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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고려사』『고려사절요』, 그리고 박용운 선생님의 『고려시대사』를 기반으로 쓰는 개론 이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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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후고구려, 즉 태봉(마진)의 국왕이었던 궁예의 폭정과 정치 실패로 인해
궁예의 부하 호족이었던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 후고구려가 멸망,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이 당시 고려의 세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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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직후, 나름대로 후고구려 내에서 큰 지지를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인사가 완전히 왕건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왕건 즉위 직후에 일어난 두 반란,
환선길의 난, 이흔암의 난.
이 두 사건이 오늘 다룰 사건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왕건의 고려 건국 직후 반란을 일으킨 주요 인사들인데요,
시대 순으로 한 사람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환선길이 되겠습니다.
환선길의 난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 처가 일러 말하길, “당신은 재주와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들이 복종하며 큰 공도 또한 세웠는데, 권력은 다른 사람에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을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환선길도 마음으로 그렇다고 여기고, 드디어 병사들을 몰래 집결해 두었다가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사실 환선길은 태조 왕건의 즉위를 지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출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무튼 후고구려 내에서 태조 왕건의 심복이었던 것 만은 분명해보입니다.
그렇지만 왕건의 즉위 후 겨우 4일만에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박용운 선생님의 『고려시대사』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태조의 정권이 상당히 불안했던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환선길의 난은 『고려사』에 따르면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난 걸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 환선길이 부하 50여 인과 함께 무장하고는 동쪽 곁채에서 안뜰로 돌입하여 곧장 〈태조를〉 해치려 하였다. 태조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큰 소리로 질책하며 말하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天命)이 이미 정하여졌거늘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환선길이 태조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매복한 군사가 있다고 여겨 부하들과 함께 달아나니, 〈태조의〉 호위병들이 구정(毬庭)까지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환향식이 뒤에 이르러 일이 실패했음을 알고 역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추적하여 죽였다.
그러니까 태조의 사자후에 쫓겨났다... 는 농담이고.
아마 환선길 본인 역시 난의 지지세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걸로 추측됩니다.
지금 뒤에서 보고 계시는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고려 초기의 호족 연합 정권 세력이라는 특성 상, 그 시점에는 누가 반란을 일으켜도 왕건 이상의 지지를 받기는 힘들었을 것, 이라는 것이 현재 학계의 정설입니다.
다음은 이흔암의 난입니다. 이흔암도 『고려사』반역 열전에 환선길 다음, 2등으로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2등이죠.
이흔암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 이흔암(伊昕巖)은 궁술과 기마술을 일삼았으나 다른 재주와 식견은 없었으며 이득 있는 일이라면 재빨리 챙기는 자였다.
이렇듯 평 자체가 좋지 않았던 걸로 봐서, 이흔암 본인은 그렇게까지 태조 세력 내에서 위상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반란을 모의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선 능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걸로도 볼 수 있지만요.
그런데 이 이흔암의 난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서술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 이흔암의 처 환씨(桓氏)가 변소에 이르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소변을 마치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길, “남편의 일이 제대로 잘 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구나.”라고 하고 들어갔다. 내인이 정황을 보고하니, 마침내 〈이흔암을〉 하옥시키고 모두 자백을 받아내었다.
이렇게 이흔암의 처로 인해서 반란 모의가 발각되었다...는 서술입니다만,
서술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고려사의 특성 상, 아마 이건 이흔암의 처가 밀고를 했거나, 혹은 애초에 이미 발각되어 있던 사건일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기록이 사실이라면 유게이들은 커플을 멀리하고 솔로를 해야합니다. 그래야 반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근데 저는 커플입니다.
그러니까 반란 안 일으키게요.
아무튼 이 두 사건은 고려 초기의 정치 형태 분석의 중요 자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고려 초기는 '중앙집권'이 아니라 '호족 연합 정권'이었다는 거죠.
잠시 예전 지도를 한번 가져와 보겠습니다.
이처럼 나말여초 시기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호족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 호족들은 유력 세력에 귀부했는데, 이 귀부에 대해서 최근 견해는 '명목상 귀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각자 독자성을 유지하되 삼국 통일 전쟁에서 각 국가를 지원하는 것으로 세력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글은, 아마 이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주제로 다루게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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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태조 즉위 초반부 정국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다뤘습니다.
다음 글은 앞서 말한 대로, '고려 초기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을 거 생겼다!
태조 세력 내에서만 반란이 일어난건 나머지 호족(성주, 장군)세력은 반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을정도로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었다고 보는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왕건을 완전히 지지하고 있거나 역으로 신라, 후백제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고려를 지지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혹은 주요 기록으로 남지 않을 정도로 소소한 반란들 정도는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기 따로 쓰지 않은 '임춘길'이라는 사람의 난이 있는데, 이 사람은 따로 열전이 생기지도 않고 환선길 편에 같이 수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이하의 반란들도 있었을 수 있다는거죠.
애초에 『고려사』자체가 조선대에 편찬된 거라 소규모 반란들은 기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앗 제일 중요한건데 까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