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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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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PHILIS가 더더욱 강한 출력으로 카를이 가지고 있던 심상을 퍼트리면서 사람들은 이제 생각하는 방향조차 카를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그와 다른 사람은 유럽 어디에서도 더 이상 찾기 힘들었다.
SIPHILIS로 인해 자신과 똑 같은 생각을 하고 똑 같은 답만을 내어놓는 자들 속에서 카를은 처음에는 안도감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하고 혼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 때 그는 프리드리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오랜 친구였다. 카를이 본 것과 같은 풍경을 보아왔고, 카를과 제니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제니에 대해서도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프리드리히는 카를이 퍼트린 SIPHILIS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아직 자기 자신 그대로일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발걸음을 내딛었던 1843년 이후 약 15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다시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방향에서도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카를에게 프리드리히는, 이제 제니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카를과 프리드리히는 그 날부터 여러 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앞으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닷새째 되는 날 결국 카를은 결단을 내렸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만큼 달려온 이상 멈출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
카를은 열심히 달려왔지만 제니를 되찾지 못했다. 그녀의 육신은 그의 곁에 있지만 이제는 영원히 그녀를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가 발길을 멈춘다면, 언젠가 SIPHILIS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제니는 카를이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희대의 악녀로 밖에 기억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제니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제니가 진정한 여신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최대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유럽 전역에서 의사와 과학자들을 데려와 SIPHILIS를 이용해 노화를 늦추고 최대한 수명을 늘일 수 있는 연구만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그와 동시에 카를은 발걸음을 더 넓혀 유럽에만 머무르지 않기로 하였다.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국가들과 같이 수시로 오갈 수 없기에 그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SIPHILIS를 이용해 카를은 먼저 초소형 과흥분상태 발생 기계(Over-Pleased state Ingenerating Undersize Machine) – OPIUM을 개발하였다(아래의 전쟁은 초소형 과흥분상태 발생 기계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이유로 OPIUM 전쟁이라고 명명되었다).
이를 탑재한 대영제국 국적 선박 중 하나인 애로호가 광저우를 인근 해역에 잠시 정박하였을 때 애로호를 해적선으로 의심한 청나라 수군으로부터 수색을 받게 되었고, 아편 전쟁에서 패배했던 아픈 기억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대영제국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청나라 수군은 OPIUM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흥분하여 애로호에 걸려 있던 대영제국 국기를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이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카를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생각은 없었다. OPIUM 때문에 흥분한 청나라 관료가 외교적으로 결례인 행동을 하면 이를 핑계로 청나라 실권자를 불러들이고 다시 그에 대한 답방으로 자신이 청나라를 방문하여 황제부터 시작하여 수뇌부에 SIPHILIS의 영향력을 퍼트린 후 이를 바탕으로 다시 온 나라에 SIPHILIS를 퍼트리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영제국 신민들의 반응이 카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신민들에게 제니는 곧 대영제국이었고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을 찢은 것은 제니를 욕되게 하는 신성 모독이었다. 분노로 끓어오른 신민들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다. SIPHILIS의 영향이 역류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신민들의 분노에 휩쓸렸던 것일까? 어느 것이었든 간에 카를조차도 분노에 휩싸여 대영제국과 그 제후국 프랑스의 해군을 소집하여 청나라를 응징하도록 명령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예상 이상으로 무력했다. 그들은 마치 지난 아편 전쟁에서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고전적인 전술로 나온 반면, 대영제국군은 SIPHILIS 덕에 총기류의 수준이 급격히 발전하였기에 20여년 전의 아편전쟁 때와 비교하더라도 전술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특히 이제 갓 약관을 넘은 젊은 청년 맥심이 만들어낸 기관총 때문에 청나라 군대는 대영제국군에 다가가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를 본 청나라 군대는 후열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대영제국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난징에 입성할 수 있었다.
대영제국도 카를의 운명을 닮아갔던 것인지,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진행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대영제국 군의 위엄 앞에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버리자,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으나 점차 힘을 잃어가던 홍수전의 무리들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고자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태평천국의 무리들은 홍수전이 야훼의 둘째 아들로 예수의 동생이자 제2의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기에 같은 기독교 신자이자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대영제국군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일 것이라 믿었던 것이리라.
쓸데없이 전선을 확대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성내로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대영제국군은 SIPHILIS에 의해 제니를 신적으로 숭배하고 있었기에 이미 기독교도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처음부터 태평천국의 무리들도 기독교도라고 볼 수는 없었다. 태평천국의 무리들과 대영제국군은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서 위화감을 느껴 사소한 충돌이 이어진 끝에 태평천국의 무리들이 대영제국군을 습격하기에 이른다.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데에다 병력의 수에서 크게 열위에 놓여 있었던 대영제국군은 기관총과 같은 발달된 무기 체계를 바탕으로 거점을 세우고 살아남은 병력을 모아 가까스로 난징성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흩어졌던 군사들을 다시 모아 난징을 탈환하려 진군하던 청나라의 이홍장의 군대와 마주쳤고, 이번 상대는 태평천국군과 같이 제대로 군사교육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 아니라 정규군이었기에 대영제국군은 참패를 면할 수 없었다. 카를이 이끄는 대영제국이 OPIUM을 이용한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던 것이다.
카를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SIPHILIS 효과를 수뇌부부터 퍼트리고 인프라를 구축하여 천천히 국가를 복속시키는 방법은 택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카를이 믿을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꿈을 그릴 수 있는 프리드리히가 두번째 대청 정벌군은 이끌었다.
대청 정벌군은 대량으로 제조한 SIPHILIS를 들고 청나라로 향했기에 지난 번과 같은 실패는 없었다. 발전된 총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청나라 군대는 대영제국군을 만나는 족족 대영제국에 귀순해왔다. 프리드리히의 대청 정벌군은 거침없이 청나라 군대를 흡수해가며 베이징에 입성했으며, 프리드리히는 곧바로 자금성으로 향해 함풍제에게 SIPHILIS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카를이 정복지에서 해왔던 것처럼 청나라 내에, 그리고 그 주변 국가에까지 인프라를 퍼트리는 데에 힘썼다.
그 동안 카를은 동부 유럽과 러시아를 지나고 사마르칸트에서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유럽과 청나라 간의 S.S.E.X가 가능하게끔 하는 기간시설을 구축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거대한 공사였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카를은 SIPHILIS로 인해 오로지 그가 정한 바에 따라 충실히 정해진 일만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단, 1861년, 단 2년이라는 기간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이 서로 연결되었다.
더 이상은 눈치볼 것도 없었다. 카를과 프리드리히의 지휘 아래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관통하는 S.S.E.X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하여 남과 북으로SIPHILIS를 퍼트려나갔다. 이렇게 1865년경에는 이미 유라시아 대륙 전부와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나라들까지 모두 대영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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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과 프리드리히는 이미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에만 그칠 생각이 아니었기에 다른 대륙에도 신호를 보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실크로드 인프라가 완성된 직후인 1961년 무렵 미 대륙과 영국을 잇는 해저케이블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안그래도 미국은 대영제국이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정복해나가는 데에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미국측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특히 청나라를 정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한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로서 대영제국의 확장에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반영 감정이 급격히 고조되었고, 외부의 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게 된 덕에 남북부 간의 노예제로 인한 갈등은 조용히 잦아들었고 덕분에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1960년 미국 대선에서 에이브러험 링컨을 누르고 재임에 성공하였다. 뷰캐넌 대통령은 이런 배경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에 대영제국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을 무시할 수 없었고, 이에 대영제국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개설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카를도 어찌할 수 없었다. 기존의 S.S.E.X를 이용하는 방법만으로는 멀리 떨어진 신대륙에까지 SIPHILIS를 퍼트리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제니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멈출 수도 없었다. 먼저 가장 급하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나이.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0여년 정도, 그것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가장 먼저 우수한 두뇌를 가진 인재들을 유인한 후 SIPHILIS를 이용해 연구에만 전념하게 하였으며, 가끔 여신의 뜻이라는 거짓말로 그들간의 교배 – 사람에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분명 카를이 한 것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 를 통해 더 우수한 두뇌를 가진 이들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또한, 두뇌를 활용하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진 이들을 꾀어내 SIPHILIS로 순수한 정신상태로 만들고서는 그들을 생명 연장 연구를 위한 실험체로 사용하였다. 이미 카를의 마음 속에서 그와 프리드리히를 제외한 모든 인류는 제니를 온전한 여신으로 만들기 위한 희생 제물에 불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인재들이 연구에 전념하더라도 기술 발전의 속도에는 한계가 있는 법, 1860년대 중반부터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의 모든 인재들이 과학기술과 생명연장을 위해 모든 힘을 다했음에도 빠른 시간 내에 생명 연장의 꿈을 이룰 수는 없었다. 20여년의 연구 끝에 드디어 카를의 연구진은 유전적 내구성 증강 수술(Augmenting Inherited Durability Surgery) - AIDS 시술을 개발해냈다.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인간 신체를 한계까지 강화하여 150세까지 생존을 기대할 수 있는 시술이었다. 당시의 평균수명은 65세에 불과하였기에 두 배 이상의 수명, 남은 시간만 하더라도 약 80여년, 충분할 지는 모르겠으나 카를에게 일단은 한참 더 달려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 3월 14일, 카를은 AIDS 시술을 받고 보너스의 삶을 시작하였다.
AIDS 시술의 완성에 이어 1886년경 하인리히 헤르츠라는 젊은 과학자가 무선통신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떠올렸다. 더 이상은 케이블 연결에 얽매일 필요 없이, 직접 연결되지 않고도 SIPHILIS를 퍼트릴 방법이 생긴 것이다. 다만, 실제로 무선통신을 미 대륙까지 퍼트릴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기까지는 다소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89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실용적이라고 볼 수 있는 무선통신 기술이 개발되었고 우선은 유라시아 대륙 내에서부터 천천히 기술을 적용하여 나갔다. 카를은 SIPHILIS로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말처럼 이용하여 자신의 꿈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음이 눈에 보였음에도 카를은 잡은 고삐를 놓지 않았다. 사람들의 두뇌와 신체를 분석하고 등급을 나누어 각자에게 가장 효율적인 업무를 부여했다. 모두가 카를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다른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카를은 사회의 모든 기술적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OPIUM 전쟁에서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군사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소중한 장기말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도록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고자 대륙을 넘나들 수 있는 추진체 – 로켓의 개발에 집중했다. 그동안 카를이 애써온 보람이 있었는지, 누적되어 온 기술발전의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로켓 기술이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카를이 만으로 100세가 되는 해에 드디어 대양을 넘어서 공격할 수 있는 로켓 기술이 완성되었다.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