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
부수는 것이 아닌 인정하는 법
*이 글은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글은 ‘이카리 신지’와 ‘AT필드’에 초점을 둔 해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망치면 안 돼.....도망치면 안 돼...”
-이카리 신지-
평범한 14세 소년 이카리 신지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계획도시로 향한 그는 미사토 라는 여자와 수상한 비밀기지로 가게 된다.
그 곳에 있던 건 거대한 보라색 로봇 ‘에반게리온’. 아버지는 재회와 동시에 저 이상한 로봇에 타라는 말만 반복하고 밖에는 세상을 멸망 시킬 괴물이 있다고 한다.
평범했던 14세 소년 이카리 신지의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굉장히 많은 해석이 있는 작품입니다.
기독교적 해석부터 신극장판 까지 엮어 루프물 이라는 해석, 마지막 25,26화를 기반으로 한 특촬 영화라는 해석까지.
방영한 지 30년이 되어가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죠. 그렇기에 이번 글에서는 너무 깊게 가지 않고 이카리 신지와 AT필드를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관계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주 피곤함을 느낄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인간관계가 언제나 마음처럼 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한 명 한명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반응을 보이니 주변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주 아주 어려운 일이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지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불통의 화신인 아버지, 매번 틱틱대는 아스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레이. 겉으로는 성격 좋아 보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상처를 숨긴 미사토.
그 외의 인물들도 자신의 진심을 숨기고 진정한 소통을 하지 않아 깊은 대화에 인색한 모습을 보이죠.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와 신지가 쳐한 상황은 언뜻 비슷해 보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아 가는데 있어 깊은 속마음 까지 털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죠.
그대로 이야기 해버리면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이 말들이 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며 각자의 가면을 쓰고 조심스럽게 소통하며 관계를 맺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AT필드라는 설정입니다.
AT필드는 세상을 위협하는 괴수 ‘사도’와 그에 대항하는 무기 ‘에반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방어막으로 사도에게 재래식 무기가 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죠.
작품 최후반부에 밝혀지지만 이 AT필드는 사실 인간들에게도 있습니다. 그 힘은 거대한 사도에 비해 미약하나 AT필드가 붕괴하면 경계가 허물어지며 인간은 LCL이라는 용액으로 변해버립니다.
작 중에서 카오루가 직접 언급하듯 AT필드는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벽입니다. 나와 상대를 구분 짓는 경계선인 셈이죠.
그리고 세계의 뒤편에서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던 비밀조직 ‘제레’의 최종 목표가 바로 각성한 에반게리온 초호기를 매개체로 인류보완계획을 발동하는 것.
다른 말로 모든 생명체의 AT필드를 붕괴시켜 전부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관계에서 어떨 때는 벽을 느끼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상대 마음을 다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하죠.
이런 상상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 것이 제레의 인류보완계획입니다.
이카리 신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여정을 겪으며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속내를 숨긴 터라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그랬기에 상처를 주었으며 동시에 신지와 주변 인물들은 극단에 몰리는 일들까지 겪죠.
그런 신지에게 인류보완계획의 트리거인 에반게리온 초호기 파일럿이라는 자격으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지긋지긋한 인간관계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마음의 벽을 허물어 하나가 되는 인류보완계획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서로의 다름과 마음의 벽을 인정하고 평소처럼 살아갈지를 선택할 기회죠.
이야기를 쭉 지켜봐 온 저는 신지가 겪은 상황들에 안타까움을 느껴 그가 인류보완계획을 선택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신지는 선택의 기로에서 내면세계와의 수많은 대화 끝에 후자를 선택하게 되죠.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어떤 일을 하던 많다 적다의 차이일 뿐 모두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어긋나고 상처 입으며 좌절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단순히 하나가 되는 과격한 방법보다 서로 마음의 벽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신지는 아스카의 틱틱 거리는 말에 상처 입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시간이 즐거웠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하던 미사토는 누구보다 신지를 아꼈으며 소통을 거부하던 겐도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을 후회했듯이 마음을 숨긴다고 전부 더러운 속내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사회에 툭 떨어져서 마음의 벽에 치이며 인간관계를 어려워하는 우리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말합니다.
“무서운 거야? 사람과 접촉하는 게.
타인을 모르면... 배신 당할 일도.. 서로에게 상처 입힐 일도 없지
하지만 쓸쓸함을 잊을 수 있는 일도 없어”
-나기사 카오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