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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없는 지하철 역의 작고 지저분한 화장실. 곰팡이를 볼 수 없는 벽은 없었고, 바닥에는 휴지와 신문지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화장실 한 귀퉁이에는 닫혀 있는 세 개의 작은 문 옆으로 활짝 열린 문이 있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하얀 변기도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이 막혀 내려가지 않는 곳이 있는지, 아니면 통풍이 되지 않는 곳이 있는지 화장실 안에는 불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섰다. 남자는 지저분한 화장실의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양복을 차려 입은 말끔한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화장실의 냄새와 더러운 모습에 일순 발걸음을 멈추며 눈살을 찌푸렸으나, 일단 급한 대로 일을 보기로 하고 남자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는 칸이 보였으나, 그 안으로 보이는 변기가 몹시 더러워 차마 그곳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남자는 옆으로 보이는 세 개의 문을 오른쪽부터 하나씩 열어 보았다.
그 세 개의 문 중 가장 오른쪽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변기도 더럽기는 옆 변기와 맞먹는 수준이라, 남자는 망설임 없이 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그 옆의 문에 손을 가져가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철컥, 쇠가 맞부딛히는 소리만 들릴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런 더러운 화장실에 들어오는 게 나 말고도 있는 모양이군.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남은 건 하나. 남자는 가장 왼쪽에 있는 문으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는 그 문이 잠겨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옆 칸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을 지는 모르나, 만약 이 문이 잠겨 있다면 남자는 꼼짝 없이 오른쪽에 있는 더러운 변기들을 사용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문은 저항 없이 열렸고,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변기는 꽤 깨끗한 모습이었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고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문을 잠궜다.
남자는 양복 자켓을 벗어 문에 달려 있을 옷걸이에 자켓을 걸기 위해 문의 위쪽을 보았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옷걸이까지 온전히 붙어 있을 화장실은 아니었다.
양복 자켓을 변기 뒤쪽에 대충 올려놓은 남자는 서둘러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식은 땀까지 흐르던 남자의 굳은 표정이 살짝 풀렸다.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남자의 눈에 지저분한 칸 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곰팡이도 드문드문 보이고, 갖가지 낙서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남자는 무심코 낙서들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낙서를 한 사람의 의도는 잘 몰랐으나, 심심풀이로 읽어 보기엔 제격이었다. 야한 그림이나 이상한 말장난,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글 등이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 중 아무 낙서나 집어 훑어 보듯 읽어 보았다.
심리 테스트. 좋아하는 동물을 세 가지 얘기해 보세요. 음. 기린, 코끼리, 그리고 개. 아, 백곰도 좋은데. 세 개라니까 뭐.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중얼거리던 남자는 문득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작게 말했다. 뭘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는 거야? 나원.
그리고 남자는 그 옆에 있던 굵직한 글씨의 낙서를 읽었다. 이건 또 뭐야. 오전 0시, 문이 닫힌다. 오전 0시? 밤 12시 말이군. 남자는 무심코 자신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절묘하게도 시계는 12시를 살짝 넘어선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괜히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다가, 이런 되도 않는 낙서를 의식하는 자신이 웃기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남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이 없군.
어디 보자, 막차 시간이 6분이었지? 빨리 안 가면 놓치겠는데. 서둘러야겠다. 남자는 서둘러 뒤처리를 끝낸 뒤 물을 내리고 문을 열어 칸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옆 칸에 들어가 있던 사람은 아직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오래도 앉아 있는군. 술 먹고서 잠이라도 자는 건가.
바로 그때, 화장실 문 너머로 막차의 도착을 알리는 방송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급해진 남자는 손도 제대로 씻지 않고서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남자의 뜻과는 달리 문은 꼼짝도 않았다. 남자는 당황하여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 열어요! 아직 사람 있어요!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몇 번 더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봤지만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금새 지쳐 버린 남자는 문에서 떨어져 뒤를 돌아 보았다. 난장판인 화장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막차 시간이 지난 지 오래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막차는 놓쳐 버리고 화장실 안에 갇히기까지 했다.
남자는 급격히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 오전 0시에 문이 닫혔네. 지하철 화장실이 12시에 문을 잠그던가? 막차가 12시 6분인데? 젠장.
더러운 화장실에 혼자 남겨진 남자는 한참 동안 문 앞에 멍하니 서서 화장실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남겨진 게 아니잖아! 남자의 시선이 빠르게 등 뒤로 돌아갔다.
서둘러 자신이 있던 칸의 옆 칸으로 다가간 남자는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번엔 좀 더 세게. 그래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양반 역시 안에서 자고 있는 게 맞구만!
급기야 남자는 문을 거세게 두들겨 댔지만 그래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답은 커녕 인기척도 없다. 아무리 술에 취해 뻗은 사람이라도 이 정도 쯤 되면 소리라도 내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문 너머에서는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 아래의 틈으로 보니 신발 한 짝이 살짝 보인다. 다른 화장실과 달리 틈이 굉장히 좁아 그 이상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신발이 있는 걸 보니 사람이 있다는 건 틀림 없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사용했던 옆 칸으로 들어가 변기를 밟고 올라섰다.
칸의 벽에 손을 얹고 고개를 빼곰이 내밀어 옆 칸을 내려다 보았다. 그 아래에 보이는 것은, 지저분한 변기와 널부러진 신문지와 낡은 신발 한 짝 뿐이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절망에 빠졌다. 문만 잠긴 빈 칸이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야? 따지듯 소리쳐 봤지만 지저분한 화장실 안에는 그 말을 들을 사람 조차 없었다. 화장실 칸에서 나온 남자는 화장실 벽 앞에 짝다리를 짚고 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오늘 여기서 묵어야 하는 거야? 끔찍하다, 정말.
그러다 문득 벽에도 낙서가 간간히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화장실 칸에만 해 놓은 게 아니었다. 분명 지하철 화장실에도 청소부가 있을 터인데, 이런 낙서를 지울 생각도 않다니. 월급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애초에 화장실 상태가 이렇게 지저분한 것부터 그 청소부는 당장에 짤려야 할 것이었다.
심심한 기분을 풀어낼 심산으로 낙서들을 몇 개 훑어 보던 남자는, 문득 밋밋하게 적어 놓은 낙서 하나를 발견했다. 그다지 눈에 띄는 낙서도 아니었으나, 그 내용이 이유 없이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갑 떨어졌어요♡ 그렇게 적힌 낙서를 본 남자는 무심코 정장 자켓의 안주머니를 만져 보았다. 네모나게 손에 잡혀야 할 주머니는 그냥 텅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깜짝 놀란 남자는 뒤를 돌아 보았다. 정말로 바닥에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남자는 괜히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지갑을 집어들었다. 왜 이리 불안하지. 그냥 우연일 뿐인데. 지갑이 떨어진 걸 은연중에 느꼈으니 저런 낙서가 눈에 들어온 거지, 저 낙서가 맞은 게 아닌데 말야. 남자는 딱딱한 표정으로 지갑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화장실 벽의 낙서들을 하나하나씩 읽어 보기 시작했다. 파이프 옆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한 남자는 사각의 방에서 목을 맨다.
남자는 자신의 넥타이를 내려다 보았다. 물방울 무늬였다.
초조해진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 번 불똥을 헛튀기던 라이터는 세 번째 손질에야 간신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 남자는 다시 낙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소변기 위의 물통 아래에 적힌 검은 낙서. 물에 빠져서 고생한다. 물떼가 잔뜩 끼어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더러운 거울에 적힌 파란 낙서. 죽다. 그 거울 바로 옆에 적힌 색이 다 빠진 보라색의 낙서. 새벽이 오기 전에 살인마가 남겨진 사람을 죽이러 온다.
점점 비정상적인 낙서들이 나타나자 남자의 마음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그럼 그렇지, 그냥 화장실의 조잡한 낙서일 뿐인데 뭘 긴장하고 있는 거야.
낙서를 열심히 적어 댔을 누군가에게, 또는 그런 것에 겁을 먹었던 자신에게 비웃음을 날린 남자는 한결 편한 자세로 다른 낙서들을 훑어 보았다.
이번엔 잠긴 화장실 칸의 위로 보이는 벽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작은 낙서들과는 달리 스프레이로 적은 듯한, 스쳐지나가는 눈길에도 바로 눈에 띌만큼 커다랗고 붉은 글자였다.
7738. 급하게 그린 낙서인지, 8의 위아래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고 띄워져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였으나, 붉게 쓰인 커다란 글씨 탓인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곧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낙서에 대한 생각을 털어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하철 회사에 전화하면 문을 열어 주지 않을까. 남자는 퍼뜩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안테나는 사선에 깔려 권외라는 표시를 띄우고 있었다. 이 망할 화장실은 전파도 안 닿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닫아 주머니에 도로 쑤셔넣어버렸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그렇게 생각한 남자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계속 들고 있던 담배가 점점 깊이 타들어가다가 결국 남자의 손을 지진 것이다.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뜨린 담배가 연기를 흩뿌리며 혼자서 타오르고 있었다. 나즈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불에 데인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남자는, 그 담배가 타오르는 모습에서 기발한 생각이 떠올렸다. 담뱃불로 화장실의 화재 경보기를 작동 시키면 경보가 올려 사람이 찾아 들어오지 않을까? 담배 연기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소방관의 모습이 비치는 듯 했다.
그래서, 대체 멀쩡한 화장실에서 화재 경보기는 왜 울리고 난립니까? 그게, 화장실에 갇혀서 도움을 청하려고……. 갇혔었다구요? 허 참, 이봐, 이 사람 화장실에 갇혔었다는데? 소방관의 비웃음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아, 관두자. 쪽팔리게 이런 걸로 경보나 울려서 난리칠 수는 없지. 남자는 금새 그 생각을 깨끗이 접어버렸다.
남자는 다시 낙서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제 보지 않은 낙서도 거의 없었다. 별 쓸데 없는 낙서들이 보이던 중, 한 쪽 벽 위의 조잡한 여자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 옆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이 벽에 살해당한 여자가 잠들어 있다.
이제 놀랄 기운도 없어진 남자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지가 더러워질 것도 같았으나, 그냥 앉아서 더러워지는 거라면 물만 묻혀도 지워낼 수 있었다.
문득 아주 작은 물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남자는 그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변기의 배수구가 막힌 것인지, 고장난 소변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내려가지 않고 계속해서 차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소변기 위로 고개를 올렸다. 물에 빠져서 고생한다. 그 낙서를 또 다시 읽은 남자는 한동안 멍하니 낙서를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중얼 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물이 계속해서 차오르던 소변기는 결국 더러운 물을 바닥에 넘치게 하고 말았다. 끊임 없이 넘쳐 흐르던 물은 화장실의 바닥을 따라 흐르다가 배수구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나 화장실 바닥의 배수구까지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물을 고이게 하고 있었다.
조금씩 바닥에 고이던 물이 어느덧 남자가 앉아있던 자리까지 차올랐다. 당황한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이 닿지 않는 바닥으로 자리를 슬쩍 옮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화장실 바닥의 막힌 배수구가 역류하며 더러운 물을 세차게 뿜어댔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는 더더욱 빨라졌다.
남자는 황급히 화장실 구석의 대걸레를 가져와 막힌 배수구를 뚫어 보려 애썼다. 하지만 막힌 곳이 뚫리기는 커녕 역류하여 튀어 오르는 물에 양복만 젖을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마구 쑤셔대던 대걸레가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은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물이 튀었던 양복은 이제 거의 젖어 버렸다. 그 물이 변기에서 흘러나온 물인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끔찍한 일이었다. 화가 난 남자는 대걸레를 바닥에 내팽겨쳐버렸다.
남자는 물에 빠져 고생을 하였다.
아, 망할! 이거 어제 샀다고, 어제! 남자는 분노에 가득차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시끄러운 호통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남자는 화장실과 대화하기라도 하듯 계속해서 세면대 위의 거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별 것도 아닌 화장실 주제에 말야.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건축 디자이너야, 건축 디자이너! 아직 수습사원이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건, 내가 건축 디자이너가 되면 이딴 화장실 당장에 갈아엎어 주겠어! 남자는 점점 자신이 화장실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인지 거울에 비친 자신을 힐난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말을 마친 순간, 화장실의 형광등이 파밧 하는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졌다. 이제 화장실을 비춰 주는 것은 화장실 칸 안을 비추던 작고 노란 불빛의 전구들 뿐이었다. 노란 불빛이 화장실을 채우자 분위기는 더욱 스산해졌다.
이건 또 뭐야! 잔뜩 화가 난 남자는 벽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그때 남자는 문득 벽에 뭔가 변화가 있음을 알아챘다. 벽에 붙어 있던, 조잡한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던 포스터의 한 쪽 귀퉁이가 떨어져 있었다. 아까 난리통에 물이라도 튀었던 걸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그렇다고 멀쩡히 붙어 있던 그림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사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남자가 포스터를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포스터는 좀 더 뜯어져 내렸다. 누가 조금씩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이, 포스터는 점점 물 먹은 솜처럼 고개를 축 숙였다.
남자는 떨어져가는 포스터를 멍하니 보다가, 옆에 있는 낙서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 벽에 살해당한 여자가 잠들어 있다.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 자신을 안심 시키려는 듯 중얼거렸다. 누가 어떻게 이런 데에 시체를 감출 수 있단 말이야. 웃기지 말라지. 그 말을 하자 포스터는 더 떨어지는 것 같이 보였다.
이내 남자는 포스터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 시키고, 더러운 화장실 내부를 한참 둘러보다가,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고개를 되돌려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아니, 포스터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포스터는 이미 모두 뜯어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포스터가 있던 자리에는 물에 변색된 벽이 보였다. 그 변색된 모양이 마치 절규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겼다. 선명하게 나타난 괴기스런 모습에 남자는 숨을 삼키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남자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세면대로 다가가 찬물에 세수를 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그냥 물똥 묻은 벽이잖아. 시체는 무슨. 찬물이 얼굴에 끼얹어지니 마음이 그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남자는 세수를 하고 얼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세면대 앞의 거울을 쳐다보았다.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한숨을 내쉰 남자는 손에 묻어 있는 물을 탈탈 털어내고 세면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남자의 뒤에 있는 벽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아까 보았던 붉은 색의 낙서도 거울에 비쳤다. 7738이라는 숫자가 거울에 비쳐 좌우가 뒤집혀 보였다. 순간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서 낙서를 쳐다보았다.
7738이 거울에 비치자, HELL이라는 글자를 위아래로 뒤집어 놓은 모습이 되었다. 위 아래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8은, 8이 아니라 굽은 듯한 H처럼 보였다. HELL. 지옥. 남자는 섬짓 놀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지랄하고 있네. 이런 곳에 쳐박혀 있으니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는구만.
남자는 점점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자는 모든 수단을 다 해 화장실에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휴지통의 내용물을 모두 변기에 버린 뒤, 그것을 화장실 가운데에 엎은 채로 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그 휴지통을 밟고 올라섰다. 남자의 눈 앞에서, 화재 감지기는 새빨간 불빛을 희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화재 감지기에 가져다 대었다. 자, 이제 경보가 울리고 소방관이던 관리인이던 누가 오겠지. 그럼 나갈 수 있을 거야. 좀 쪽팔리긴 하지만.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렇게 불이 잠시간 닿아 있자, 화재 감지기는 라이터 불을 화재로 착각하고서 양 옆의 파이프를 통해 세차게 물을 뿜었다. 그러나 남자가 기대하던 시끄러운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그저 세찬 물줄기만이 남자의 전신을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오는 물세례를 맞은 남자는 휴지통 위에서 균형을 잃고 화장실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소변기에서 흘러넘쳐 나오던 물로도 바닥은 점점 차올랐었는데, 이제 소리 없이 물만 뿜어대는 화재 경보기 덕분에 물은 훨씬 더 빠르게 차오르게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남자는 자신이 사용했던 가장 구석칸의 천장에 있는 통풍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변기 뚜껑을 밟고 올라서 통풍구 뚜껑을 열어낸 남자는 통풍구 위로 올라가기 위해 뒤꿈치를 들어올리며 통풍구에 몸을 쑤셔넣으려 애썼다. 그러다가 물이 잔뜩 묻어 있는 구둣발 탓에 변기 뚜껑 위에서 세차게 미끌어지고 말았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통풍구의 어딘가에 넥타이가 걸려 넥타이 끈이 팽팽하게 남자의 목을 졸라왔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넥타이 끈을 잡고서 넥타이를 목에서 풀어냈다. 갑자기 목을 졸린 탓인지 기침이 마구 나왔다. 아까 보았던 낙서가 떠올랐다.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한 남자는 사각의 방에서 목을 맨다.
남자는 이제 지친 듯 물이 차오르고 있는 화장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고인 더러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따가운 목을 쓰다듬던 남자의 눈에 또 한번 아까 보았던 낙서가 들어왔다. 새벽이 오기 전에 살인마가 남겨진 사람을 죽이러 온다.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어딘가에서 선명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뚜벅. 아까 같았으면 관리인이 오는 걸 거라 생각하며 반겼을 남자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관리인이나 소방관 따위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낙서가 적힌 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양복 셔츠의 소매로 낙서를 미친듯이 문질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화장실 밖에서 들리는 발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고 크게 들려오는 발소리.
마음이 급해진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찢어진 넥타이를 꽉 쥐고서 낙서를 마구 문질렀다. 점점 낙서가 지워졌다. 글자 몇 개가 완전히 지워지자,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거짓말 같이 뚝 멎었다.
안도감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남자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다른 낙서들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물에 빠져서 고생한다.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한 남자는 사각의 방에서 목을 맨다. 오전 0시, 문이 닫힌다. 이 벽에 살해당한 여자가 잠들어 있다. 그 외에도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낙서들까지 모조리 다 지워냈다. 하지만 7738이라고 적힌 낙서는 아무리 지우려 애써도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그 낙서를 지우는 것을 포기하였다.
진이 다 빠진 남자는 다시 화장실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잔뜩 지친 나머지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천천히 한 걸음씩 발을 옮기던 남자는, 좀 전에 바닥에 집어던진 대걸레 자루에 발이 걸려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기절을 한 것인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피곤해서 잠이 든 것인지는 남자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으세요? 남자는 자신을 흔드는 손길과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니 파란색 옷을 입고 파란색 모자를 쓴, 청소부로 보이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래, 당신이었구만. 이 망할 화장실의 낙서와 쓰레기들을 그대로 방치한 인간이.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이 휘청였다. 그러자 청소부가 깜짝 놀라며 남자를 부축하였다. 청소부는 문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곧 역무원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난장판이 된 화장실의 모습에 깜짝 놀란 역무원이 물었다. 청소부는 다소 황당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청소하러 와 보니 이 사람이 쓰러져 있는 거예요. 술에 취해서 화장실에서 엎어져 잤나 본데. 주위는 왜 이리 개판인지.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뒷골이 당겨오는 듯 했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나무라는 거야. 화장실을 이따구로 관리한 게 누군데? 남자는 속으로 잔뜩 욕을 퍼부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술에 취했다고? 내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네요. 저기요, 무슨 관리를 이따구로 하는 겁니까? 밤에 문은 대체 왜 잠궈 놓는 거고요? 안에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화장실이 다 있어? 따지듯 외치는 남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역무원과 청소부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으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곧 역무원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려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화장실은 잠궈 두지 않는데요. 그 말을 들은 청소부가 거들었다. 저 화장실 문에는 잠금 장치가 없어요.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손가락을 치켜 세워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기 문을 보라고요. 저 문이, 어? 남자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걸쳐져 보이는 문의 모습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남자는 역무원과 청소부를 제치고 문으로 다가섰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열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다. 남자는 문을 열어젖혀 보았다. 역시 문은 철컥 소리만 내며 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남자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남자는 문을 옆으로 밀어 보았다. 문은 매끄럽게 열렸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문을 양 옆으로 확 밀어 문을 완전히 연 남자는 더 크게 웃었다. 화장실로 다시 비척비척 걸어들어오며 큰 소리로 웃었다.
역무원과 청소부가 이상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 봤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미닫이였네, 미닫이. 하하, 이런 멍청이 같으니. 들어올 때에도 열었으면서! 그렇게 외치면서도 남자는 계속해서 웃었다.
오물이 잔뜩 묻어 완전히 더러워진 양복 자켓과, 통풍구에 걸려 늘어지는 바람에 넝마가 되어버린 넥타이를 챙겨들고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온 남자는 택시를 타기 위해 도로변으로 향했다.
아침 시간대라 그런지,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 탓에 남자는 한참이 걸려서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더러워진 옷은 이미 마른 지 오래였으나, 그래도 그냥 입고 타도 되나 잠깐 고민을 하였다. 냄새가 장난이 아닌데, 뭐라 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틈에 웬 중년 남자가 끼어들어 남자가 잡은 택시를 타려고 하였다.
잠깐만요. 이건 제가 잡은 택시거든요. 남자가 따지듯 말하자 중년 남자가 머쓱한듯 대답했다. 안 타는 것처럼 서 있으니 그렇지. 그런 궤변에 넘어갈 남자가 아니었다. 당연히 타죠. 아저씨 택시는 아저씨가 잡아요. 남자는 서둘러 택시에 문 틈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었다.
그렇게 남자가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자 성급한 택시 기사는 곧바로 차를 출발 시켰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 지독한 악취는 맡지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는 슬쩍 뒷좌석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푹신한 좌석에 몸을 편히 기댄 남자는 무심코 택시 안을 둘러 보았다. 가죽으로 튜닝을 한 시트, 택시 기사의 불친절한 얼굴이 비치는 백미러, 그리고 택시 조수석의 앞에 붙어 있는 택시 기사의 신분증이 보였다.
택시 기사의 사진과 이름, 차량 번호가 적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 신분증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던 남자는,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남자의 시선은 택시의 차량 번호에 고정되어 있었다. 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그 택시의 차량 번호. 그 네 글자의 숫자는 다름아닌 7738이었다.
남자는 기겁하며 택시 기사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아, 아저씨! 세워 주세요! 빨리요!
택시 기사가 어이 없다는 듯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으나, 남자는 대답은 커녕 더 큰 소리로 차를 세워 달라고 소리쳤다. 택시 기사는 오만상을 지으며 차를 세웠다. 남자는 택시 기사에게 3천원을 건네주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택시에서 내렸다.
어쨌거나 이익을 챙기기는 한 택시 기사는 가벼운 불평을 할 뿐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남자가 택시에서 헐레벌떡 내리자 마자 다른 손님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성질 급한 그 택시 기사는 또 손님이 차에 올라타고 문을 닫는 동시에 차를 움직였다.
택시에 내리고 잠깐동안 길가에 멍하니 서 있던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참 등신이구나, 그런 낙서를 다 신경 쓰고. 남자는 다른 택시를 잡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남자의 등 뒤에서 커다란 파괴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남자와 주위의 사람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빌딩 공사장에서 떨어진 커다란 철근에 완전히 박살이 난 차량 번호 7738의 택시가 있었다. 처참하게 구겨진 택시의 문 틈으로 새빨간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남자의 눈동자에 선명히 비쳤다. 곧,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택시를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천천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자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 없이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7738이라는 글자는 원본 영상에서는 259라는 글자가 좌우반전 되어 있는 낙서였습니다. 일어로 259가 지옥이란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여 그렇게 써먹었지만 우리말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데다가.. 차량번호에까지 갖다 붙여야 했으니 네 글자여야만 했어요. 고민고민을 하다가 7738이라고 우겨서 두 번이나 뒤집으면 HELL이 된다고 했는데.. 어색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재미있어요!
7738이라는 글자는 원본 영상에서는 259라는 글자가 좌우반전 되어 있는 낙서였습니다. 일어로 259가 지옥이란 단어와 발음이 유사하여 그렇게 써먹었지만 우리말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데다가.. 차량번호에까지 갖다 붙여야 했으니 네 글자여야만 했어요. 고민고민을 하다가 7738이라고 우겨서 두 번이나 뒤집으면 HELL이 된다고 했는데.. 어색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이괴담 게시판에영상있는거네여
재미있어요!
역시 이불밖은 위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