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6년 음력 12월 코르친의 하탄 바투루 타이지가 후금을 방문한 데에 이어 1617년 음력 1월 그의 부친 밍간 역시도 후금을 방문했다. 후금의 한 누르하치는 버일러들과 암반들, 자신의 부인들까지 대동하여 밍간을 맞이했고 그를 극진히 예우하였다. 누르하치의 밍간에 대한 예우는 기본적으로 코르친과의 친선 관계 구축 및 타 몽골 세력에 대한 선전효과 확보를 위함으로 해석된다.
이 때 양 세력은 서로간에 예물을 교환하는 형태로 상호간에 필요한 물자를 나누기도 했다. 밍간은 주로 갑옷과 옷감을 받았으며, 아하 계층으로 추정되는 백성 역시도 지원받았다. 후금의 경우 소와 말, 낙타와 같은 주요 가축들을 받고 다른 생필물자 역시도 지급받았다. 이 예물 교환은 양측 모두에게 이득으로 작용했다. 예물 교환이 끝난 뒤 밍간은 본인의 영토로 돌아갔고, 누르하치는 그런 밍간을 다시 극진히 전송하여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외교적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대(對)몽골계 세력에 대한 외교 행사가 있던 시기와 거의 동시기에 누르하치는 다시 군사적 행동을 시작했다. 물론 명나라 혹은 여허와 같은, 누르하치로서 상당한 각오를 머금어야 할 상대를 인접국과의 외교적 소통 없이 공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애매한 시기에 늘상 그래왔듯, 누르하치의 당시 목표는 동해 여진이었다.
누르하치는 군대를 동해 여진 세거 지역으로 파병하여 그 곳의 세력들을 공략케 했다. 이 때의 후금의 동방 파견병력은 무척이나 적었는데, 고작해야 4백여명이었다.1 이 4백여명이라는 숫자에 시종병인 쿠툴러가 포함이 된 것인지, 아니면 팔기 병사들만을 차출하여 정예들로만 구성한 것인지는 알 방도가 없으나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아마도 팔기 병사들만으로 구성된 정예부대였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본다.
안그래도 소수의 병력을 파견하는데 여기에 일부는 팔기, 일부는 쿠툴러라는 부대 편성으로 원정부대의 위험부담을 늘렸을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마침 숫자 역시 후금의 종군체계에 따라 당시 후금에 존재한 것으로 유추되는 각 니루당 2명씩의 팔기병을 차출했다고 하면 딱 맞아 떨어지는 숫자였다. 물론 쿠툴러를 기록상의 원정군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거나 일반적인 쿠툴러 징병 사례보다 비율을 낮추어 쿠툴러를 차출했을 가능성 역시 간과할 수는 없으므로 이 때 원정에 종군한 모두가 팔기의 정규병력이었다는 추론을 완전히 맹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2
해당 동해 여진 출병의 목적은 기존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동해 여진 원정과는 다소 달랐던 것으로 살펴진다. 첫째로, 시기상 보지리의 난을 토벌하러 간 안피양구, 후르한이 복귀한 지 약 2달 조금 더 되는 기간만에 이루어진 원정이었다. 대규모 이반 세력 토벌이 있은지 고작 몇 달 만에 군대를 출병시켰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해당 토벌과 깊은 관련이 있는 원정임을 의심케 한다.
둘째로, 투입병력의 규모가 기존의 원정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무척이나 적었다. 기존의 동해 여진 원정들은 못해도 5백의 병력이 투입되었는데 그마저도 고작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3 게다가 그 원정은 단기 원정인 동시에 공격 대상 범위가 좁은 원정이었다. 다른 원정들 대부분은 아무리 못해도 1천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며, 대규모의 원정의 경우 2천까지 투입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의 원정의 경우 그 시공간적 범위가 무척이나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백여명에 불과한 군대가 투입되었다.
팔기의 병사들이 아무리 강하다곤 하지만 그 정도의 소규모 병력으로 강력한 동해 여진 세력들을 토벌하려 할 경우 자칫 역으로 큰 타격을 입고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오랜 전쟁경험을 갖춘 누르하치가 그러한 적은 병력을 통한 원정의 위험성을 모를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인 동해 여진 원정과는 달랐다는 셋째 근거이다. 누르하치는 공격 목표로 '세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부락들'이 아니라 '항복치 않고 동해 연안의 흩어져 있는 세력들'을 공격 대상으로 지목했다.4
여기서 말하는 항복치 않고 흩어져 있는 이들이란 동해 연안에 세거하면서 아직까지 후금에게 복속되지 않은 세력을 모두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안피양구와 후르한의 보지리의 난 진압 과정에서 후금군으로부터 벗어나는데에 성공한 도주 세력들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6월 기사에서 도주자들이 언급되는데, 이는 아마도 보지리의 난 진압에서 도망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이러한 정황을 보건대 해당 원정은 기존과 같은 일반적인 동해 여진 세거 세력에 대한 공격전이 아니라, 지난해에 존재했던 '보지리의 난'의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한 추정일 것 같다. 안피양구와 후르한의 경우 보지리의 난에 참여한 대부분의 세력을 복속시키는데에 성공했지만 반란 지도자 보지리와 일부 도주 군민들을 잡지 못한 채로 40여명의 반란 참여 암반(노오로, 시라힌, 인다훈 타쿠라라 출신)들과 함께 귀환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로부터 3개월 뒤에 있었던 소규모 출병은 바로 이 뒷마무리를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1.만주실록 정사년
2.한편 해당 원정의 출병 시기에 관하여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해당 이야기는 따로 서술.
3.1614년 음력 12월 시린, 야란 공격, 만문노당 갑인년 음력 11~12월
4.만문노당 정사년, dergi mederi jakarame tefi daharakv samsifi bisire gu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