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는 [소요유]의 두 번째 이야기다. 대붕이 구만리 창공을 올라 남명(南冥)을 향해 비행하는데, 이를 본 메추라기가 무엇 때문에 저런 부자유스러움을 감행하는지 모르겠다며 비웃는 것이 내용의 골자다.
...매미와 메추리가 붕새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힘껏 날아올라도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에 머문다. 때로 거기에도 못 가서 땅바닥에 떨어져 부딪히기도 한다. 그런데 저 붕새는 뭐 하러 구만 리를 올라가서 남쪽으로 가려 하는가.”라고 한다. 교외로 소풍가는 사람은 세끼 먹고 돌아와도 여전히 배가 부르지만, 백 리를 가는 자는 하루 동안 식량을 찧어 준비해야 하고, 천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의 양식을 모아야 한다. 그러니, 저 두 작은 새가 어찌 알겠는가.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
소지는 대지에 미치지 못하고,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
奚以知其然也?
무엇으로 그러함을 아는가.
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
하루살이는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此小年也。
이것들은 소년이다.
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爲春,五百歲爲秋;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라는 것은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
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爲春,八千歲爲秋。
먼 옛날 대춘이라는 것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
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그런데 팽조는 특별히 오래 산 것으로 소문나 있으며, 중인(衆人)들은 이를 부러워하여 짝하고자 한다. 역시 슬프지 않은가?
[장자] 내편, 소요유.
메추라기는 대붕을 비웃는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며 대붕의 구만 리 비행을 믿지 못한다고 의심한다. 그들의 경험적인 세계에서 볼 때 붕새의 이야기는 터무니없다. 여정에 따라 식량을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메추라기의 여정은 대붕과 같은 여정이 필요하지 않으며,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여정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필요치 않고 이해할 수 없다 하여 상대를 비웃을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늙은 노인이 있다. 이름은 황충. 삼석(三石 ;1석이 대략 140kg. 약 0.4톤)의 무게가 나가는 활을 거뜬히 들어 보이는 이. 50보 내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오연히 선언하는 궁수다.
나름대로 장사군(郡)에서 일정 부분의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형주 일부 지역에서는 암암리에 그의 실력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나름 그의 활솜씨를 인정해주는 사람도 몇 있겠지. 그는 자신의 활 실력에 의지하여 세상을 바라보며, 상대를 평가한다. 자신이 몇십 년만 젊었어도 강동의 신예들은 고깃 조각이 되었을 것이라 큰소리친다.
하지만 그는 메추라기다. 가진 것이라곤 왜소한 자의식과 지적 용렬함, 그리고 그깟 활 솜씨 하나뿐이다. 자신이 사는 장사군(郡)을 세계의 전부라고 아는 늙은이다. 실상 강 하나를 두고 있는 강동(江東)지역에도 그의 이름이 들리는 바 없건만 자신의 활 실력을 최대의 지식(小知)라고 여긴다. 대붕의 비행을 무용(無用)한 수고로움이라 여기면서도, 자신에게 남은 세월이 얼마 없음을 한스러워하며 대붕을 부러워하는 메추라기.
그리고 여기 관우가 있다. 만약 막 초출 신세였던 선비인 관우였다면, 지난날의 인의에 얽매인 고루한 선비였던 그라면 황충의 소지(小知)를 경멸했을 것이다. 감히 자신과 같은 열에 서느냐고 호통쳤을 테다. 인의(仁義)에 매어 장료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황충에게 가르침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관우는 대붕처럼 구만 리 하늘을 날아올랐다. 여기서 ‘하늘’의 메타포는 철학적인 ‘자기 초월’을 의미한다. 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거친다는 것이다. 구만 리 하늘을 날아오른 새는 지상의 물건들을, 자신이 몸담아왔던 세계를 눈에 담기 시작한다.
난세를 거치며, 수많은 고난을 겪고 군웅호걸들을 마주했다. 삼천 리의 파도와 바람을 일으키는 충격을 받으며 그의 경험적 인식은 거대한 충격을 겪었다. 조조 및 제갈량 등과 함께한 세월 동안 그는 기존의 인식을 반성하며 마침내 고루했던 선비에서, 현실적인 정치가로서 변화할 것을 감내한다.
인의보다 대국을 우선시하게 된 이유, 수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구만 리 하늘을 날아오르게 된 이유.
그 이유란 바로, 황충을 때려눕히며 관우가 한 대사처럼 [사람은 현실을 바라보며 나아가야하기 때문]
그래서 대붕은 메추라기를 경멸하지 않는다. 굳이 이해시키려 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대붕 자신의 여정 자체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므로.
대붕은 ‘소지의 앎(知)’과 ‘대지의 앎(知)’에는 차이가 있으나. 이 앎의 차이란 실상 차별이 아니라 다만 구분(分)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대붕과 메추라기 사이에 어떤 서열을 두어야 하거나 가치를 매겨야 할 것이 아님을 안다. 조그만 메추라기가 작게 보는 것(小知)는 당연하지 않은가? 하루살이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며, 매미가 봄과 가을을 모르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구분(分)은 자연의 이치고, 자연의 실상이다. 메추라기가 대붕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역으로 대붕이 메추라기를 경멸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우는 황충을 경멸하지 않는다. 황충에게 그 자신의 소지(小知)를 극복하여 대붕(大知)의 차원에 도달해야할 필요성을 깨우쳐 주지도 않는다.(오히려 황충의 소지(小知)를 ‘스승’으로 삼기까지 한다.) 대신 그는 황충의 소지(小知)와 자신에 대한 비웃음을 받아들인다. 그렇다, 자연처럼.
관우는 황충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깨달음을 주지도 않고 다만 장자가 지은 책의 제목대로, 존재의 욕망에 의해 자유로이 노닐어 보자[소요유] 이야기한다. 관우가 과거 천하를 종횡하며 그리했듯, 황충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하고 넓혀, 본인의 마음- 즉 세계의 지평을 넓혀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이 대붕(大鵬)은 방통을 가리키기도 한다.
온 세상이 그를 칭찬해도,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해도 방통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커다란 대의(大義)를 위해 굳은 일도 마다치 않고 소유적인 욕망에 애착이 없다. 곤어가 변화하여 대붕이 되듯, 천하에 가장 이름난 ‘수경팔기’라는 칭호조차 버리고 ‘무명군사’라는 존재로 변화한다. 저 하늘 위의 존재에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존재로서의 비참한 ‘변신’을 감행한다. 그 과정이 엄청난 수고로움과 비애를 수반함에도 그는 상관 않는다. 왜냐? 그에겐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니.
반면, 여기 0.4톤의 활을 듭네, 50보내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네 자랑하는 노인을 보라. 그 ‘필살기’를 가지고서도 관우 하나 이기지 못한 노인네를 보며 방통은 얼마나 같잖게 생각할까.
하지만 방통은 황충을 비웃지 않는다. 누구처럼 구구하게 자신의 실력을 알아달라고 구걸하지도 않는다. 누구처럼 좁은 세계에 머물며 세월이 없음을 한스러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쉼 없이 남명(南冥)으로 유유히 향할 뿐이다.
오랜만에 번역본 나와서 봤는데 한층 재미를 더한 해석 잘 봤습니다!!
미덥잖은 글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