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2년 9월, 누르하치는 3만의 대군을 몰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거대 여진 세력 울라를 향해 칼을 빼들었다. 누르하치의 아들 중 홍타이지와 망굴타이가 이 때에 누르하치와 함께 했고, 다이샨-그리고 누르하치의 조카 중 제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민은 허투 알라에서 건주 본토를 방어했다. 이 시기 누르하치의 장남 추영은 근신 조치 중이었기에 따로 임무가 없었으며,추영은 이에 불만을 품고 누르하치를 향한 역심을 품기도 했다.
이 때 누르하치가 울라의 부잔타이를 향해 선전한 침공 명분과 부잔타이의 반박,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르하치의 침공 명분 |
개요 |
부잔타이의 반박 |
비고 |
누르하치 치하의 후르하계 동해 여진 부락을 부잔타이가 두 차례 습격 |
동해 여진에 대한 건주의 영향력 확대 시도와 동해 여진에 대한 부잔타이의 영향력 확대 시도가 충돌한 영향. |
|
부잔타이가 반박치 못한 주장. 혹은 반박할 수 없던 주장 |
부잔타이가 여허의 전 버일러 부자이의 딸이자 현 버일러 부양구의 누이(여허의 노녀)와 혼인코자 함 |
울라측의 여허와의 정략혼을 매개로 한 울라-여허 동맹 시도와 그를 통한 대건주 연합전선 형성 시도 |
부양구의 누이와 혼인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음. 누군가의 이간질일 것. |
부양구의 누이는 1597년 누르하치와 혼담이 오갔던 인물이었지만 여허측의 돌연 취소로 말미암아 혼담이 파토난 인물. 누르하치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권리가 유효함을 내세우며 부잔타이를 힐난하고 공격명분으로 삼음. 부잔타이는 부정하였으나 2차 울라 침공전 전 직전의 행보와 이후 여허로 망명했을 당시의 서술, 후일의 누르하치의 표현을 보면 혼인 시도 자체는 사실로 보임. |
누르하치의 조카딸이자 부잔타이의 부인인 온저에 대한, 부잔타이의 학대 (명적살로 온저를 쏨) |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가정할 시 울라내 누르하치 혈족에 대한 배제의도 및 부양구의 누이(여허의 노녀)를 본처로 삼기 위한 발판 작업으로 생각 됨. 또한 누르하치의 조카딸인 온저에 대한 물리적인 학대를 통하여 누르하치에 대해 간접적으로 분풀이를 했을 가능성 역시도 상존. |
온저를 명적살로 쏜 적이 없음. 누군가의 이간질일 것. |
후르하에 대한 습격, 부양구의 누이와의 혼인 시도와는 다르게 실제로 부잔타이가 온저에게 명적살을 쏘며 학대하였는지에 대하여서는 의문. |
*이상 만문노당 임자년 음력 9월 22일~10월,
누르하치는 1차 울라 침공전에서 상당한 전과를 얻었으나 결국 부잔타이의 대응에 막혀 울라 본도를 함락하는 성과는 이루지 못했으며 적당한 협상 아래에서 철군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나 부잔타이나 모두 이 전쟁이 불편한 협의 아래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듬해, 누르하치는 동일한 규모의 대군을 이끌고 2차 울라 침공을 감행한다.
누르하치의 1차 울라 침공전의 전개는
오늘도... 아무도 댓글을 안다는군...
에잇☆
꾸준글 ㄷㄷ 이런 덕후 사이트에서 역사를 이렇게나 깊게 파는 사람은 드문데 그 끈기에 탄복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