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신립이 탄금대로 물러난 것을 '오만한 나머지 기병으로 싸울려고 논밭에 물러나 군사를 전멸시킨 뻘짓'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난 좀 다르게 봄
당시 일본군은 열흘 이상을 하루 2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고 있었고
(당시 전근대에선 10km만 가도 퍼진다는게 정설이었음)
부산진성, 동래성 전투 등 그리 만만하지 않는 전투를 치룬 뒤라 더욱 힘든 상황이었음
즉, 신립은 당시 '상식' 수준에서 일본군이 이제 슬슬 한숨 돌릴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거임
사서에서는 신립이 정찰병도 안 세우고 오만하게 굴다가 패배했다고 했지만
정작 징비록에선 정찰병이 일본군이 왔다고 보고 하자 바로 직접 정찰을 나갔고
고언백을 척후/장으로 세우고 이일, 이종장등을 선두로 내세우는 등 딱히 정찰을 무시한거 같지도 않음
정찰은 당시에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정찰병은 정예 중 정예만 뽑는거 보면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고 볼 수 있음
신립은 몇중 대책을 세웠지만 실패했는데 이걸 정찰을 무시했다고 보기도 좀 그럼.
당시 신립이 가지고 있는 병사는 충주+청주를 합한 지방군 4천, 한량, 하급관료 등 예비군 2천, 별무사 등 경군기병 1천, 대졸 등 경군보병 1천이었음
(자세한 사항은 여기 참조)
이런 상황에서 조령과 충주성으로 군대를 나누기는 그랬고
(군대는 나눌수록 약해진다는게 상식이고 게다가 징비록에선 대놓고 신립이 조령으로 가고 싶었지만 상주전투로 전선이 밀려 못갔다고 되어있음)
기병으로 싸우고 싶었으면 단월역이라는 최선의 장소가 있었지만 충주성과 멀리 떨어지고 우회로가 많다는 단점이 있었음
결국 신립은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이라 오판하고 뒤로 물러나 아군이 도착하길 관망하러 탄금대로 물러난게 아닌가 싶음
탄금대는 사방이 개방되어서서 어디서 누가 오는지 알 수 있었고 만약 일본군이 충주로 온다고 해도 바로 지원할 수 있는 장소였음
심지어 이일, 이종장에게 충주 근처에서 대기하게 해서 만약 일본군이 와도 시간을 끌 수 있게 해두었음
당시 신립의 지위는 삼도순변사로 시간만 끌면 경상도, 전라도, 충주 삼도에서 군사를 모을 수 있었음
즉 1. 조령은 전선이 밀려 갈 수 없는(혹은 그렇게 판단되는) 시점에
2. 군사 대부분은 민병대나 다름없어서 믿을 수 없고
3. 그나마 적군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판단)고
4. 시간만 끌면 삼도에서 군사를 끌고 온다는 판단 아래
신립은 1. 이일, 이종장에겐 단월역 근처에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일본군을 막고
2. 본인은 탄금대에서 삼도군을 기다리는 한편 여차하면 군대를 몰아 요격하거나 이일, 이종장을 지원 하려고 한게 아닌가 싶음
문제는 1.일본은 아직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지 않았고
2.이일, 이종장은 너무 쉽게 패배해서 지원할 시간도 벌지 못했고
3.삼도군은 도달도 못했으며
4. 가장 중요한 장소인 충주성도 함락될 지경에 이르어서
결국 신립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포위당한 상태에서 빠져나갈려고 논밭에서 기병돌격을 하며 충주성으로 돌아갈려고 갈팡지팡하다가 결국 패배했다는데 탄금대 전투가 아니었나 싶음
요약
1. 신립은 일본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함
2. 자기 군대를 믿지 못한 나머지 삼도군이 도달할때까지 시간을 끌기로 하고 본인은 관방지역에 물러나 약간 한숨을 돌림
3. 전쟁기계인 일본군은 미칠듯한 돌격력으로 신립을 순식간에 포위했고 신립은 자포자기로 기병돌격을 하다가 죽음
단순히 기병짱짱=논밭인 탄금대로 가자!라고 하기엔 탄금대보다 단월역이 휠~씬 나음 기병전을 벌일려고 했으면 그냥 단월역으로 갔으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