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6시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를 발매하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 사진 안테나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본명 조윤석)에게는 여러가지 직함이 있다. 스스로 노래를 지어부르는 가수,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은 화학자, 스위스 로잔공대 대학원 생명공학 박사 그리고 자신의 노래를 책으로 에세이로 펴내는 작가, 제주에서 직접 감귤농사를 짓는 영농인이다. 누군가는 영원히 화합하지 않는다고 여길 법도 한 ‘문과’와 ‘이과’의 접점을 한 몸에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체계적인 구조를 조곤조곤 전하는 그와의 만남은 아주 따스한 감성의 수학공식을 읊조리는 말을 듣는 듯한 느낌이 있다. 문과 특유의 이성도 아닌 이과 특유의 지성도 아닌 그 어딘가의 ‘합성’이다.
그런 그가 2년 만에 나온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를 통해 아주 그다운 시도를 했다. 바로 반려견의 목소리를 비롯한 세상 만물의 소리를 채집해와 그만의 디지털 감성을 덧대어 만든 것이다. 심지어 반려견 보현이 보컬로도 참여하고, 작곡도 한 곡이 있다. ‘아날로그는 반드시 따뜻하다’ ‘디지털은 반드시 차갑다’ 그러한 이분법에서 그는 저만치 비켜서 있다. 오히려 이런 이분법을 떠나 그의 음악은 자유를 얻었다.
그의 앨범에는 반려견 ‘보현’이 표지로 등장한다. 만 10살이 된 셔틀랜드 쉽독은 보현은 오랫동안 루시드폴 음악의 영감이 됐다. 이전 ‘약속할게’ 등의 노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보현은 이제 아예 작업의 파트너가 됐다. 짖는 소리, 으르렁 대는 소리, 자주가는 산책장소에 가면 좋아서 내는 특유의 소리, 유리문을 두드리는 일상의 소리 뿐 아니라 지난 12일 선공개된 싱글 ‘콜라비 콘체르토’에서는 아예 작곡가 겸 가창‘견’으로 등장했다.
“보현이 콜라비라고 단단한 채소를 좋아해요. 약간 사과같은 느낌도 있는데, 이걸 먹을 때 사람의 구강구조로는 도저히 날 수 없는 상쾌한 소리가 나요. 간식처럼 하나씩 주다가 ‘이것도 역시 음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걸 채집해서 따로 컴퓨터로 재밌게 변주해 여럿의 보현이 내는 듯한 소리로 합쳤죠. ‘콘체르토(Concerto)’는 ‘협주곡’이라 칭하는데 서로 다른 속도와 높낮이로 반복되는 보현의 소리가 한 곡의 음악이 됐죠. 저작권도 따로 보현의 이름으로 받을 거예요. 이미 통장도 만들어뒀습니다.(웃음)”
16일 오후 6시 발매되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의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 음반 재킷에 등장하는 루시드폴의 반려견 보현. 사진 안테나
물론 반려견에 애정을 주는 아티스트는 많다. 하지만 오롯이 그 교감을 청각화해 앨범으로 낼 수 있는 작업은 쉽지 않다. 2년 만에 한 번씩 내는 앨범이 이 같은 독특한 시도를 끼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지난해 여름 한 출판사에서 그림책 번역 제안을 받았고 제주의 집 인근에 있는 유기견 보호소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보현의 사진집이 아이디어로 등장했고 그는 이걸 정규앨범으로 확장해 보현의 참여를 시도했다. 그가 이렇게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게 된 사연도 아이러니하다.
“지난해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을 심하게 다쳤어요. 정말 일정시간 기타를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됐죠. 혼자 돌파구를 찾다가 굳이 손가락으로 코드를 짚을 필요가 없는 전자음악에 심취하게 됐어요. ‘그래뉼라 신테시스(granular synthesis·소리를 배열, 가공, 조합해 다른 사운드를 만드는 디지털 음악합성기법)’ 등 각종 전자음악의 체계를 공부하게 됐죠. 보현 때문에 산책도 많이 하는데 계절별 아침 새소리, 하루에도 여러 번 분위기가 변하는 공간의 소리를 음악으로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렇게 12곡을 준비했습니다. 실제 보현의 심장소리나 여러 소리가 베이스로 변환된 곡도 많아요.”
다분히 그 시작은 감성적이지만 이를 음악으로 옮기는 과정은 공학자답다. 그는 1년을 넘게 꾸준히 아침에는 음을 채집하고 낮에는 이를 디지털화해 여러 과정을 거쳐 음악에 맞는 소리로 변환했다. 앞으로는 나무가 만드는 노래도 시도해 볼 참이다. 당연히 나무도 생명체니까 내부에 전기적인 흐름이 있을 테다. 이를 감지해 전기신호를 음파로 바꾼다면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무를 위한 노래는 있지만 나무가 만드는 노래는 금시초문이다.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는 학자답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루시드폴의 음악은 ‘조용조용하다’는 하나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더라고요. 원한 건 아니지만 강제적으로 기타와 떨어지게 됐고 이 상황에서 ‘엠비언트(ambient·심신의 완화를 이루는 기능적인 명상음악)’ 장르에 관심이 가게 됐어요. 이 작업은 마치 실험실에 있을 때와 비슷해요. 결국 기타를 업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큰 시련이었지만 음악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해방이 됐죠.”
16일 오후 6시 정규 9집 앨범 ‘너와 나’를 발매하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왼쪽)과 그의 반려견 보현. 사진 안테나
지금까지 당연히 ‘어쿠스틱이나 아날로그가 따뜻하다’고 여겨왔던 그에게도 가치관에 일대혁신이 일어났다. 오히려 인공적인 소재를 통해 빚어내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오히려 자연의 소리를 왜곡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디지털 악기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고 오히려 ‘도구가 많아졌다’고 생각하는 게 그가 얻은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반려견을 위한 공연’도 생각해보고 있다.
“정말 단출한 구성과 반려견들에게 자극이 되지 않은 사운드를 추구한다면 눈높이에서 강아지들도 휴식을 할 수 있는 공연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번 앨범을 통해서 보현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보현의 입장에서 보는 세계도 많이 체험하게 됐죠. 결국 인간이 할 수 없는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대한 경험을 해본 것 같아요.”
여러가지 수식어가 있지만 그가 결국 추구하는 건 음악인의 길이다. 귤농사를 통해 나무를 연구하고, 디지털 악기를 통해 소리를 재가공하는 것도 결국 음악이라는 큰 바다를 헤엄치는 도구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에게 새로운 음악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연구와 가깝다. 지식의 새 지평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학자의 순수한 즐거움. 루시드폴은 이를 음악적으로 변환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