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범죄도시 보는 중-
-유게이, 범죄도시 재밌게 봄-
"캬아아 시발! 그래 시발 이게 영화지!"
"맨날 이상한 거 가르치려 하는 영화들만 보다가 이런 거 보니 속이 뻥 뚫린다! 어우 카타르시스 오져!!"
-아리스토텔레스, 뭐든 다 했음-
"흠... 아닌 거 같은데?"
"어라?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 왜 갑자기 나오세요?"
"아, 영화 보러 오셨어요?"
"응? 아니, 그냥 내가 한 말 얘기 나오길래 보러 왔지."
"근데 아무래도 틀렸던 것 같구만."
"네? 제가 뭐 철학 용어라도 말했던가요...?"
"응? 네가 말했잖아, 카타르시스라고."
"엥?! 그거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단어였어요?!"
"거기다가 틀렸다니 그건 또 무슨...?"
-히메사카 노아, 오랜만에 메인-
"유게이군! 그건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창한 의미의 카타르시스와, 현대에 용어로 사용되는 카타르시스의 뜻의 차이 때문이야!"
"오랜만에, 이 노아쨩이 설명해줄게!!"
"자! 유게이군, 평소에 "카타르시스"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말해볼래?"
"흠... 뭐 특정한 정의를 떠올린 적은 없긴 한데, 뭔가 뽕찬다는 말이랑 의미가 비슷한 걸로 알고 있어."
"나 말고도 다들 비슷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미안하지만 카타르시스는 그런 의미가 아니란다 유게이군. 뭐, 단어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니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어라? 아니에요? 그럼 무슨 뜻이였길래?"
"카타르시스란 특정한 감정을 의미하는 단어는 맞지만, 그 뜻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지. 내가 쓴 <시학>에서 제일 먼저 사용된 표현이지. 어떻게 쓰이는 건지 보여주마."
"카타르시스란 그리스에서 예술에 사용된 표현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감정의 격렬한 방출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지."
"감정이랑 영혼?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에요?"
"이해하기 어렵지? 아쉽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문서 중에서 "카타르시스"를 언급하는 내용은 <시학> 하나밖에 없어서 자세한 개념의 설명은 남아있지 않아."
"하지만 저런 개념으로 말했다는 건 맞거든. 이해하기 쉽게 예시를 들어볼까?"
-고대 그리스 비극-
「...안된다!
날 두고 어딜 가려는거냐!
넌 이렇게 떠나기에 아까운 지보란 말이다!!
내 사랑이 잘못되었단 말이냐!!!」
"고대 그리스 신화는 대충 알지? 거기에서 비극으로 끝나는 신화들이 많아. 이러한 비극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음... 답답하고 씁쓸하지? 그동안 했던 건 대체 뭐였나 싶고."
"예언 비틀려다가 예언 이루어져서 죽는 비극은 뭐 너무 많기도 하고..."
"맞아. 그리스 비극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새드 엔딩으로 끝나면서 여운을 주지. 동시에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줘."
"이러한 비극의 골자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이러한 비극을 끝까지 몰입해서 보면 어떤 느낌이 들어?"
"...슬프지?"
"하지만 뭐, 다 울고 나면 왠지 후련하기도 하고..."
"...아! 혹시 이거야?"
"눈치챘어? 맞아!"
"비극을 다 보고 나면 분명히 슬프지만, 동시에 비극을 통해 느껴졌던 감정이 해소되면서 오히려 후련해지지?"
"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후련함"이야말로 카타르시스라고 정의했지. 비극을 통해 공포와 동정, 그리고 연민 등의 감정을 배출시킴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감정을 씻어내고 영혼이 정화되는 것이다."
"흔히들 "한바탕 울고 나면 오히려 감정이 깨끗해지는" 경험을 겪은 적이 있지?"
"즉 "카타르시스"는 이러한 "울어서 감정이 후련해지는" 경험을 비극을 보면서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아하! 그러면 왜 맨 처음에 내가 범죄도시를 보고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게 왜 틀렸다는 건지 알겠네!"
"분명 범죄도시에서 처음의 범죄 장면을 보고 비극을 보는 것과 같이 답답해지고 슬픔을 느끼는 건 맞지만, 그 감정은 영화에서 범죄자가 결국 잡혀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해소되어버렸고,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그 감정은 모두 사라져 있으니까!"
"정답이야 유게이군! 즉 흔히들 주인공이 비극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되면 여운을 느껴야 할 답답함과 슬픔 등의 감정이 중간에 해소되어버리잖아? 그러면 그 감정이 빠져나가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로 없어지게 되니 말야."
"즉 학술적인 정의에서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해피 엔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되기는 힘들지. 주인공이 비극을 당하고, 이에 공감하면서 같이 슬퍼해야만 하니까."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본래 카타르시스란 그리스 예술에서 사용되던 표현으로, 비극을 통해 연민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느끼고, 이 감정이 해소되면서 느끼는 여운을 의미해."
"그러니만큼 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비극 내에서 그 감정이 해소되어버리면 안 돼. 만약 그랬다간 이야기가 끝나고서 느껴야 할 여운이 오히려 창작물 내에서 사라져버리니 말야!"
"뭐, 이는 내가 살던 고대 그리스와 현대에서 예술 매체의 트렌드가 변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기도 하지."
"고대 그리스에서 상영하는 예술이란 대부분 연극이였고, 연극은 주로 관객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살아있는 배우가 공연을 한다는 특성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배우의 커튼 콜을 보거나, 주변 관객들과 해당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관객들의 리액션에 자기도 모르게 공감하는 등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그 감정이 특히 오래 남게 되지."
"그러나 현대의 상영 예술의 대표인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다 해도 대부분 영화가 끝나면 바로 일어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지인이랑 같이 보는 게 아니라면 잘 일어나지 않아."
"즉 "이야기가 끝나고서도 감정이 꽤 오래 지속되는 연극"과 "감정이 상영 내에서 완결되어야 하는 영화"의 차이 때문에 카타르시스라는 단어가 이렇게 변화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긴 그렇네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조커> 처럼 새드 엔딩에 가깝게, 혹은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라 해도 현대에서는 이야기를 나눌 때 영화를 보며 어떠한 감정이 들었다~ 를 중점으로 이야기하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이 해소되면서 여운을 느꼈다~ 라고는 잘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즉 원래 다 보고 나서 느껴야 할 여운을 오히려 영화 내에서 해소시켜서 영화 도중에 여운을 느끼는 걸로 트렌드가 바뀐 셈이군요!"
"맞는 말이긴 한데... 유게이군? <조커>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아냐."
"2019년 영화니까 벌써 6년이나 됐다구."
"거짓말!!!!"
5년?
실수
6년...?
그러하다네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