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정부는 인민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범적인 살해 방법의 실연"까지 벌였으며, 몇몇 경우에는 경찰이 직접 나서서 살해를 감독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잔인한 살해를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광시 성의 여러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는 만행까지 발생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지역이 우쉬안 현이었으며, 이곳은 모택동 사망 후 실시된 공식적인 조사(그러나 1993년에 즉각 중단되었으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제지당했다) 결과 76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인육을 먹는 관행은 일반적으로 마오주의자들이 벌이는 "규탄대회"의 단골 행사로 시작되었다. 규탄대회가 끝나자마자 희생자들을 살해해서는 그들의 시신을 부위별- 심장, 간, 때로는 성기-로 잘라냈다. 그러나 희생자들이 미처 숨을 거두기 전에 잘라내는 경우도 흔했다.
이렇게 잘라낸 부위를 현장에서 먹을 수 있도록 조리했으며, 이런 행사를 당시에는 "인육 잔치"라고 불렀다. 광시 성은 중국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끔찍한 인육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86세의 한 농부는 밝은 대낮에 어떤 소년의 가슴을 칼로 찔렀다. 그 소년의 유일한 죄목은 과거 지주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농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모택동의 어록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훗날 부정 폭로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소, 내가 그 아이를 죽였소. 내가 죽인 사람은 적이란 말이오. 하,하,하! 나는 혁명을 수행한 것이고 내 가슴 속은 붉단 말이오! 마오쩌둥 주석이 이렇게 말했소.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죽이느냐,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죽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당신이 죽으면 내가 사는 것이 바로 계급투쟁이다!'"
1968년에는 중국의 모든 지역에서 국가가 후원하는 살육이 극에 달했다. 그해에는 "계급분류"라고 부르는 대규모 운동이 극성을 부렸다. 이 운동의 목적은 인민들 속에 섞여있는 "계급의 적들"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여 그들을 처형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문화혁명 전부터 낙인찍혔던 사람들과 혁명 과정에서 색출된 모든 희생자들을 끌어내어 다시 박해를 가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는 모든 성인들의 경력과 행적을 면밀히 조사하고 모든 미심쩍은 부분들을 수사하여 새로운 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추방될 사람들에 대한 낙인의 종류가 23가지에 달했으며,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수는 수천만 명에 달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았다.
한 목격자는 안휘성의 신임 성장으로 부임한 육군 장성이 희생자들에 대한 처형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경찰이 자신에게 제출한 "반혁명분자들"의 명단을 흥미없다는 식으로 툭툭 치다가 때로는 멈추기도 하더니 전형적인 관리의 억양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귀에 거슬리는 비음조의 톤이 한 문장의 끝까지 이어져 듣기가 지루했다)
"이 사람은 아직도 구금하고 있나? 죽이는 것이 좋겠군.", "이 사람은 어떤가? 음, 이 여자도 없애." 그런 다음 그는 인근 성들이 처형하기로 계획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감숙성에서는 이달에 몇 명이나 죽였는가? 절강성은?" 부하들로부터 숫자를 보고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 성의 평균치로 한다." 인민들은 이런 식으로 처형당했다.
ㅅㅂ 무슨 공포게임이냐... 미춋네
그 대머리새끼 업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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