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x 라는 사람 유튜브에서 마속에 대해 다루는걸 봤는데 그럴싸 하네
실제 시형을 보고 당시 정치상황을 보니 위연 안쓴것도 그렇고..
음음..
위연을 안쓴거는 당식 형주 vs 촉 관료들의 정치 싸움
성에서 주둔 안하고 움직인 것은 당시 백성들이 위편에 가깝기 때문에 양각이 잡힐까봐
물길이 아닌 고지대로 올라간 것은 형주 사람이다보니 비가 내릴거라 생각 + 물길이 있는 곳은 평지나 다름 없는 동산이었음
등등이 겹쳐서 그런 것이 아니냐 라는 추론인데 마속은 생각보다 지략은 있어도 초보 지휘관 이었기에 군략은 부족했고
최대한 머리를 써서 장합의 기병을 막아서려다가 생긴 일이다 정도인데
일리 있어 보임
어쨌든 중요한 요충지에 초보지휘관을 쓴 제갈량의 인선실패
어쨌든 중요한 요충지에 초보지휘관을 쓴 제갈량의 인선실패
하지만 탈영은 선넘었죠?
1. 위연은 형주 사람이고 마속도 형주 사람이고 제갈량도 형주 사람임. 2. 당시 량주의 기본 마인드는 위보다는 촉에 가까웠음. 북벌 당시에는 이미 죽었었던 "마초"도 있었는데다 조조하고는 일단 대판 싸운 사이고, 애초에 중앙 정부(후한)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했음. 실제 북벌 당시 일제히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3. 애초에 마속은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참군으로서 큰 공을 세운 바가 있어서 북벌 지휘관으로 발탁된 것이었고, 단순 지역 풍습을 모르느니, 비가 내리리라 생각했느니, 하는건 정말 추측의 레벨임. 애초에 빗물 갖고 커버가 될 군사규모가 아님..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將士)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 - 왕평전 - 제갈량(諸葛亮)이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228년의 일) 장합에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馬謖)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군(安定郡)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 장합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