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4715859
1612년 4월, 누르하치는 몽골의 코르친 세력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것은 몽골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울아의 부잔타이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확장성이 또 다시 줄어든 부잔타이는 조바심이 났는지 예허와 정략결혼관계를 추가로 맺으려 하고 또 동해 여진의 후르가 지역을 공격했다.
그런데 그 후르가 지역은 얼마 전 누르하치에게 복속된 지역이었다. 부잔타이가 그것을 알았을지 몰랐을지는 확실치 않으나 누르하치는 그 좋은 명분을 놓치지 않았다.
1612년 9월, 누르하치는 세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울아를 원정할 대군을 일으켰다.
첫째는 부잔타이가 건주에 복속된 후르가를 사사로이 공격했다는 것.
둘째는 누르하치 본인이 이미 혼인예물을 보내어 후비로 맞아들이려 했던 예허의 공주를 탐냈다는 것.
셋째는 누르하치가 부잔타이에게 시집을 보낸 조카딸 온저 공주에게, 현재의 시국(건주에게 울아가 압박받는 상황)에 대한 화풀이를 한 것. (신호용 화살인 고도리살을, 자신을 사사건건 압박하는 누르하치의 딸이면서 자신의 아내이기도 한 온저 공주에게 화풀이로 쏘았다고 한다.)
1612년 9월 중순, 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 망굴타이와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를 필두로 한 3만 대군이 누르하치의 소집령에 의해 허투 알아로 집결했다.
지금껏 1만명 이하로 군대를 출병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누르하치가 무려 3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할 정도로, 울아 원정은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울아가 비록 건주와의 오랜 싸움으로 힘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영민했던 부잔타이의 내치와 외치 아래에 그새 또 힘을 많이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집결한 군대 앞에 선 누르하치는, 이번 원정을 친정(임금이 직접 군대를 이끔)으로 이끌 것을 천명했다.
1600년대에 이르러서는 휘하 장수들이나 아들들에게 군사를 주어 파견하는 경우가 많았던 누르하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설 정도로
울아 정벌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계획이었다.
동년 9월 22일, 누르하치의 군대는 수도 허투 알아를 출발해 울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