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5년 누르하치는 코르친과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그것은 누르하치 본인이 먼저 나선 것은 아니었고 코르친 좌익 쪽이 먼저 누르하치에게 접근한 것이었으나 누르하치는 그 기회를 십분 이용하여 코르친 좌익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향후의 공조 가능성을 확인했다. 명나라와 여허의 공조 체제를 부수고 통일 여진 국가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당시 건주 세력 단독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누르하치는 몽골계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그 공조체제를 이겨내려 했고, 그렇기에 코르친의 자신에 대한 접근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서로에게 필요한 재화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 이전으로 보이는 시기에 누르하치는 사법 심리에 관한 부분을 대폭 개혁했는데 기존의 5 암반 10 자르구치 체제에서 8 암반 40 바이더시 체제로 대폭 심사원을 증원했다. 이는 건주의 규모가 이전에 비해 훨씬 커진 상황에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팔기 체제의 확립과 연동하여 법제를 개혁, 국가 및 사법제도 운용을 보다 체계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심리 관원들의 인원수를 보자면 각 구사에서 1명의 암반이, 각 잘란에서 1 명의 바이더시가 차출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통해 이 시기에 팔기체제가 확립되었으며 그것이 행정 및 사법체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15년 코르친과의 예물 교환 이후 누르하치는 다시금 원정을 준비한다. 물론 명나라와 여허간의 공조체제가 여전히 강했던 탓에 여허에 대한 원정은 진행치 못했고, 다만 동해 여진 지역을 공격하여 인구와 노획물을 확보코자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체급을 불리기 위해서, 이미 울라를 병합하여 동해 여진 쟁탈전에서 완전히 해서 여진 계통 세력을 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동해 여진에 대한 원정을 계속 진행했다.
어허 쿠런에 대한 원정을 지휘한 인물은 확실치 않다. 다만 기존의 오대신, 즉슨 안피양구, 호호리, 피옹돈, 어이두, 후르한중 한 명 혹은 복수의 인원이 해당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유추는 가능하다. 해당 오대신들은 지금껏 동해 여진 원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덕택에 경험이 많이 쌓인 이들이었고, 원정을 선도하기에 혹은 부장으로서 주장-예컨대 누르하치의 조카나 자식, 즉슨 버일러 혹은 타이지-를 보좌하기에 합리적인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원정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 이루어진 동해여진 원정 역시 오대신 출신의 장수들이 참여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어허 쿠런 원정에도 이들이 참전했을 개연성이 크다. 다만 팔기통지나 청사고 열전등에 어허 쿠런 원정과 관련한 기사가 없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지휘관이 불확실한 것과는 별개로, 2천 가량의 병사를 편성하여 파견한 것은 확실하다. 이전의 동해 여진 원정과 비교하여 자쿠타 원정과 비슷한 규모로 진행된 원정이었다. 이는 어허 쿠런이 자쿠타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요새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
군대는 음력 11월 허투 알라를 출병하여 음력 12월 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12월 20일에 어허 쿠런 인근을 습격하였다. 그 뒤에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구나카 쿠런을 공격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진했다.2 구나카 쿠런에 먼저 도착한 4개 구사의 군대가 적군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적군은 항복치 않았다. 다음 날 12월 21일 다른 길로 갈라져 온 군대가 합류하여 저항 세력에 항복을 재차 요구하자 저항 세력은 그때서야 항복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그들은 총 3일여간 항복하지 않았다. 건주군은 구나카 쿠런의 저항 세력이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여기고 총전력의 4분의 3, 즉슨 6개 구사의 병력을 통해 공략 대상인 성을 공격했다.
건주군을 적대하던 구나카 쿠런의 거점 세력은 상당히 강력한 수성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삼중의 해자와 목책을 보유하고 있었던, 동해 여진으로서는 독보적인 방어체제를 가지고 있던 세력이었다. 하지만 당시 건주군은 동해 여진 공략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경험이 쌓여 있었다. 그들은 방어군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성을 함락했으며 전투에서 5백의 적 병사를 살해했다.
이후 성에서는 생존한 군병 3백이 빠져나왔는데, 이들 역시 원정 건주군에서 차출된 추격군에 의해 섬멸당했다. 아마도 이 때 선발된 건주군 추격부대는 전투에 참여치 않은 예비대 2개 구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의 섬멸로 말미암아 해당 원정의 전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건주군은 해당 원정에서 '올지'31만을 얻었으며,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이들을 5백여호의 가호를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을 허투 알라로 이송했다.4 이 노획 및 이송 기록은 구나카 쿠런의 공략 뒤에 기록되어 있으나 구나카 쿠런을 함락한 뒤에 얻은 노획뿐만이 아니라 원정의 당초 목표였던 어허 쿠런을 습격함으로서 얻은 노획물과 세거민들 역시도 도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주의 후신인 후금은 이 때 어허 쿠런에 대한 정벌 명분을 약소하게 기록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어허 쿠런이 주변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건주에 대해 도발을 하려 했다고 한다.5 하지만 사실 어허 쿠런이 이렇게 건주와의 경쟁심을 들어냈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저 어허 쿠런에 대한 장벌 명분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단지 주변에 대해 영향력을 떨치는 것을 이런 식으로 곡해 기록 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다만 어허 쿠런에 대해서는 바로 공격을 가한 반면, 그에 이어 공격대상으로 삼은 구나카 쿠런에 대해서는 바로 공격치 않고 약 3일여간 항복의 말미를 준 것으로 보건대 어허 쿠런과 건주간에는 어느 정도 갈등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구나카 쿠런의 대비태세가 튼튼했기에 괜히 전투피해를 늘리고 싶지 않아서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항복을 요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 원정을 마지막으로 건주의 동해 여진 원정은 끝났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는 '건주'가 아닌 '후금' 으로서의, '건주군'이 아닌 '후금군'으로서의 원정이 진행되었다.
1.자쿠타 원정 당시 2천의 병력을 파병한 것은 비단 자쿠타가 강력한 요새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울라가 자쿠타 문제에 개입할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둔 것으로 판단된다. 이전의 자쿠타 공략전과 관련한 글(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7041299) 참고
2.만주실록을 살펴보자면 어허 쿠런과 구나카 쿠런이 동일한 세력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만주실록 을묘년 음력 11월~12월). 하지만 만문노당을 살펴보면 어허 쿠런과 구나카 쿠런은 구별되는 세력으로 판단된다. 어쩌면 구나카 쿠런은 어허 쿠런 세력내에 소속된 하나의 성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3.노획
4.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11월~12월 기사 참조
5.만문노당 앞과 동일
이때부터ㅜ자기들을 후금이라 부르기 시작한거?
정확히 언제부터 아이신 구룬(금국)의 국호를 공식화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 호칭의 공식적 사용시기와는 별개로, 청조와 현대의 다수의 학자들은 1616년 누르하치가 겅기연 한에 즉위한 시기를 바로 후금의 공식적 성립시기로 판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