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물론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없음
뒷날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글에 언급된 것.
이 글 제목을 풀면 '북국(北國: 발해)이 (신라의) 윗자리에 위치하는 것(居上)을 불허함(不許)을 사례하는(謝) 표문(表)'이라는 의미. 표문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외교 표문.
그러니까 당 조정에서의 의전에서 발해 외교사절이 신라 외교사절보다 상위 의전을 요청했는데, 당 조정이 이를 거절해서 신라의 최치원이 이에 대해 사례를 표한 거.
이 글이 쓰인 건 서기 897년 신라 효공왕 때의 일. 이 무렵이면 궁예와 견훤이 한참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특히 견훤은 국호와 수도를 정하진 않았지만 이미 왕을 자칭하고 있었음)라서 신라도 망해가는 시기였지만.
여기 보면 이런 대목이 있음.
발해의 건국이 서기 698년이고, 이 시기는 대략 698년~70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데 신라의 왕은 어린 왕인 효소왕. 아직 10대였던 효소왕이 대조영에게 대아찬 벼슬을 내렸다는 것.
신라의 골품제에 의하면 대아찬은 진골이 받을 수 있는 최저한의 벼슬이라서 신라는 대조영에 대해 진골 대접을 해준 것을 알 수 있음. 그리고 신라가 신생국 발해를 자기들의 번국(신하국)으로 인식했던 단면도 볼 수 있고.
대조영 입장에서는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퇴하고 거란, 돌궐과 이미 외교적 협력을 꾀했지만, 아직 신생국이었던만큼 국내가 안정되지도 않았고 당나라 역시 당시 동아시아 패권국이었으니 안보에 큰 위협이었기에 신라와도 친선을 도모하려고 사신을 보내서 접촉했던 것으로 보임.
특히 대조영 입장에서 신라와의 외교적 협력이 고려해 볼만한 외교적 옵션이었던 게 이 무렵은 아직 나당전쟁의 여파로 나당관계가 경색된 상태였어서 신라도 당나라를 견제하는 데 끌어들여 볼 만했던 거임. 그래서 최치원이 '그들이 의지하여 도움을 요청했다'고 쓴 거.(나당관계는 뒷날 성덕왕 재위기 중반 발해가 강성해지면서 긴장이 완화됨)
조선시대의 동사강목에서는 이 일을 다루면서 아예 '대조영이 신라에 귀부를 요청했다'는 식으로 쓰고 있지만 이건 말할 것 없이 지극히 신라 중심 사관이니 그렇게 볼 것은 아니긴 하지...ㅋ
산전수전 다 겪은 창업군주인 대조영 입장에서 어린 놈의~~~새퀴~~였던 신라의 잼민이 왕이 "너 내 신하ㅋ"라고 뜬금없이 이야기를 했다면 얼마나 같잖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알 수 없지. 근데 어쨌건 8세기 중반까지 발해와 신라의 공식 외교는 단절된 걸 생각하면...ㅋ
정작 효소왕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고, 대조영이 오히려 효소왕보다 더 나중에 죽었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이후로도 남북국시대 신라와 발해의 외교적 신경전이나 당나라에서의 신라 유학생과 발해 유학생이 경쟁하는 거 보면 후대인 입장에서는 은근히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능...
명목상 벼슬 받은 그 일화구먼
명목상 벼슬 받은 그 일화구먼
ㅇㅇ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받았어도 신라와의 외교를 쌩깐 걸 보면 대조영도 은근히 킹받았던 거 같긴 함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