏) - 목천 마씨, 장흥 마씨
마씨는 장흥, 목천 등의 본관이 있다. 정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시조(始祖)로 백제의 개국공신인 마려(馬黎)가 있다. 마려는 마사량현(馬斯良縣)을 식읍으로 받았고 고려 초에 회령(會寧)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회령이 장흥(長興)에 편입됨으로 장흥을 본관으로 하게 된다. 그 후 고려 문종 때 마점중(馬占中)의 장남 마현(馬鉉)이 목천을 본으로 하여 현재의 목천 마씨(木川馬氏)가 되었고, 동생인 마혁인(馬赫仁)이 장흥 마씨(長興馬氏)를 유지했다.
마려의 형 마신은 비류와 온조를 따라가지 않고 고구려에 남아 추모왕(주몽)을 보필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시기 인물로 백제의 오경박사 마정안, 백제의 대사 마무가 언급되는데 이를 보면 백제에 마씨 성을 가진 귀족이 있었음이 검증된다.
전주 류씨
전주 류씨는 조선 후기 성씨백과에 의하면 다른 류씨와는 다르게 백제에서 유래된 토성(土姓)으로 나온다.
전주 류씨에 관한 기록으로 백제 무왕 때 일본(日本)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요청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建築)하러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그 후손은 지금도 사천왕사를 보수(補修)해오면서 사천왕사 인근(隣近)에 살고 있다. 일본의 곤고구미(金剛組)는 578년(백제 위덕왕 34년) 백제인 류중광(柳重光)이 설립하여 2006년까지 존재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었다.
신평 이씨
백제 시대 말기의 사평현(沙平縣) 호족(豪族)이었던 이인수(李仁壽)를 시조로 한다.
담양 이씨
신평 이씨에서 분파된 가문으로 역시 백제 지방 호족의 후손이다.
부여 서씨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특이사항은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 왕족들도 부서씨(扶徐氏) 같은 서씨 성이 들어가는 성씨를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하씨(河氏) - 진주 하씨
1451년(문종 1) 진주 하씨(晋州河氏) 최초의 족보 《경태보(景泰譜)》 서문에 하연(河演)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하(吾河)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타주(陀州)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無傳)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 : 給事)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河僕射)라 했을 뿐 휘(諱)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여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자식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
직산 조씨
직산조씨(稷山趙氏)의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의 개국공신이다. 《직산조씨갑자대동보(稷山趙氏甲子大同譜)》에 의하면 조성은 BC 18년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를 도와 남하하여 위례성(慰禮城)에서 백제를 건국하고,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여 마한(馬韓)을 멸망시킨 후 백제 창업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공을 세워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다가 다시 예성부원군(醴城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가 하남백(河南伯)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이 봉작지인 직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연안 김씨
조선 중기 야사집인 삼한습유기에 백제 유민 후손으로 전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구려 유민, 백제 유민을 동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에게 신라의 성씨인 김씨, 박씨 성을 하사했다고 나오는데 삼한습유기의 이 기록은 삼국사기와 교차검증된다.
국씨(國氏)
국(國)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에서 37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담양이 23명, 기타 14명이다.
국(國)씨는 백제의 8대 귀족 성씨 중 하나였다. 인물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5에 611년(백제 무왕 12)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조공을 한 국지모(國知牟)가 고구려 정벌의 출병 기일을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고려 태조 원년에 원외랑(員外郞)을 지낸 국현(國鉉)이 있었다.
한국 국씨의 집성촌이 구 백제 영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고있고 신라 금석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에 통일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된 백제 귀족 성씨 중에 국씨가 언급되기 때문에 이들은 백제 대성팔족의 후손으로 보임.
진씨(眞氏)
진(眞)씨는 백제 8대 귀족 성씨의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문헌에 따르면 진고도(眞高道)는 백제 근구수왕조 내신좌평(內臣佐平)이다. 진무(眞武)는 백제 아신왕조 병관좌평이다. 진가모(眞嘉謨)는 백제 근초고왕조 병관좌평(兵官佐平)이다. 진정(眞淨)은 백제 근초고왕조 조정좌평(朝廷佐平)으로 삼았다. 진공(眞功)은 신라 신문왕조 대아찬이다. 진복(眞福)은 신라 신문왕조 상대등이다.[9] 진호(眞虎)는 후백제 견훤(甄萱) 때 관료이다.
진(眞)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579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서산 진씨(瑞山 眞氏) 단본이다.
신라 금석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에 통일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된 백제 귀족 성씨 중에 진모씨가 언급되는데 진모씨는 진씨의 복성 표기이다.
목천 상씨
시조 상국진(尙國珍)은 목천호장(木川戶長)을 지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목천상씨갑자대동보(木川尙氏甲子大同譜)』 등에 의하면 그의 선조는 백제 호족으로 왕건(王建)이 고려를 개국할 때 목천(木川) 상왕산(尙王山)에 웅거하면서 여러 차례 백제 재건운동을 벌이자 왕건이 상(象: 코끼리)이라는 축성(畜姓)으로 고치게 하였다. 시조의 묘는 목천 상왕산 아래 간좌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 3일이다.
상국진의 아들 상득유(尙得儒)가 고려 문종(文宗)조에 최충(崔沖)이 세운 구재(九齋)의 대빙재학사(待聘 齋學士)에 선발되어 향역(鄕役)을 면제받으면서 본래의 상(尙)씨로 환원되었다.
부여씨가 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