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후금은 만리장성이나 산해관도 넘지 못하고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명나라가 망할거라는 예측은 어려웠다는 점.
(후금조차 명나라는 망하진 않는다는 전제로 정책을 세운 것들이 많이 확인되고.)
인조도 무조건적인 반금정책을 편건 아니고, 어느정도 비위를 맞춰줘서 전쟁은 안 일어나게 할려고 했었음.
그래서 명나라조차 저놈들 후금이랑 손 잡는거 아냐? 하고 의심할 정도.
---------------------------------------------------------------------------------------
실제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의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은 분명 명나라와 청나라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 집권 초기부터 명나라는 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1629년에는 조선이
"왜노와 통혼하고 노적에게 정성스럽게 대한다(媾倭款奴)"는 말이 그들 조정에서 나올 정도로 조선을 의심하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후금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후금은 불만을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국경 무역에 불만을 품은 후금 조정은, 1631년 만약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의 결말을 알 수 없었던 조선은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방책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한, 조선은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이 끝까지 예측을 불허했던 점은 그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만약 이자성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인 오삼계(吳三桂)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한인의 중원 지배가 그대로 유지됨과 동시에 만주인들의 중원 진공 또한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해 보면, 점차 청나라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청나라보다 최소 수십여 배에 달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신속하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모험이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조선이 그 보복을 피하고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먼저 인정한 뒤,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이 명나라 또는 그 뒤를 계승한 새로운 한인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은혜를 배신'한 번국(藩國)에 대한 보복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들 조정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무서운 보복전이 뒤따랐을 것이다.
조일수(Ilsoo David Cho),「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역사비평』121, 2017). (pp.362~364)
---------------------------------------------------------------------------------------
덤으로 광해의 중립외교론이 일어선게 일제시대 일본 식민사학자 겸 만주빠에 의한거란 점ㅁ
덤으로 광해의 중립외교론이 일어선게 일제시대 일본 식민사학자 겸 만주빠에 의한거란 점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