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대학생 가객. 노동야학 교사로 무장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군.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노동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린 청년 연출가. 손남승(66)의 찬란했던 20대를 대표하는 이력들이다. 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도청을 빠져나온 지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은둔자로 남아 있다. 그는 왜 세상과, 5·18과 단절하며 살고 있을까? 몇해 전 손남승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달 초 그의 근황을 다시 들었다. 지인을 통해 만남을 요청했으나 “나 같은 놈한테 앞에 나서 말할 자격이나 있겠느냐”며 모습을 끝내 드러내지 않았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손남승은 도청 담장과 도지사 공관의 철책을 연달아 넘은 뒤, 재래식 야외 화장실 안으로 숨었다. “똥물에 몸뚱이를 담그고 콧구멍만 내놓고 있었다고 그래요.” 김홍곤이 전한 손남승의 당시 상황이다. 아침이 밝자 손남승은 도지사 공관의 가사도우미에게 집으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타고 온 짐자전거에 ‘똥범벅’으로 올라타 집으로 도망쳤다.]
[손남승은 그 후 군에 갔다 제대한 뒤 백제야학 강학 출신인 여성과 결혼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손남승은 1989년 독일 유학을 떠났다. 김홍곤에겐 “헤겔과 마르크스의 혁명 철학을 더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1994년 김홍곤이 한국에 잠시 들어온 손남승을 만났을 때 “그날 새벽 도청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자괴감에 여전히 시달린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손남승은 끝내 학위를 받지 못한 채 1990년대 후반 귀국했다.
광주로 돌아온 손남승은 김홍곤의 말처럼 ‘5·18의 뒷것’으로 지금껏 살고 있다. 그는 1995년부터 시작된 5·18유공자 보상 신청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김홍곤은 그에게 정부가 지난해 말까지 받았던 8차 유공자 보상 신청을 권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신청하라”고 몇번을 설득했으나, 손남승은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홍곤은 “결벽증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격 조건이 조금 못 미쳐도 유공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나서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고 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으나 “먹고살아야 하니까 일은 하고 있다”는 짤막한 답변만 들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