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칙칙한 빌딩이라 처음 출근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사장님도 대학생인 민서를 많이 배려해주시는 데다
건물 외관 탓인지 찾아오는 손님도 적어 낮에 못다 한 공부를 일하면서
겸사겸사 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드는 알바 자리였다.
그 날은 유독 손님이 없어 12시 정각에 가까운 그때야 손님이 오면 울리는 차임이 처음 울렸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눈썹을 덮을 듯 쳐져 있고,
키는 민서보다 머리 두 개 정돈 큰데 살이 찐 건 물론이고
외투를 갑갑해 보일 정도로 두껍게 입은 지라 더욱 체격이 비대해 보였다.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론 쌍꺼풀이 심하게 진한 두 눈이 퀭하니 떠 있었는데,
눈동자가 큰데도 눈빛은 어두운 게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팔레트처럼 생기가 없었다.
짧은 순간에 그를 스캔했지만 민서의 마음엔 새끼손톱만큼의 연애 세포도 반응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무겁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민서의 얼굴을 훑더니 괜히 기분이 나쁘게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한 시간에 얼마에요?'라던가, '새벽에도 해요?' 같은 일상적인 손님의 반응은 아니었다.
특히 민서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으니 허벅지 께에서 눈동자가 번뜩이는데,
그 순간만큼은 눈에 '집요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안광이 보여서 민서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오므렸다.
설명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는데, 트러블이 잔뜩 돋은 피부가 조명 아래 번들거렸다.
민서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진짜 못생겼다'고 자꾸 되뇌는 자신의 마음을 자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가만히 서 있는 남자와 자신이 말도 없이 서 있게 될 거란 상상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테이블에 앉혀 플스나 하게 하고, 가게 문은 계산이 끝나는 순간 닫아버려야겠다고,
그러려면 조금 호들갑을 떨더라도 빨리 게임이나 시켜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민서는 생각했다.
민서는 머리가 멍해졌다.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친구들과 여행했던 사진을 보며 불안함을 잊으려고 하다가 남자를 슬쩍 바라보는 순간
홱! 하고 시선을 감추는 남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게임이나 영화에 집중하시라고 일부러 어둡게 해놓은 조명이 오늘따라 원망스러웠다.
시곗바늘이 거꾸로 흐르는 듯 더디게만 여겨져 스마트폰만 의미 없이 켰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봐도 민서는 구석에서 자신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는 탓에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알바고 뭐고 그만둘까, 낮에 일할까, 생각은 더욱 방황했다.
다만 남자의 눈은 천장을 향해있었고, 그 시선은 내려올 줄 몰랐다.
반쯤 벌린 입은 남자를 더 멍하게 보이게 했다.
차라리 자신을 은근히 쳐다보는 것보단 천장을 바라보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며 민서는 살짝 안도했다.
관심의 대상이 꼭 '나'에게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남자는 그 뒤로도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다가, 축구 게임 하나를 조금 끄적대는 것 같더니 계산을 하곤 나갔다.
방범용 CCTV 카메라가 툭 하니 달려있었다. 민서는 남자가 CCTV를 찾고 있었단 생각을 하자마자 출입문을 걸어 잠갔다.
'눈이 아파서 게임을 못 하고 안타깝게도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쉬고 있었을 거야(?)'라는
유치한 가설을 세우면서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닐 거라고 자신을 달래려 했지만 이미 민서는
컴퓨터에 연결된 방범 프로그램에 접속해 CCTV 화면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파일은 30분 단위로 녹화되어있었다.
혹시 출입문 유리 사이로 번뜩이며 자신을 찾는 눈동자를 만나게 된다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녹화 영상을 보면서 민서는 몇 차례나,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영상 속의 남자와 눈을 마주쳐야했다.
남자는 처음엔 무언가를 천장에서 찾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CCTV를 발견한 이후론 행동이 딱 두 가지였다.
카운터 쪽을 은근히 바라보거나, CCTV를 뚫어지라 쳐다보거나.
민서의 생각엔 CCTV가 정말로 작동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만약 저 CCTV가 달리지 않았다면 남자가 어떤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더욱 무서웠다.
그 날 민서의 퇴근길은 두려움과의 숨바꼭질이었다.
친구들에게 얘기하자 무슨 그런 ㅁㅊㄴ이 있느냐며, 호신 스프레이라도 하나 사서 다니라고들 서로 소란이었다.
세상 흉흉하단 건 알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민서는 덜컥 삼단봉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하지만 삼단봉을 사기도 모호한 입장이 된 건 출근해서 만난 사장과의 얘기 때문이었다.
얘는 내 친구야. 친하진 않고.. 거 뭐야, 같은 반이긴 했는데, 농담은 서로 주고받고 하는데
막상 같이 밖에서 놀아본 적은 없는 친구 있잖아, 그냥 반 친구 정도…? 그래 그냥 그 정도로 아는 사이였는데
우연히 연락이 와서 한 번 놀러 오라고 한 거거든. 근데 왜 그 시간에 왔대… 일단 정말 오해할만했어,
내가 봐도 이상하네. CCTV가 있으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얘한테는 내가 연락을 따로 하던가 해야겠다.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고…. "
뜻밖이었지만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민서의 다리를 훑어보던 끈적한 시선을 떠올리면 사장님의 친구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입맛을 다시는 악마처럼 느껴졌다.
털끝 하나 건드리게 한 적 없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그랬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한 번 자라나기 시작하면, 오해가 번져가면, 어떤 이미지라도 괴물처럼 자라나니까.
그렇다고 그만두기엔 아직 일한 지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데다 일 자체는 편하고,
내 아는 놈은 맞는데 솔직히 영상 보니까 내가 다 무서운데 당사자인 너는 어떻겠어…
나도 걔 잘 몰라. 책임감 없는 말이라서 미안하다. 어쨌든 오늘 2시 넘어서 손님 없으면 그냥 문 닫고 가라. "
이 정적이 최근까진 '공부하기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건이 있었던 후론
불안해서 근무를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민서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환경이 돼버렸다.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란 말에 어울렸다.
그 뒤엔 친구들 몇 명이 따라서 있었다.
민서의 심장이 다시 덜컥거렸다.
이번엔 확실했다. 저번의 그 남자가 플스방으로 들어왔다.
웃으며 보낸 손님이었다면 '또 오셨네요.' 했을 걸 민서는 그만 묵묵부답하고야 말았다.
게임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카운터 앞에 이미 1분 이상을 별 주문도 없이 서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는 몹시 반가운 듯 갑자기 말이 빨라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아시네요??' 하며 자기 혼자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지며, 일전의 '정색'으로 돌아왔다.
이런 타입의 인간은 살면서 여지껏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민서는 지금 자신이 잘 대처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사장님의 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불쾌함을 참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여기며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빨리 자신에게서 떨어져 주길 바랬다.
안 하실 거면 나가주세요. 이것도 일종의 영업 방해에요. 그리고 제 기분도 좀 나쁘구요. "
언제 자신이 추파를 던졌느냐는 듯 멀쩡하게 카드를 낚아채어 테이블에 가서 아주 능숙하게 전원을 켜고 자리에 앉았다.
요란한 게임 소리, 그에 비해 돌처럼 굳어있는 민서와,
민서와 눈을 마주치면 으레 시선을 돌리지만 시선이 위를 향했다가, 아래를 향했다가,
저 남자가 나가야 문을 닫을 텐데, 이대로라면 퇴근 준비를 하고 문을 잠글 때까지도
저 남자가 가지 않을 거로 생각하니 민서는 벌써 답답하고 소름이 끼쳐왔다.
혹시 주변에 있을지 모를 친구들에게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카톡부터 잔뜩 보내놨지만 쉽게 답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대답들이 왜 더디냐고, 괜한 친구 탓을 하며 민서는 더욱 스마트폰을 꽉 쥐고 있었다.
특별히 음료수를 사마신 것도 아닌데 화장실을 이상하게 자주 오가며 힐끗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
민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거운 마음으로 시계를 쳐다보았다. 2시 18분. 폐점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그러려면 화장실로 가서 대걸레를 빨아와야 바닥을 닦을 수가 있는데 문제는 남자가 화장실을 자주 오가고 있단 것이다.
곳곳에 과자 부스러기가 보이는데 양심적으로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내 기분에 따라 하고, 말고를 따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포와 짜증이 동시에 밀려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민서가 화장실을 향해 등을 돌린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뒤통수에 눈이 달린 듯 남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일어서있다는 게 느껴졌다.
민서는 겨우 한 발짝, 두 발짝을 떼어 화장실로 다가갔다.
민서는 그 뱀이 허벅지를 감아 오르는 소름 끼치는 느낌에 화장실로 가려던 걸 내팽개치고 탕비실로 달렸다.
짧은 찰나의 판단이었지만 이 플스방 안에서 자신을 그나마 안전히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카운터 옆 탕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떠올리는 순간, 그런 남자의 입에서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 나온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싫은 수준을 떠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부터 쳐버렸다. 숨을 헐떡이며 민서는 문이 제대로 잠긴 걸 확인했다.
민서는 어두컴컴한 탕비실 안에서 주저앉아 두 귀를 틀어막았다.
나와보라는 말도 없이, 노크도 없이, 남자가 밖에서 몸을 던져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신고할 수단도 없고,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건 탕비실의 철제문 하나뿐이었다.
쾅,쾅 소리에 문이 들썩거릴수록 민서의 머릿속엔 거구의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와 민서의 목을 조르는 상상이 떠오르며
그 순간 생각나는 건 딱 하나, 엄마뿐이었다. 민서는 엄마를 외치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서는 귀를 틀어막고 한참을 우느라 밖의 잠잠함과는 상관없이 공포에 질려있었고,
저도 모르게 지쳐 쓰러져버릴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했다.
- … 똑똑똑 !
" 헉. "
민서의 머리가 상황판단을 못 하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잔은 이미 비워져 있고, 다른 한 잔은 차게 식어있었다.
자신을 계속 쳐다보다가 결국 자신을 쫓아와선, 잠긴 문을 온 힘을 다해 열려고 하던 걸 생각하면 그 순간 몸이 벌벌 떨려왔다.
플스방 사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팔을 괴고 있다가 입을 떼었다.
일한 돈은 계좌로 넣어줄게, 이건 아쉬워서 주는 거야. 받아라. 아… 이제 아르바이트생 못 구하겠어.
내가 그냥 계속 있어야지… 세상이 어떻게 이러냐. "
아르바이트도 그렇게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1주 뒤,
매일 매일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구라곤 밝히지 않았지만 민서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건 당연했다.
저 카톡에 들어가는 순간, 어떤 휴대폰 너머의 흐릿한 눈동자가 반짝이며 사라진 '1'을 확인할 생각을 하니
민서는 차마 그 카톡을 열 수가 없어 카톡방을 들어가진 못한 채 미리 보이는 메시지만 한참을 들여다봤다.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프로필 사진에, 이름은 '.' 점 하나로 등록된 터라 그에 대해 어떤 정보도 알 수 없었다.
프로필 미리 보기를 해봐도 마찬가지.
일방적으로 마치 오랫동안 '아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전해오는 안부가 미칠 노릇이었다.
하는 소리였고 민서도 비슷한 경험에 웃은 적이 있었지만, 이 경우는 웃기지 않았다.
'뭐해'하고 물어오는 주체가 자신을 몰래몰래 훑어보던, CCTV를 두리번거리며 찾던, 자신에게 '다리가 추워 보이는데 한 번
봐야겠다'며 쫓아오던, 숨어있는 민서를 잡으려고 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낯선 남자'였기 때문이다.
헌데 민서는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설마 날 미행하는 걸까 소름 돋는 상상을 했지만 플스방을 그만둔 이후로 그 남자가 민서의 행방을 알 방법은 없었기에
민서의 페이스북 담벼락.
답은 하나였다. '낯선 남자'는 플스방에서 민서를 덮치려고 카운터 앞을 서성이다, 민서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와버린
휴대폰을 발견했을 것이고, 그때 민서의 번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을테고,
그 뒤로 민서가 플스방을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서의 휴대폰 번호를 통해 그녀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민서는 페이스북 계정을 바로 휴면 계정으로 돌렸다.
문자를 수신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하려던 무렵, 민서는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대학생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새면 좀 더 수그리며 구석으로 향한다.
바퀴벌레처럼 숨어있던 남자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씨익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민서다, 민서가 정문 앞으로 나왔다.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남자는 히죽거리며 민서를 먼발치에서 따라간다.
살짝 가까워진다, 대학로 앞 건널목을 다 건너자 그 차이는 상당히 줄어든다.
골목으로 갈수록, 민서가 무심코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할수록,
인적이 드물어질수록 그 거리가 좁혀든다.
이제 불과 3m도 떨어져 있지 않다.
민서가 자취하는 빌라 유리문으로 들어서자,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 하나가 스르륵 따라들어간다.
그 뒤론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CCTV에 자신의 얼굴이 이미 충분히 노출되어있는 것을 알고도 자신을 해하려 들었던 남자였다.
만약 법적 조처를 한다 한들, 남자가 먼저 눈치를 채고 민서를 해코지하려 든다면 연약한 민서로서는
저항하기가 힘들었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인적사항도 모르고, 1주일이 지난 시점이라 플스방을
다시 찾아간다 한들 이미 저장된 데이터에서 지워졌을 게 분명했다. 민서의 플스방 CCTV는 1주일까지
녹화가 가능했다. 왜 그때 따로 받아두지 않았을까, 단순히 '그 날은 무사했다'는 안도감에, '이젠 그만둔다'는
생각에 그랬던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남자는 아마 자신이 이 메시지를 읽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민서가 이 메시지를 보면서 충분히 의식하기를,
더 무서워하기를, 가녀린 눈망울이 흔들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세게 나가볼까,
그러면 좀 움츠러들지 않을까. 원래 이런 사람들은 기가 센 여자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힘없고 조용조용한 여자들은 자신이 도끼로 찍으면 넘어갈 나무인 것 마냥 들이대는 거 아닐까 하고.
민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뒤에 바로 도착한 카톡은 민서에게 그 마음이 실행될 수 없게 만들었다.
만나는 거네요.
그건 공권력에 의해 만나는 게 아니라, 저 남자가 앙심을 품고 자신을 찾아오는 경우일 것이다.
죽어도 싫어, 차라리 평생 연락을 씹으며 도망 다녀도 그 '시선'은 싫어.
민서는 카톡방을 지워버렸다.
민서는 다시 한 번 방안에 갇혔다.
나올 수 없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밖에서 문을 열려고 하지만 민서는 나올 수 없는 '공포'의 방안에.
신고하지 않는다면 남자의 일방적인 연락을 억지로 받아야 하고,
결국 어느 쪽이든 욕구가 충족되는 쪽은 남자였다.
남자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봐온 여느 여자들과 달리 플스방에 들어서자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그녀의 호의를 보며 남자는 알았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남자의 연락은 줄어들었다.
관심종자에겐 무관심이 답인 거였다고 민서는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그대로, 끝이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민서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고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만들까, 말까, 고민하던 무렵의 일이었다.
- 사진 -
무시해야 돼, 무시해야 돼. 하지만 '사진'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러자 이번엔 친구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바꾸고 나서 새로 바꾼 프로필 사진, 그전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그 메시지 밑으로 민서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놀란 친구는 미안한 마음에 훌쩍거리며 민서를 토닥거렸다.
그러나 민서는 지금 친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페이스북도 없는데, 바뀐 프로필 사진을 왜 가지고 있지? 설마 그거, 캡쳐한 거야? '
- 사진 -
그 사진은 민서가 바꾸기 전의 프로필 사진, 그 사진의 한참 전에 올렸던 프로필 사진이었다.
민서는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가만히 있는데도 윗니 아랫니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민서는 그만 펑펑 울어버렸다.
민서의 옆에 훤칠한 남자 하나가 같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난 듯 놀라운 영진이었다. 이 인연을 끝까지 함께 할 거라고, 예쁜 사랑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영진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간 '좋은 친구'로만 여겼던 영진이 이렇게나 듬직했구나…
민서는 기댈 수 있다는 게,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좋은 일인 줄 처음 알았다.
그래, 영진이만 옆에 있어주면 그놈도 절대로 못 다가와. 절대.
민서는 믿음직한 영진이 지켜주는 것이 몹시 든든했다.
사진 속 새로 태어난 연인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여느 연인들의 시작은 다들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 속 주인공처럼 살갑다.
서로 더 좋아해 봐야겠다고, 천천히 알아가야겠다고,
둘은 첫 사랑을 시작하며 함께 미소 짓는 사진을 둘의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다.
. . . . .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 일 없잖아.
그래, 숨기자.
ㅡ
흐리멍덩한 눈빛이 어떤 연인의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다.
이윽고 남자는 캡쳐한 사진에서 생긋 웃는 여자의 사진만을 잘라내기 한 후 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