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8/read/33563060
1619년 음력 1월, 예허를 공격하여 후금을 둘러싼 대후금 포위망을 돌파해보려 했던 누르하치의 시도는 예허와 명군이 연합하여 후금군을 방어함으로서 실패한다.
시시각각 포위망은 좁혀지고 있었고, 또한 대후금 동맹군의 세도 강해졌다. 누르하치는 상황을 타개해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에게 눈에 띄인 것은, 지난 12월에 왔던 명나라 사신 이계학이었다.
그는 요동 경략 & 대후금 연합군 최고 지휘관인 양호의 명으로 후금에 파견된 이였는데,
누르하치가 강화 협상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예허 출병을 해버리는 바람에 후금 수도 허투 알아에 남아있던 차였다.
누르하치는 그와 만나 명나라의 요구 사항을 들었다. 명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라는 것이 명나라의 요구였다.
이전의 관계란 물론 조공과 충성으로 명의 질서 유지에 순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명나라의 최후 통첩이었다. (이후에 한 번 더 서신이 도착하긴 하나 그건 목씻고 기다리라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누르하치는 거기에 대해 이런 조건을 걸었다.
1. 자신의 명분을 인정할 것
2. 자신을 정식으로 왕으로 봉할 것
3. 대명칙서 1500여통을 추가로 자신에게 부여할 것 (칙서는 조공 무역 등에 쓰였다.)
4. 비단 3천필, 은 3천냥, 금 300냥을 자신에게 보낼 것
이것은 양호로서 도저히 승낙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다른 것은 둘째쳐도, 누르하치의 전쟁 명분을 인정하라는 것은 곧 명나라의 천명이 부정되는 것이었다.
결국 양호는 모든 협상 가능성을 버렸다. 그는 이제 진짜 공격을 준비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명의 10만 대군, 예허의 1만 군대, 조선의 1만 8천 군대가 전역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양호가 일단 결정을 내리자, 그의 휘하에 있는 개원 총병 마림, 산해 총병 두송, 요양 총병 유정, 요동 총병 이여백은 각자의 공격 위치로 움직였다.
예허의 긴타이시와 부양구 역시 명의 연락을 받고 마림과 합류했고, 조선의 강홍립과 김경서 역시 막바지 준비에 들어갔다.
명이 주축이 된 대후금 연합군이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있을 무렵 누르하치 역시 적들의 공격이 임박함을 알고 자이퍈에 대한 방어선 구축을 다시 서둘렀다.
또한 사르후에도 보르진과 1만 5천 4백여명의 병력(이중 대부분은 공병 혹은 아하들)을 보내어 성을 축성케 했다. 적의 공격 방향을 한정시키고, 최소한 붙잡아두려는 것이었다.
1619년, 마침내 장성 이북의 최강자를 가릴 시간이 임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