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때까지가 후백제가 왕건에게 금성을 빼앗기기 전의 영토임.
그리고 이게 왕건이 후백제로부터 나주를 빼앗은 이후이고. 이 때까지만 해도 장화왕후 오씨의 일가는 어느정도 이상의 발언권도 있었고
가문의 세력도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음. 게다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만 해도 오씨가 낳은 왕무가 적장자였기 때문에.
하지만 견훤이 왕건을 상대로 엄청나게 기세를 올리면서 나주는 다시 후백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고
이게 바로 장화왕후 오씨 일가의 세력이 엄청나게 쪼그라들고 발언권이 약해지는 단초가 되어버리고 말았음.
장화왕후 오씨와 그의 아버지인 오다련은 자신의 확실한 근거지인 나주를 잃은 호족 가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왕건이 아들인 왕무를 확실한 적장자로 인정해주고 그의 후견인으로 박술희까지 붙여주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가 없었지.
그 결과, 혜종이 수없이 많은 자객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위협에 시달리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원인이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