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잔은 마치 한 사람처럼 착 달라붙은 한 쌍의 연인 앞에 놓여있었고,
다른 한 잔에선 커피 주인의 초조한 마음을 말해주듯 얼음 굴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우리 통해서 만나는 거면 얘도 자리에 무조건 나올 생각 있거든? 너 외롭지 않냐? "
활짝 웃는 웃음이 충분히 매력적인 한 아가씨의 셀카가 띄워져 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 '와, 예쁘다.' 하는 마음이 준영의 마음을 스쳤지만 이내 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도 자기소개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우려고 토익 학원까지 등록해놓은 마당에…
만날 때도 아니고, 잘해줄 자신도 없어. "
오빠 학원도 거기 있지 않나? 됐네, 됐어. 그죠? "
준영이 주저하자, 친구는 타이르듯이 재촉했다.
너 나랑 뭐 결혼하려고 만나냐? 아는 사람이니까, 친구니까, 아니야?
얘도 그냥 그 정도로 만나보란 거야. 내가 뭐 얘보고 맞선보러 오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랑 만날 때 너도 불러서 넷이 놀아도 되는 거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둘이서 볼 때도 있는 거지,
내가 지금 '자네 우리 딸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나?' 뭐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거냐?
그냥 아는 여자애 소개시켜주는 거야. 부담 갖지 마. "
그런 애였으면 왜 제가 오빠 소개해줘요. 저도 준영이 오빠니까 소개해준다고 나서는 거에요. 얘 예쁘죠? "
너 열심히 사는 건 알겠는데 그 핑계 대고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기회 놓친다. "
너 안 기다려준다고. 나하고 얘하고 우리 둘이서 내 친구 만나보라고, 좋은 애라고 붙잡아두고 있는 거야.
얘도 사람은 만나봐야 아는 거라고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너 이렇게 나 바보 만들 거야? "
그때 한 번 더 알아볼게. 너 이렇게까지 하는 친구 없단 것만 알아라. 내가 너한테 고마운 일이 많아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 같은 친구 없다. "
곤란하게 해드린 거면 죄송해요, 근데 진짜 얘 괜찮은데… 얘만한 애 없어요… 아쉽다. "
자신의 앞에서 커피를 나란히 들고 커플 셀카를 찍는 친구 커플의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괜히 연애 주제로 속이 편치 않은 탓인지 평소엔 느껴지지 않는 외로움이 슬며시 옆구리를 찔러왔다.
그럼 왜 외로워하지? 연애는 사치라면서, 왜 지금 부족함을 느끼는 거지?
필요한 만큼의 사랑도 못 채워서 외로워하면서, 연애가 사치라는 건 니가 생각해봐도 모순 아니야?
학교는 휴학이지, 무슨 일? 무슨 일? 예비군 아저씨 군대 다시 오래냐? "
내 이름 걸고 사람 이어주는 거, 쉬운 일 아니잖아. 근데 너라서 이렇게까지 한다.
누가 너 바짓가랑이 붙잡고 부탁까지 하면서 여자 만나보라고 하고, 자리까지 만들어줘.
너 어디까지 내 성의 무시할 거냐? 서운해지려고 그런다. "
얘 말대로 밥이나 먹고 온다고 생각해라, 곤란하게 하려는 마음 없는 거 알지. "
자신까지 포함해 8명, 내일 미팅에 참석할 사람들이 전원 포함된 단톡방은 왁자지껄했다.
고양이 사진처럼, 고양이를 닮은 이목구비가 시원한 미인이었다.
'말이 없는 한 분'이 바로 준영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준영은 이런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라리 국어능력인증시험을 풀라면 잘 풀겠는데, 뻔히 톡방의 숫자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니 더욱 분위기에 섞이지 못할 것 같았다.
대화창에도 수시로 자신의 잘남을 증명해줄 사진을 번갈아가며 올려대고 있었다.
서로 친해져 갈수록, 아무 사진도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해놓지 않은 준영의 프로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다 끼어들어서 'ㅋㅋㅋㅋ'도 쳐보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질문에는 '네ㅎㅎ' '아뇨ㅎㅎ' 대답도 했지만
얼굴도 마주 보지 않은 가상의 테이블 속 이미 투명인간이 되어있는 자신이 느껴지자 준영은 의기소침해졌다.
아… 그냥 안 간다고 할 걸, 안 간다고 할 걸,
토익학원 등록할 적에 쓰려고 대충 찍은 증명사진을 저장해둔 한 장, 이렇게 단 두 장밖에 없었다.
앞머리를 이리저리 넘기며 거울 앞에 서봤지만 거울 앞에 선 건 실수였다.
친구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어릴 적에 야구공에 맞아 살짝 휘어진 코가 오늘따라 신경 쓰였다.
스트레스로 여드름이 부쩍 올라온 피부, 언제 생겼는지 모를 왼뺨의 점 하나,
그냥, 그냥 평소엔 거울을 봐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왠지 카톡방의 저 미인들 앞에 서면
자신을 괴물처럼 쳐다볼까 봐 두려웠다. 날 혐오하는 거 아냐, 아니면 최소 비웃거나.
그 생각에 다시 거울을 쳐다보니 얼굴도 별로인 게 정색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엉망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댔어, 일단 인상만 좋으면 나머지는 얘기하면서 알아가는 거지,
웃어보자, 씨익…
학원, 아니면 학교, 아니면 알바, 아니면 집.
학원, 학교, 알바, 집, 학원, 학교, 알바, 집…
사육장 속 햄스터처럼 일정한 공간만을 돌고, 일정한 행동만을 해오느라 어느새 표정이 굳어있었다.
준영은 단톡방의 모두가 '내일 뵐게요'를 마지막으로 잠에 들 때까지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만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 술집,
평범 그 이상의 선남선녀들이 모여 자아내는 훈훈한 분위기.
은근한 썸.
이미 여섯 명은 여섯 아닌 셋이 되어 찰싹 붙은 채로 화기애애해져만 간다.
나머지 둘.
그중 하나는 준영이었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승식이 테이블 위에 농담을 던지면 어김없이 터지는 모두의 웃음,
그 농담만큼은 정말 웃겼기에 준영도 헤헤, 하고 같이 웃지만 그러고 나면 준영은 미칠 노릇이었다.
'야! 잘 돼가냐?'하고 날아온 친구의 카톡을 무시한 채 준영은 시계만 슬쩍슬쩍 쳐다봤다.
승식의 농담에도 웃지 않는 단 한 여자는 어제 사진을 보여달라던 김은비였다.
몹시 퉁명스러운 얼굴로 스마트폰만 가지고 노닥거리고 있었다.
우리 커플 대항전으로 게임 한 번 하죠? "
앞에 놓인 오징어땅콩을 오독오독 씹고 있던 준영은 그 눈치를 보느라 씹던 걸 멈췄다.
누가 봐도 그 표정은 죄송한 표정이 아니라 불쾌해서 떠난다는 식의 화 난 표정이었다.
준영의 입이 다시금 되새김질하듯 우적, 우적 조용히 씹기를 시작했다.
나머지 여섯 사람이 준영의 그런 얼굴을 흘끗 쳐다봤다.
커플게임을 하기 민망해진 분위기에 남자들의 헛기침이 몇 번 오갔다.
어떤 바보라도 은비가 집에 바쁜 일이 생겨서 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은비의 맞은 편에 준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을 때부터 준영을 애써 쳐다보지 않던 은비였다.
나머지 셋은 피팅모델 승식과, 그런 승식의 가까운 지인들로 외모, 키, 학벌,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수재였지만
의외의 참여자인 준영은 은비의 마음에 들 구석이 전혀 없었다. 준영 스스로는 보통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평균 이상의 사람들 옆에 선 준영은 보통 이하였다. 은비는 승식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하고 애교를 부리며
적극 공세를 펼쳤지만 승식은 자신의 맞은 편, 자신처럼 이목구비가 시원한 유미와 제일 먼저 달라붙었고
이윽고 나머지 두 남자도 자신의 파트너를 고르자, 이번 게임에서 은비의 파트너가 될 유일한 상대가 준영이
되었단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듯 뾰로통해져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짝이 저 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스마트폰만 쳐다보던 와중에,
하하 호호 눈을 맞추는 잘난 세 커플과 커플게임까지 하라니 그런 굴욕을 당할 순 없다는 듯 먼저 빠져버린 거겠지.
오징어땅콩의 개수도 더는 줄지 않았다.
누가 볼까봐 테이블 밑으로 한참을 내려놓은 준영의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화기애애했을 건데, 내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와서… 돼지같이 밥이나 처먹으러 와서…
오징어땅콩이나 주워 먹다가… 이게 무슨 행패야… 아…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 분위기 어떡하지. '
승식의 옆에 앉아있던 유미가 승식의 옆을 떠나 준영의 옆에 떡하니 앉았다.
달콤한 향기가 오징어땅콩의 냄새를 가시게 했다.
마치 준영의 옆에 조명이라도 켜놓은 듯 준영의 옆자리가 환해졌다.
준영 씨가 뭐 어때서요? 좀 조용하면 어때요? 착한 사람 좋다는 여자 얼마나 많은데!
저도 준영 씨처럼 착한 사람이 좋아요, 저 오늘 재밌게 놀려고 나왔어요, 진심으로 친해지려구요.
승식 씨는 주최자니깐 MC나 봐주세요! 전 준영 씨하고 짝할래요~ "
유미가 호호 웃으며 오징어땅콩을 뺏더니 자신의 입에 쏙 가져다 넣었다.
볼이 불룩해져서 방긋 웃는 모습에 준영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의 그런 숙맥 같은 모습이 뻔히 보일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왠지 준영은 그 오징어땅콩을 씹기가 힘들었다.
나머지는 각자 가는 길이 달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늦은 밤거리, 무수히 많은 간판 속 무수히 많은 사람 사이에 섞이자 서로는 금세 보이지 않았다.
준영은 게임을 하면서 러브샷 팔짱을 꼈던 자신의 팔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오는 걸 맡았다.
그러자 유미의 방긋거리는 웃음과 시원시원한 성격이 다시금 떠오르며 기분이 핑 돌았다.
흙 묻은 등산화에 한줄기 소나기가 내려와 흙을 씻겨 내려가자, 등산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천연색이 돌아온 것처럼
자신의 인생에 단 몇 시간일 뿐이었던 이 순간이 자신의 묵은 때를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준영은 단톡방에 들어가 승식을 친구로 추가한 다음,
승식에게도 선톡을 날렸다.
여태껏 그냥 칙칙하게 알바 끝나고 남자들과 스트레스 푸려고 마시는 술만 술인 줄 알았는데,
러브샷 자세로 마시는 술은 사랑의 묘약을 마시는 것처럼 달콤했다.
그 이목구비, 그 고운 머릿결, 그 하얀 목선…
연애… 라는 건 아직 시기상조겠지만, 이성을 멀리하는 건 확실히 바보 같은 짓이 분명했다.
친구, 그래, 그냥 친구! 지금처럼! 사귀는 건 신경 쓰지 말고, 지금처럼 같이 모여서 가끔 웃고 떠들고 놀고,
그렇게 지내면 되는 건데 왜 지금까지 어렵게 생각했지?
나한테 뭘 선물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면 되는 거잖아, 쉽네.
준영은 인생에 새로운 눈을 뜬 것처럼 앞이 환했다.
부르르, 카톡 진동 소리에 준영은 카톡을 확인했다.
준영은 유미를 다시 볼 생각에 벌써 기분이 들떴다.
누가 봐도 나머지 셋보다 떨어지는 자신의 옆에 스스럼없이 앉아서 자신의 짝이 되어주고,
말을 걸어주고, 소심하게 친 농담에도 크게 웃어주고, 웃을 때 내 어깨를 때릴 적의 감촉이 싫지 않아,
준영은 길거리에 선 채로 자신의 망상에 빠져들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준영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제 자신이 거울 앞에서 남의 시선을 지레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던
모습과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전전긍긍하는 유미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주자 시원한 미소로 고마움을 대신하는 유미,
그간 서로의 이야기를 얘기하다가, 자신의 이야기에 크게 맞장구치는 유미, 그 타이밍에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고, 다시금 분위기가 고조되자 우리 또 게임 하자고 먼저 외치는 유미, 승식은 새로 온 사람과 짝을 맺고,
사람이 늘어서 더욱 재밌는 게임… 이런 또 졌네, 벌칙으로 러브샷, 이건 나한텐 벌칙이 아니라 상인데, 후후후,
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 이번에는 유미 씨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밝고 쾌활하게 웃던
유미 씨가 왠지 머뭇거리다가, 작은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주곤… 자기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카톡하세요', 헤헤…
팔짱을 꼭 낀 채로 지나가는 젊은 저 커플, 저게 미래의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물끄러미 쳐다봤다.
와, 어쩐지 유미 씨를 닮았네… 어라, 정말 닮았잖아,
유미 씨는 반대방향 호선을 타야 한다고 했는데… 닮은 것치곤 너무 똑같은데…
준영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느끼고 허겁지겁 옆의 선간판 뒤로 몸을 숨겼다.
대로 쪽이 아니라 골목으로 들어가잖아, 저 골목은…
준영은 몸을 최대한 숨기며 둘의 뒤를 따라붙었다.
키가 크고 포마드로 머리를 꾸민 남자는 아무리 봐도 승식이었다.
발각한 것처럼 몹시 분노를 느끼며 둘의 뒤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모텔 앞에서 두 남녀의 사담이 들릴 만큼의 거리가 되자 준영은 그제야 뒤로 돌아 얼굴을 숨겼다.
폭탄도 뭐 그런 핵폭탄을 보내냐. 뭐냐 이게? 물 흐리지, 분위기 다운되지, 은비한테 사과까지 해야 하고. "
후회할 줄 알면서도 준영은 그 카톡을 클릭했다.
한껏 들떠서 다음을 기약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그 말에 '기회가 된다면' 부르겠다고 답하는 승식의 답변이 우문현답으로 느껴졌다.
스마트폰 옆 버튼을 눌러 다시금 스마트폰을 잠금 상태로 돌리자 곧 꺼진 화면이 주위의 간판불에 반사되어 승식의 얼굴을 비췄다.
아주 무시무시한 무표정이었다.
변한 건 없었다. 소나기가 아니라, 일종의 신기루에 불과했다.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니라, 인생 최악의 조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연애는 해볼 만한 거고, 친구부터 시작해보자고 힘차게 다짐한 자신이 얼마나 ㅂㅅ스러운지.
넌 여전히 기뻐하지도, 또는 화낼 줄도 모르는 놈이야.
애초에 그 자리에 갔을 때 환히 웃으며 자리에 앉지도 못했고,
찡그리는 은비 때문에 신경이 쓰여 전전긍긍하다가,
동정심에 옆에 앉은 남의 여자 덕분에 헤죽헤죽 웃다가, 혼자 사랑에 빠졌다가,
그걸 통째로 배신당하고도 승식이 얼굴에 침 한 번 못 뱉는…
소심한 놈,
그 무표정 속에서 숨겨진 씰룩대는 네 얼굴을 눈치챌 사람은 없겠지,
너…
아니, 솔직히 말해, 난 나를 공격하는 이게 자격지심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이란 걸 잘 알아.
그래.
나.
나… 왜 이렇게 불쌍하냐.
나 왜 이렇게 못났냐.
터덜터덜, 생기를 잃은 동공은 흡사 좀비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대로 집에 가봤자 이미 늦은 시간,
내일은 알바 하는 날.
그리고 다음 날은 학원 첫 수강.
학교, 알바, 학원, 집, 네 곳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구질구질한 옷차림, 꼬질꼬질한 반찬,
표정없는 얼굴로, 목적 없는 삶을 이어가려고.
아무 의심 없이 옮긴 발이 '물컹'하고 무언가를 밟자 그제야 '엇…'하며 준영이 현실을 마주했다.
사람이라도 밟은 건가,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건 해파리처럼 생긴 물렁물렁한 가죽이었다.
얇고 투명한 그 가죽은 일종의 마스크처럼 생겼는데, 인간의 얼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표정이 자연스러웠다. 눈, 코, 입이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재현해내고 있었다.
준영의 마음을 대변해주듯 엄청나게 싫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준영은 그 가면을 집어 들었다.
어떤 원리일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지는 몰라도 그 가면엔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고 늘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늘 자신의 감정에 배신당해온 준영이 잃어버린 것.
자신의 표정.
거울 앞에서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어색해하며, 그 버릇이 남들 앞에서도 그대로 전해져 어딜 가나 어색한 사람,
투명인간이 되어온 준영에게 없는 생생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가면이었다.
준영은 이윽고 누가 볼세라 옆에 세워진 한 트럭의 창문에 얼굴을 비추곤,
겁도 없이 그 가면을 아득바득 자신의 얼굴에 씌웠다.
잘 붙었나? 준영이 뺨을 어루만지자, 가면이 온데간데없이 맨살이 만져졌다.
뭐야, 준영이 뺨을 꼬집자, 아픔이 느껴졌다.
평소에 자신이 짓던 지을 듯 말 듯한 표정이 아니라, 몹시 풍부하게 움직인 얼굴이었다.
자신의 의지로 지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그 표정은 아주 압권이었다.
평소 아무리 연습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어지지 않던 살아있는 표정.
씰룩대는 가면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준영은 어느새 그 가면이야 있건 없건 무언가 달라진 자신의 얼굴에 흠뻑 빠져있었다.
지금쯤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을 승식과 유미 따위야 될 대로 되라는 듯,
준영은 싱글싱글 웃음이 나왔다.
반쯤 미친 사람처럼 웃었지만 그 모습은 아주 놀라웠다.
지나가는 이들 모두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준영을 한 번쯤 뒤돌아 보게 할 정도로 아주 기분 좋은 미소였다.
모두가 닮고 싶어 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쳐다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사실 이는 준영이 1달 전 뒤집어쓴 (그 가면의 실존은 불투명해졌지만) 가면이 가지고 있던 마력을 닮은 것이지만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가면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빠처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오빠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하고 물론 기쁘지만 사랑을 키워가기보단 동생으로서 아껴주고 싶은,
그 마음이 한껏 우러나와서 그걸 쳐다보는 정아는 마치 신 앞의 사제가 된 것처럼 그 얼굴을 경건히 쳐다보다가,
학원의 다른 남학생 두 명이 휘파람을 불며 준영을 놀렸다.
그 의문의 가면을 뒤집어쓴 날 이후로 준영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호감을 주고자 하면 지어지는 자연스러운 미소는 서비스업에 오래 종사한 베테랑을 연상시키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처음 보는 이도 자연스레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으며,
첫인상 이후에도 '와 이 사람 인상 좋네'하는 생각을 지속해서 주면서 작은 농담도 커다란 위트처럼 여겨지고,
작은 호의도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내 편이야'하는 신뢰를 심어주어 누구와도 허물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로, 학원에서 벌써 세 번째 이성으로부터의 고백을 받은 것만 봐도
준영의 지난 인생과는 차원이 다른 삶이 열렸단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언뜻 떠오르는 유미 생각에 잠시 준영의 기분이 언짢았지만 이내 환히 웃을 수 있었다.
지금만 같으면 언제라도 연애할 수 있어, 내 인생은 달라진 거야,
그런데 그 순간 두 동생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분명 준영 자신은 환히 웃고 있는데…
준영이 허겁지겁 거울로 달려가 보니 아뿔싸,
지극히 예전의 표정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 고백을 받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거울 속 자신이 마귀처럼 느껴졌다.
뭐야, 좀 웃어…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어.
둘마저 나가버리자 교실엔 준영 자신만이 남아있었다.
준영은 숨죽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도 얼른 취업해서 장가가라. 엄마가 그래야 잊어버리지. "
그나저나 우리 아들 요즘 표정 참 좋아… 너 정말 장가가는 거 아니야? "
원래 집에 오면 밥 먹었니, 네, 공부는 잘되니, 네, 이런 식의 단답만이 오가던 모자 사이였다.
이 또한 준영이 표정이 좋아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나아지자, 덩달아 어머니와도 쉽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 되어 그간에 없던 애교도 부리는 탓에 진전된 것이었다.
가면 이후의 삶이 지난 삶을 압도하고 있었다.
슬아는 준영의 사촌 누나로 준영과 어머니는 슬아의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참석해 앉아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아름답고, 축복해주고 싶은 순간이었기에 모두가 환히 웃으며 쳐다봤다.
준영 또한 그 모습에 환히 미소를 짓는데…
기쁜 마음으로 웃는다고 웃었는데, 자신의 입에서 나온 건 처절하게 울부짖는 절규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황당함에 옆을 돌아보자 충격에 빠진 채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회자가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방송이 울렸다.
그 모습에 준영은 미안해서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회자의 갈피를 못 잡는 목소리가 울리고, 하객들은 웅성거리고, 준영은 황당함과 미안함과 수치스러움이
한데 뒤섞여 분명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표정은 난데없이 입이 귀에 걸리도록 깔깔거리고 있었다.
몹시 경박하고, 남자의 웃음소리라고 듣기 힘든 소리였다. 익살스러운 표정은 더욱 그 경박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른들은 화를 내는 사람이 반, 말리는 사람이 반으로 하객들끼리도 다툼이 이어져 완전히 슬아의 결혼식이
엉망이 되었다. 이미 신랑은 두근거리며 신부를 기다리던 마음이 엉망이 되어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을 떠나버린
뒤였다. 준영이 이 모든 상황을 벗어나려 할수록 표정은 자신을 배신했다.
준영에게 모든 것을 열어준 가면이 이제 모든 것을 가둬가고 있었다.
이제 준영은 인정해야 했다, 파티는 끝났다는 것을.
외부의 어떤 연락에도 응하지 않은 채 철저히 외톨이가 되어버린 준영에게 진우의 카톡이 도착했다.
준영은 차마 그 카톡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이자 자신에게도 너무나 잘 해주었던 아현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더욱 우울해진
자신의 얼굴이 비춰졌다. 분명 최저의 기분이었음에도, 광대처럼 헤벌쭉 웃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을 공포가 휘감았다.
귀신 때문도 아니고, 살인마 때문도 아니고, 허나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기분이었다.
온몸이 벌벌 떨렸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간의 자기혐오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는 끔찍한 공포.
어느 쪽이 자신인지, 지금 혹시 실은 아현의 죽음에 정말 기뻐서 웃고 있는 건 아닌지,
예전처럼 감정을 숨기는 원래의 모습이 가면의 마력 때문에 그 감정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지금 나를 지배하는 건 위선이고 실은 이 표정이 정말 나의 그대로를 투영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할수록 준영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누군가를 만나도 두 얼굴의 자신을 조우해야하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모를 표정을 짓는 자기 자신은
그야말로 진정한 '괴물'이 되어있었다.
준영은 일어나서 세수하기 시작했다.
거울은 쳐다보지 않았다.
덕분에 대충 한 면도 자국은 상처투성이였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깊은 관계를 많이 쌓은 사람이었단 걸 말해주듯이,
많은 사람이 그녀의 영정사진 앞에 다녀가고 있었다.
준영은 절을 마친 후 진우의 옆에 앉았다.
진우는 술을 이미 많이 마신 듯, 잔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준영은 억지로 술을 따르지 않았다.
그저 들썩거리는 진우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장례식장의 우울한 분위기와 가장 친한 친구의 절망, 그리고 자기 자신의 폐쇄되어버린 세상에
생각이 이르자 준영 또한 소중한 친구 하나를 더 잃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때가 늦었다.
이번엔 확실히 자신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느낌이 이어졌다.
분명 '슬픔'이 기폭제가 되어 나오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까무러치듯 웃게 될 거란 건 그간의 이상한 경험들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와 다른 느낌이 준영의 몸을 휘감았다.
준영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려 하자, 갑작스레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단순히 감정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지만 웃는 것이 아니라,
울기도 전에 웃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분 좋은, 진짜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점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상태에서 입을 틀어막은 건 어쩌면 실수였다.
누가 봐도 그건 만족하는 웃음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웃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모두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아주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지이이익,
" 끄으으으읍, 끄으읍 "
지이이익,
" 그으읍… 그으읍… "
지이이익,
" 읍읍… "
지이이익,
" …… "
그리곤 책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이상현상은 더욱 심해져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다.
표정이 자신의 감정을 거스르는 것에 이어,
이제 표정이 자신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그 표정은 모든 것을 망가뜨려 놓았고,
'우울할수록 터져 나오는 웃음'은 갈수록 준영을 우울하게 만들었고,
그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웃음은 더욱 심해졌다.
우울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비웃는 자기 자신의 웃음소리를 듣는 고통을 아는가?
자기혐오가 아닌, 자신이 아니지만 자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공포가 준영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은 테이프의 시작점이 어딘지 찾는데 헤매고 있었다.
아주 행복하면서도, 아주 죽어버리고 싶은 역설적인 감정이 어두운 방을 기괴하게 감돌았다.
" 갸하하하하하하, 갸하하하하하! "
" 갸하하하하하하, 갸하하하하하! "
터벅터벅, 마치 처음 가면을 줍던 그 순간처럼 발을 질질 끌며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 갸하하하하하하, 갸하하하하하! "
씰룩대는 가면, 오랜만이지,
마침내 이별할 시간이 왔어,
" 갸하하하하하하, 갸하하하하하! "
" 꺄하하하하! 꺄하하하하! "
'나는 나야, 나는 나야,'
써걱! 써걱!
'나는 나야'
" 꺄하하하! "
써걱!
'나는 나야'
써걱!
써걱!
'꺄하하하!'
나는 나야
'써걱!'
"꺄하하하!"
써걱
'나는 나야'
" 갸흐흐으… "
뚜두둑, 뚜두둑,
핏물이 발밑에 가득 고였다.
그러나 처음에 모습을 감춰버린 투명한 가면이 아닌, 그것은 피범벅이 된 준영의 얼굴 가죽이었다.
그 가죽은 마치 준영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얼굴처럼 매우 정색하고 있었다.
얼굴 가죽과 커터칼이 바닥의 핏물 위를 떠돌았다.
얼굴에선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그걸로 된 것이다, 내가 웃을 때 웃을 수 있는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
이 웃음만큼은 거짓이 아닌, 가면이 아닌, 정말 준영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것 또한 원래 준영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단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