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시스 & 얼라이즈: 1942> 제2차 세계 대전 1편
찰리의 테마 기행
<액시스 & 얼라이즈: 1942>
- 제2차 세계 대전 1편 -
⟨액시스 & 얼라이즈: 1942⟩는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게임의 배경이 되는 1942년을 중심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간단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1941년까지의 전황
1) 유럽 전역
프랑스를 6주 만에 무너뜨린 독일 만슈타인 장군의 낫질 계획 작전도. 가장 아래 있는 긴 빨간색 화살표가 독일군의 주공인 기갑부대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주력이 북쪽에 묶인 사이에 방어가 허술한 아르덴 숲을 돌파해 연합국을 포위해 무너뜨렸다. 고립된 연합국 부대는 덩케르크를 통해 탈출한다. (출처: 나무위키 “프랑스 침공”)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은 소련과 손을 잡고 한 달여 만에 폴란드를 점령했고, 1940년에는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며 유럽 대륙의 지배자가 됩니다. 이제 유럽에서 독일에 맞서는 국가는 영국 정도만 남았을 뿐이었죠.
독일은 영국 본토를 노린 상륙작전을 진행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서는 영국의 제공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약 4개월에 걸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진행되었고 영국이 승리하며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단념합니다.
영국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서유럽의 패권은 여전히 독일의 손에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후 영국은 꾸준히 독일에 폭격을 가하며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견제합니다.
이후 독일은 눈을 동쪽으로 돌립니다.
비록 불가침조약을 맺은 사이였지만, 독일과 소련은 서로가 공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사상적으로 적대하는 관계였고, 경제적으로도 독일은 소련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난적 프랑스를 손쉽게 점령했던 경험으로 인해 독일 군부는 소련과의 전쟁을 쉽게 보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도. 초록색 선이 독일군의 목표였던 A-A라인, 빨간색 선이 추축국이 실질적으로 진격한 한계선이다. (출처: 나무위키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장인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독일은 병력을 세 집단군으로 나눠서 12주 안에 전쟁을 끝낼 계획을 세웁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목표는 북쪽 백해의 항구도시 아르한겔스크와 남쪽 카스피해의 항구도시 아스트라한을 연결하는 A-A축선까지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하여 소련과 서방의 교류를 차단하고, 아스트라한까지 진격하여 캅카스 지대의 유전을 확보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지요.
하지만 소련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공업지대를 동쪽으로 옮겨서 생산력을 보존하고 180개의 사단이 궤멸되어도 360개 사단을 충원하는 놀라운 동원력을 보이며 독일에 끈질기게 저항합니다.
그 결과 전선은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는 선까지만 진격할 수 있었고,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30km 지점까지만 간신히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남부집단군은 크림반도의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에서 진격이 멈췄습니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며 단기 결전을 기준으로 준비된 독일의 보급 상황으로는 겨울에 공세를 이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1942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2) 지중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지중해의 세력도. 노란색이 추축국, 초록색이 연합국, 회색은 중립국의 영토. 이중 남유럽과 프랑스는 추축국에 의해 함락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독일의 선전에 고무된 무솔리니는 영국의 식민지인 이집트 왕국을 침공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25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했음에도 3만에 불과한 이집트 주둔 영국군에게 패배하여 이집트는 커녕 기존의 리비아 식민지마저 밀리고 맙니다.
당시 영국군은 10주 동안 800km를 진군하며 13만 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둡니다. 호기롭게 전쟁을 벌였지만, 가지고 있던 리비아 식민지마저 뺏길 위기였던 것입니다.
무솔리니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립국이던 그리스 왕국을 침공하였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졸전을 거듭합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 참전해 지휘하는 에르빈 롬멜. (출처: 위키피디아 “에르빈 롬멜”)
이탈리아가 이렇게 졸전을 거듭하여 남부 유럽 전선이 흔들릴 것을 걱정한 히틀러는 결국 독일군을 이 전선에 투입합니다.
우선 북아프리카에는 사막의 여우로 유명한 롬멜 장군을 아프리카 군단장으로 임명합니다.
본디 독일의 목표는 전선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이었지만, 롬멜은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롬멜의 지휘하에 독일과 이탈리아 연합군은 1주일 만에 다시 800km를 진군하며 영국군을 몰아내었고, 영국군이 거세게 저항했지만 토브룩까지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발칸 반도에서는 독일이 참전하자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그리스 왕국이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영국은 그리스 왕국에 병력을 파병하여 공동전선을 펼쳤지만, 패배가 확실해지자 철군했습니다. 결국 독일에 함락된 그리스는 괴뢰국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지중해 인근 대부분의 국가가 추축국이 되었지만, 영국은 지중해 함대와 지브롤터와 몰타의 공군기지 덕분에 지중해의 제해권을 추축국에 내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제해권을 바탕으로 이집트로 꾸준히 보급하면서 독일의 보급은 견제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독일군을 밀어내고 리비아를 다시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3) 태평양 전역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을 진행하는 데 필수적인 석유와 고무 같은 자원이 모자랐는데, 이 때문에 서구 열강이 차지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식민지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일본이 점령하면 전략 자원을 확보할 수 있음은 물론 중국을 고립시켜 중일전쟁의 전황을 뒤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게다가 동맹국인 독일이 유럽 전역을 장악한 덕분에 프랑스나 네덜란드의 식민지들은 사실상 주인 없는 땅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은 우선 비시 프랑스와 협의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사실상 점령했고, 이후 인도네시아의 망명정부도 압박합니다.
일본의 이러한 행보에 미국은 영국과 함께 중화민국에 차관을 제공하고 이후에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망명정부까지 포함하는 ABCD 포위망을 결성합니다.
이 포위망의 핵심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제재였는데, 당시 일본이 수입하던 석유의 80% 이상이 미국산이었던 만큼 이는 치명적인 조치였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해결책은 역시 전쟁이었습니다.
영화 ⟨진주만⟩ 중 진주만 공습 부분.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그 유명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합니다.
동남아시아 전역에 대한 전쟁을 개시하기에 앞서 일본군의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피해를 주는 것이 이 기습의 목적이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진행된 이 기습으로 인해 미국의 태평양 함대는 하와이에 정박한 전함 8대 중 4대가 침몰하고 4대가 손상되었으며, 기지에 주기된 항공기도 대부분이 손상되거나 파괴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항공모함 4척은 다른 작전에 나가거나 정비를 받기 위해 하와이를 떠난 상황이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국은 이 항공모함들을 중심으로 태평양함대를 재건할 수 있었지만, 태평양함대가 본격적으로 태평양 전역에 나서는 것은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부터였습니다.
이렇게 반년 동안 태평양 함대가 발이 묶인 사이, 일본은 남방작전을 벌여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합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은 태평양을 장악해 나갔고, 1942년 중순 경에 최대 강역에 도달했다.(출처: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 대전”)
⟨액시스 & 얼라이즈: 1942⟩의 초기 지도는 바로 이 상황까지 전개된 1941년 말까지의 전황을 담고 있습니다.
독일은 모스크바 코앞까지 진격에 성공했으며,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키고 동남아시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연합국은 본격적으로 반격에 돌입합니다.
https://www.koreaboardgames.com/magazine/menuDetail?boardCd=contents&postNo=1151
찰리의 테마 기행
<액시스 & 얼라이즈: 1942>
- 제2차 세계 대전 2편 -
⟨액시스 & 얼라이즈: 1942⟩는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전쟁인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추축국에 유리하던 전황을 연합국이 뒤집기 시작한 계기가 되는 전투들을 알아보겠습니다.
2. 연합국의 반격
1) 유럽 전역
1942년이 되며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선 것은 소련이었습니다(소련이 가장 먼저 차례를 시작하는 것이 나름 역사의 고증인 셈입니다).
소련은 1941년 12월에 로스토프 전투와 모스크바 공방전을 거치며 독일의 진격을 막고 전선을 물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고무된 스탈린은 이 기세를 몰아 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완전히 쫓아내고자 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 전선 전역에서 반격을 명했고, 일부 전선에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선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로 무의미하게 병력만 소모할 뿐이었습니다.
한편 독일은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장성들은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소련군의 기세를 꺾는 작전을 제안했지만, 히틀러의 눈은 캅카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군은 만성 석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캅카스 지역의 유전을 차지하여 석유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노릴 것이라 확신하여 캅카스 지역에 대한 공세 조짐과 첩보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독일은 청색 작전을 개시해 캅카스 지방으로 진격한다. 이때가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중 최대 강역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청색 작전”)
6월 28일 독일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리코프(현재의 하르키우)를 탈환하고자 공세 중이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맙니다.
독일군은 보급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쾌진격을 이어 나가며 캅카스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독일군의 선전에 고무된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앞에 두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로 진격하고 나머지는 남진하여 캅카스의 유전을 점령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기껏 병력을 나눠 점령한 캅카스 유전은 소련군이 미리 파괴를 하여 즉시 사용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아 당장 점령한 이득을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병력을 나눈 여파로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지옥이 펼쳐집니다.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인만큼 정치적인 상징성이 큰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의 주요 생산기지일 정도로 캅카스 지방의 공업 중심지였고, 볼가강을 따라 소련 남쪽의 자원을 모스크바로 운송하는 수운의 중심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를 무시하고 캅카스 지방으로 진격하면, 스탈린그라드를 기점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의 반격에 후미가 노출되기 때문에 캅카스 지방을 점령하려면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폭격을 진행하고 기갑사단을 앞세워 도시에 진입합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독일군의 공세에 소련군은 공장에서 갓 나온 전차를 바로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분전했으나, 독일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도시 외곽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한 장면. 소련은 이렇게 볼가강을 통해 병력을 투입하며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냈다.
하지만 시내에 진입하면서부터 독일군은 장기인 기갑 사단을 활용한 기동 포위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이 자랑하는 기갑부대도 폐허 때문에 시내 진입이 어려워 활약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소련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교환비로 승리해 온 독일군이었지만, 시가전에서만큼은 그들도 소련군보다 나은 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시내를 대부분 장악하는 데 성공하며 소련군을 볼가강 인근의 교두보까지 밀어붙입니다.
소련군은 강 건너에서부터 보급과 포격 지원을 받아 가며 필사적으로 분전하며, 간신히 버텨냅니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으로는 전황을 뒤바꿀 수 없었습니다.
소련군은 추축국의 약점이었던 측면을 돌파해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고립시킨다. 남쪽의 화살표는 고립된 제6군을 구원하다 실패한 만슈타인 원수의 돈 집단군이다. (출처: 나무위키 “스탈린그라드 전투”)
11월이 되자 소련군은 전황을 뒤바꾸기 위해서 역습을 계획합니다. 당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던 독일 제6군의 측면은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전력은 독일군보다 약했고, 그나마도 수가 모자라서 넓은 전선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소련군은 이 틈을 노리고 90만 대군을 동원해 전선을 돌파했고, 33만에 달하는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 가두는 데 성공합니다.
병력을 나누지 않았다면 캅카스로 진격했을 병력들이 이쪽 측면을 방어하였을 테니, 독일군은 병력을 나눈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은 곧 보급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독일 본국에서는 항공으로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워낙 대군이 포위되어 있다 보니 수송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나마도 소련 공군의 요격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구출 작전도 진행되었으나, 포위망을 돌파하지 못해 결국 실패합니다.
결국 43년 2월 2일에 독일 제6군은 항복합니다.
33만에 달하던 병력은 9만 1천 명만 남았고, 이중 훗날 독일에 살아 돌아온 인원은 고작 6천 명뿐이었다고 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40만 명, 다른 추축국 군대까지 포함하면 80만 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사상자 40만 명은 독일이 향후 서부전선 전체에서 잃은 군대의 숫자와 비슷한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00만 명이 전사하면 200만 명을 동원했던 소련과는 달리,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입은 피해를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회복하지 못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쟁을 기점으로 동부전선의 기류는 달라집니다.
소련은 일방적으로 밀리던 과거와는 달리 독일 못지않은 제병합동 전술을 구사하며 반격에 나서기 시작한 반면, 독일군은 이전과 같은 돌파력을 더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2) 지중해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지중해 전선 최대 강역. 초록색 선이 추축국의 강역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제2차 세계 대전의 지중해 및 중동 전구”)
1942년에 롬멜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합니다.
몰타 항공전으로 인해 보급선을 견제하던 영국군의 움직임이 위축되었고, 전선이 뒤로 밀려 보급선도 짧아져서 보급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었고, 오랜만에 보급을 안정적으로 받은 김에 영국군을 완전히 밀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영국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예측하지 못해서 전선에서 밀려났고, 토브룩 인근의 가잘라에서 방어선을 펼쳐 저항했으나 독일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방어선을 돌파하고 토브룩을 점령합니다.
토브룩에는 영국군이 미처 폐기하지 못한 다량의 보급품이 있었고, 롬멜은 이 보급품을 바탕으로 리비아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진격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리비아 영토를 내주는 것과 원래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가 돌파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영국군은 엘 알라마인에서 필사적으로 방어전을 펼칩니다.
이 무렵이 되자 보급은 롬멜의 발목을 또다시 붙잡습니다.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보급선이 다시 길어진 데다가 몰타섬이 살아나며 영국 해군과 공군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칠은 반격을 지시했으나, 당시 중동 사령관이었던 오킨렉 대장은 이를 거부한 끝에 인도로 전출됩니다.
오킨렉 대장이 직접 지휘하던 8군 사령관으로는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이 부임합니다.
몽고메리는 전선을 유지하며 착실히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풍족해진 보급품을 모으는 한편, 거듭된 패전으로 인해 롬멜에게 압도된 부하들을 질책하고 병사들을 혹독히 훈련하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요약 영상. 1942년 말이 되자 연합국의 대대적인 반격에 추축국은 속절없이 밀려난다.
1942년 10월 23일,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몽고메리는 공격을 개시합니다.
당시 롬멜은 병을 얻어 독일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영국군의 공세 소식을 듣고 급히 북아프리카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독일군이 아무리 분전해도 몽고메리는 물량을 믿고 진격했으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엘 알라마인을 점령합니다.
한편 1942년 11월에 미군은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에 상륙하는 횃불 작전을 개시하여 본격적으로 대서양 너머로 군대를 투입합니다.
프랑스 군대의 예상치 못한 저항이 있었지만, 미군은 무사히 알제리를 점령할 수 있었고, 이제 독일군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튀니지까지 밀려나며 최후의 항전을 벌였으나, 1943년 5월이 되자 더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어 항복합니다.
이제 연합국은 북아프리카를 교두보로 삼아 이탈리아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태평양 전역
영화 ⟨진주만⟩ 중 둘리틀 특공대의 일본 폭격 장면.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본 본토가 폭격을 받은 사건은 일본 군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함대를 잃은 미국은 군과 시민들의 사기를 위해서 무언가 큰 전과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함대 전력으로는 일본군에 맞서거나 유효한 타격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입안된 작전이 항공모함에 육군 폭격기 B-25를 실어 일본 본토를 타격하는 둘리틀 특공대 작전이었습니다.
B-25는 항공모함에 탑재될 것을 상정하지 않고 개발된 기체이기 때문에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장비를 최소한으로만 실어야 간신히 이함이 가능했고, 착함은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둘리틀 특공대는 폭격을 마친 후 중국으로 날아가 폭격기는 버리고 조종사만 귀환하는 식으로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폭격에 참여한 B-25는 16기로 수는 많지 않았지만, 이 작전의 목적은 실질적인 피해보다는 심리전의 목적이 컸기에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리틀 특공대는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주지는 않았으나, 일본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본토에 대한 공격은 일본 해군에게 큰 정치적인 압박을 주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1년 동안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는데, 불과 4개월 만에 본토를 위협한 것입니다.
또한 얼마 후 벌어진 산호해 해전에서는 진주만 공습을 피한 미국 항공모함과의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부담을 느낀 일본 해군은 미국 항공모함 함대를 제압할 필요를 느꼈고 미드웨이 해전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화살표로 표시된 곳이 미드웨이섬이다. 점으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일본에서 하와이로 가려면 지나치기 어려운 요충지이다. (출처: 구글 어스)
미드웨이는 하와이로부터 북서쪽으로 3,4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태평양 최전선이었던 섬으로, 이 섬이 돌파되면 그다음은 바로 하와이였습니다.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을 잡기 위해 미드웨이부터 점거해야 했고, 미국은 미드웨이를 어떻게든 지켜야 했습니다.
양측의 주요 전력은 미국은 전함 없이 정규 항공모함 3척과 중순양함이 7척이었던 반면, 일본은 전함 11척, 정규항공모함 4척으로 차이가 컸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압도적이었던 해군 전력을 나누는 바람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전력은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1942년 6월 3일 항공모함 4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군 기동함대는 미드웨이섬을 공격합니다.
일본군은 공습을 통해 미드웨이 기지의 탄약고와 유류 저장고 등 시설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활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아서 당장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한편 공습에 참여한 일본군 항공기들은 기지의 엄청난 대공포화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공격을 이끌던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는 추가 공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미국 항공모함을 대비하여 대함용 무장을 장착한 함재기들의 무장을 지상 공격용으로 바꿀 것을 지시합니다.
자신들이 기습을 했다고 판단하여 미국 항공모함 함대를 배제한 것인데, 사실 미군은 도청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일본 함대를 맞상대할 항공모함들이 미드웨이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고, 일본 정비사들이 한창 함재기들의 무장을 바꾸던 시점에 이들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나구모에게 전해집니다.
나구모는 함재기들의 무장을 다시 원복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안 그래도 난장판이었던 항공모함 내부는 위험한 폭탄들이 굴러다니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나구모는 작업을 독촉했지만, 미드웨이 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의 공격 때문에 작업은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일본 함대 상공에 도착합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뇌격기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뇌격기 대대들은 단 한 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하며 거의 모두 전멸합니다.
당시 미국의 어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조종사들의 전술적인 능력도 숙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축차공격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은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하느라고 정비를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런 와중에 방공임무를 하던 제로센들은 탄약과 연료 문제로 오히려 착함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영화 ⟨미드웨이⟩의 하이라이트인 미국 급강하폭격기 편대의 폭격.
일본 항공모함들은 저공에서 공격하는 미국 뇌격기들에 집중하느라 폭격 직전에야 미국 급강하폭격기를 확인했습니다.
제로센이나 방공포로 대응하기에는 늦어도 너무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항공모함은 카가였습니다. 급강하폭격기 28대가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발의 폭탄을 카가에 투하했고, 이 중 5발이 카가에 명중했습니다.
한편 카가에 공격이 집중되는 것을 확인한 조종사 3명은 옆에 있던 아카기로 기수를 돌립니다.
당시 카가와 아카기에는 미처 이함하지 못한 채 연료와 무장을 가득 실은 함재기들과, 그 함재기들로부터 떼어낸 교체무장들이 산재해 있었고, 이들이 명중탄으로 인해 엄청난 유폭을 일으킵니다.
카가와 아카기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고 침몰합니다.
한편 카가와 아카기의 북서쪽 방향에 있던 일본 항공모함 소류에는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급강하폭격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류의 장병들은 남동쪽 방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전에 집중하느라 자신들의 북서쪽에서 접근한 미국의 급강하폭격기들을 너무 늦게 발견했고, 카가 및 아카기와 동일한 운명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는 항공모함이 한 척 남아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히류에게 반격을 명합니다. 히류에서는 1차로 급강하폭격기를 내보냈고, 이 편대는 요크타운을 발견해 공격하여 기관실에 타격을 주는 큰 피해를 입힙니다.
하지만 공격에 대비해 유폭을 일으킬 수 있는 폭탄이나 연료를 최대한 방재한 덕분에 일본 항공모함들과 같은 운명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장병들의 손상 복구 능력이 일본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에 침몰의 위기를 극복하고 2시간여 만에 항공모함의 기능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때 히류에서 발진한 2차 공격대인 뇌격기 편대가 도착했고, 요크타운은 이 공격에 대파되었습니다.
이때 침몰한 것은 아니지만, 승조원을 퇴함시키고 예인되던 와중에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최종적으로 침몰합니다.
반격에 성공했으나, 새벽부터 공격을 이어온 히류의 승조원들은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지휘관이었던 야마구치 다몬은 앞서 두 번의 공격대가 각기 다른 항공모함에게 큰 피해를 준 것이라 판단하고 석양이 질 때 다시 공격을 이어 나가기 위해 승조원들에게 잠시 휴식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미국의 반격대가 도착합니다.
모함을 잃은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을 포함한 공격대는 히류와 그 주변의 일본 함선들에게 폭격을 퍼부었고, 이 공격으로 인해 기동함대의 마지막 남은 항공모함인 히류마저 침몰합니다.
소기의 목적인 일본 항공모함 제압을 완수한 미국 함대는 그대로 동쪽으로 후퇴합니다.
함재기가 뜨기 어려운 야간에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본 해군 본대는 항공모함을 4기나 잃은 것을 복수하고자 미국 항공모함을 쫓았으나, 추격에 실패하고 후퇴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함대의 기동전력을 책임지는 정규항공모함 4척과 322기의 함재기를 잃습니다.
잃은 함재기 중 상당수는 항공모함이 격침당하면서 갈 곳을 잃고 함께 수몰된 것으로, 항공모함이 한 대라도 살아남았다면 살릴 수 있는 함재기도 상당수였다는 뜻입니다.
전사자는 무려 3,500여 명으로 이들 대부분이 숙련된 조종사와 항공모함 운영인력들이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정규항공모함 1척과 항공기 147대를 잃었고, 전사자는 307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미국이 미드웨이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보력에서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미드웨이를 노린다는 것을 감청을 통해 알아냈고, 이를 대비해 최대한 항공모함 전력을 미드웨이에 집중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자신들의 정보가 새어나간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이 미드웨이를 기습했다고 생각하고 병력을 운영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사실상 미 해군과 전력 차이가 없는 상태로 붙게 되었습니다.
승리의 여신이 미국의 손을 들어준 것처럼 극적인 순간들도 많은 전투였지만, 미국은 진인사대천명이었던 반면에 일본은 안일했기에 전투가 이렇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일본의 함대는 건재하여 미국이 정면으로 맞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때 잃은 정규항공모함 4척을 다시 재건하지 못했고, 이는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의 기동력을 내내 제한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독일군의 공세 능력이 꺾였듯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일본 해군의 공세 능력 역시 크게 꺾인 것입니다.
이는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의 발목을 붙잡는 요소가 됩니다.
이후 일본과 미국은 솔로몬 제도를 두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전쟁을 벌입니다.
일본은 과달카날섬과 그 주변을 점령하고 비행장 건설에 들어갑니다.
미드웨이에서 주력 항공모함을 잃었기 때문에 일본은 섬에서 발진하는 항공기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솔로몬 제도의 제공권을 장악한다면 호주와 미국의 연결선이 위협받아 자칫하면 호주를 고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양측은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일진일퇴했으나, 결과적으로 미국이 과달카날을 점령합니다.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국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이 모두 침몰하거나 대파될 정도로 손해를 보았지만, 대파된 함선들을 수리하고 새로 건조한 함선들도 하나둘 취역하며 소모된 전력을 회복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소모된 전력, 특히 항공전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개전 초기 미군보다 숙련도가 높았던 일본의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은 이제 온데간데 없었고, 이는 일본이 전쟁 후반기에 카미가제 전술에 집착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1942년을 지나며 전쟁의 주도권은 연합국에 점차 넘어옵니다.
또한 1943년부터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며 연합국의 보급 능력은 좋아진 반면 추축국은 전시체제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얻었다 판단한 연합국은 1943년 1월 14일에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갖고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종전의 조건으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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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의 테마 기행
<액시스 & 얼라이즈: 1942>
- 제2차 세계 대전 3편 -
3. 역사상 최대의 전투
제2차 세계대전은 당대 최강의 열강들이 총력전을 벌인 전쟁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대전투는 미국의 전시생산 체제가 본격적으로 결과물을 내놓은 1943년 이후에 벌어졌으며, 추축국은 이 전투들에서 총력을 동원했으나 패배하며 전쟁에서 이길 방법을 상실하게 됩니다.
1) 쿠르스크 전투
쿠르스크 전투 이전의 상황. 흰색 영역이 독일이 지배하던 영토이다. 동쪽의 소련과의 경계에서 양측의 돌출부가 눈에 띈다.(출처: 나무위키 “쿠르스크 전투”)
쿠르스크 전투는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진행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입니다.
이 기간에 양군이 투입한 전력은 양측 합쳐서 보병만 270만 명에 육박하는데, 6.25 전쟁 3년 동안 양측이 투입한 총병력이 210만 명 정도이니 가공할 수준의 인력이 투입된 것입니다.
양측의 주요 전력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투입된 총병력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비슷하지만, 시가전이 중심이어서 보병 위주로 전투가 진행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달리 쿠르스크 전투는 개활지에서 벌어진 전투라 엄청난 숫자의 전차와 항공기도 투입된 것이 다릅니다.
병종 | 독일 | 소련 |
총병력 | 780,900명 | 1,910,361명 |
전차 | 2,928대 | 5,128대 |
항공기 | 2,110기 | 2,792기 |
포 | 9,966문 | 25,013문 |
쿠르스크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로부터 5개월 뒤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며 후퇴한 독일은 하리코프에서 반격에 성공하며 전선을 형성합니다.
이렇게 전선이 형성되며 쿠르스크 지역에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돌출부를 공략하며 소련에 큰 손실을 입혔던 독일군은 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준비합니다.
한편 소련 역시도 독일군이 이 지역을 노리고 있음을 첩보를 통해 확인하고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역습을 위한 예비대를 준비했습니다.
7월 5일이 되자, 독일의 공세가 시작됩니다. 독일은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으로 나뉘어 북쪽과 남쪽에서 진격합니다.
독일군은 돌격포와 전차를 앞세워 진격하지만, 1차 방어선만 돌파하는 데 그칩니다.
독일군은 여전히 압도적인 교환비로 소련군을 밀어붙였지만, 소련군은 계속해서 예비대를 투입하며 전선을 유지합니다.
결국 7월 10일이 되어 시칠리아에 연합국이 상륙하자, 히틀러는 공세 중지를 명하고 일부 전력을 이탈리아 전선으로 차출합니다.
공세 중지 명령은 13일에 내려졌고, 7월 15일이 되자 독일군의 모든 공세가 종료됩니다.
이제 소련이 반격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소련군은 북쪽의 중부집단군과 남쪽의 남부집단군 각각에 모두 반격을 기합니다.
중부집단군은 소련이 북쪽의 오룔시를 노리고 올 것이라 예측했고, 이를 미리 대비했기 때문에 소련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전력도 비교적 온전히 보전하고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선에서 소련군은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고자 128만 2천 명을 투입했는데, 독일군은 6만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반면에 소련은 4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했습니다.
한편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공격 방향을 잘못 판단해 허를 찔렸습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방어선을 구축해 소련군의 진격을 중지시켰지만, 히틀러의 전선 사수 명령으로 인해 벌어진 틈으로 인해 전선이 무너지고 돌파당하고 맙니다.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리코프를 사수하고자 했으나, 하리코프마저 함락되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르스크에서 독일은 전술적으로는 더 뛰어난 역량을 보이며 소련군에게 큰 손실을 야기했지만,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역습으로 전선을 밀어내는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했습니다.
반면 쿠르스크 이후 독일은 전략적인 공세를 벌일 여력을 상실합니다. 이제 동부전선은 소련이 공세를 벌이면, 독일군이 공세적 반격에 나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30초로 보는 쿠르스크 전투의 전개. 돌출부를 포위하려는 독일군의 진격은 돈좌되었고, 소련군은 반격하여 전선을 전진시킨다.
2)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해전의 작전도. (출처: 나무위키)
소련은 개전 이래로 독일에게 양면전쟁을 강요할 수 있는 전선을 서유럽에 형성해 줄 것을 영국과 미국에 요구해 왔습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1943년 7월에 시칠리아에 상륙합니다.
연합국이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자 이탈리아 왕국은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항복했으나,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한 다음 이탈리아 북부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항전합니다.
연합국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로마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이상 북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은 계속 북진하기보다는 이 지역에 독일군을 적절히 묶어두는 것에 만족했기에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이 항복하는 시점에야 완전히 정리가 됩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를 해방하고 독일로 진격하기 위해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최대한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독일에 역정보를 주는 정보공작까지 활발히 벌였고, 독일은 상륙하는 당일까지도 상륙지점을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서 노르망디 방면 사령관이던 롬멜은 상륙이 불가하다 판단하여 아내의 생일을 같이 보내기 위해 독일에 귀국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날씨 때문에 원래 계획한 1944년 6월 4일에 작전을 개시하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6월 6일에 잠깐 날씨가 개었고 연합국은 이날을 놓치지 않고 작전을 진행합니다.
연합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6,900대가 넘는 수송선과 총 15만 6천 명의 병력을 투입합니다.
이 상륙 병력의 목표는 노르망디 해안을 장악하여 후속 병력이 투입될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출격한 것은 공군으로 영국과 미국은 2,200대가 넘는 항공기를 동원해 해변을 폭격합니다.
하지만 먹구름으로 인해 폭격 목표를 찾기가 어려워 폭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해군의 사전포격도 상륙부대의 상륙을 방해하지 않도록 40분 정도로 짧게 진행되었습니다.
연합국 지휘부의 오마 브래들리 장군은 이 사전 공격으로 독일의 방어선이 무력화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 영화 붐을 다시 일으킨 걸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시작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 씬으로 유명한 오마하 해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습니다.
오마하 해변은 노르망디 지역에서도 가장 방어선이 튼튼했던 전선이었고, 짧은 폭격과 포격으로는 전력이 전혀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보병들의 엄폐물이 되어주어야 했을 수륙양용전차들도 제대로 상륙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미군 보병들은 독일군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큰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당초 목표보다는 모자라지만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이날 오마하 해변에서 발생한 미군 사상자는 3,000여 명이었던 반면 다른 모든 해변의 사상자를 합치면 2,000여 명 정도였을 정도로 미국은 오마하 해변에서 크게 고생합니다.
오마하 해변에서 고생하기는 했어도 연합국은 노르망디 해안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간이 항구를 세웁니다.
이 항구를 통해 연합국의 병력과 물자가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쏟아졌고, 이후 두 달에 걸친 격전 끝에 연합국은 노르망디 전역을 성공적으로 장악합니다.
여기에 이어 마르세유 방면으로도 상륙작전이 이어지면서 독일군은 프랑스에서 후퇴하였고, 연합국은 프랑스를 해방합니다.
한편 소련도 이 작전에 호응하여 동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칩니다.
이 시기에 독일군은 안 그래도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동부전선에서 열세에 놓였는데 서부전선이 개전되며 병력을 차출할 수밖에 없어서 더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반면 소련군은 동원력과 미국의 보급지원은 여전했고, 이제는 병사들과 장교들도 독일에 뒤지지 않을 수준으로 숙련되었습니다.
그 결과 독일군의 남은 주력이었던 중부집단군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버렸고, 독일군은 독일 국경까지 밀려납니다.
소련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함에 따라 독일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동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점령합니다.
이렇게 소련이 한숨을 돌리는 동안, 히틀러는 소련의 기세가 꺾였다고 상황을 오판하고 남은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서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섭니다.
독일의 반격에 영국과 미국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제공권을 잃은 독일군으로서는 전황을 뒤집기는 무리였습니다.
결국 독일은 1945년 재개된 연합국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고, 1945년 5월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됩니다.
히틀러는 베를린이 점령되기 직전에 자살했고, 이후 독일 정부가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유럽 전선은 종결됩니다.
3) 레이테만 해전
1942년까지 태평양 전역에서 주도권을 가진 쪽은 일본이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새 함선들이 취역하는 것은 1943년부터였기 때문에 미국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승리로 인해 일본의 항공함대 전력을 꺾어놓을 수 있었고, 전력이 본격적으로 충원된 1944년부터는 제대로 된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개전 이래 꾸준히 항공함대 전력을 잃어왔습니다. 레이테만 해전 직전 시점에 되면, 항공모함에서 함재기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인력이 씨가 마를 수준이었습니다.
비록 침몰당하지 않은 항공모함이 몇 척 남아있기는 했지만, 운용할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개전 초기부터 아껴왔던 야마토를 비롯한 전함들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레이테만은 필리핀 동쪽 사마르섬에 위치한 만입니다. 미국은 개전 초기에 빼앗긴 필리핀을 탈환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병력을 상륙시키고자 했던 지역이 레이테만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필리핀을 빼앗기면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에 미국의 상륙 시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습니다.
이를 아는 미국도 일본 함대로부터 상륙부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함대를 전개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함선이 투입된 해전인 레이테만 해전은 이런 배경에서 개전되었습니다.
이때 투입된 양측 함선의 배수량 합계는 250만 톤으로 두 번 다시 나오기 힘든 수준이었습니다.
비교를 위해 예시를 들자면,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총배수량 합계가 건조 중인 함선까지 모두 취항하는 것을 기준으로 27만 톤이고, 한 국가의 군사력에 비할 수 있다는 미국 항공모함 전단 하나의 전체 배수량이 대략 60만 톤입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 일본의 작전 목표는 레이테만에 진입해 미국의 수송선단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고, 미국은 이를 막고자 함대를 방어적으로 펼쳐놓습니다.
일본의 전략은 브루나이에서 출발한 본대가 사마르섬 북쪽의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거쳐서 레이테만에 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조하기 위해 일본과 브루나이에서 출발한 별동대가 남쪽 방면에서, 일본에서 출발한 항공모함 함대가 북쪽 방면에서 미국 해군을 유인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미국은 수송선단 보호를 목표로 태평양의 주전력을 모두 필리핀에 집결시킵니다.
미 해군의 주전력인 3함대와 그동안 맥아더를 지원해 온 7함대가 모두 이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맥아더와 보조를 맞춰온 7함대는 레이테만에서 상륙군을 보조하고 3함대는 먼바다에서 일본 함대를 견제하는 것이 미국의 계획이었습니다.
일본의 주공이 진입할 예정이었던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막는 것도 3함대의 임무였습니다.
다만 3함대의 주력군인 38.1전대는 재보급을 위해 빠졌기 때문에 전력에 공백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당시 3함대에는 38.1전대부터 38.4전대까지 네 전대가 편재되어 있었습니다).
레이테만 해전의 지도. 1번이 구리다의 본대가 3함대에 쫓긴 시부얀 해전, 2번이 일본의 분대가 7함대와 교전한 수리가오 해협 해전, 3번이 3함대가 일본 항공모함 함대를 쫓은 엔가노 곶 해전, 4번이 7함대와 구리다의 본대가 교전한 사마르 해전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레이타만 전투")
1944년 10월 22일, 일본 해군은 레이테만을 향해 출항합니다. 이후 레이테만을 향해 항해하던 일본 해군의 본대를 미국의 잠수함 두 척이 발견하여 공격합니다.
이 공격으로 인해 함대의 지휘선을 비롯한 중순양함 2척이 침몰했고, 지휘관인 구리다 제독은 살아남아 구조되었지만 통신 담당을 비롯한 지휘부 인원은 다수가 사망합니다.
구리다는 기함을 야마토로 옮기고 지휘를 계속 이어 나가지만, 이 피해로 인해 구리다 함대의 통신망은 약화됩니다.
잠수함의 기습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구리다는 계속 전진합니다.
한편 미국 3함대는 잠수함들의 보고를 받고 구리다의 함대를 발견하기 위해 정찰기를 내보냈고 24일 오전에 구리다의 함대를 발견합니다.
3함대 지휘관인 홀시 제독은 휘하 함대에 전력을 다해 구리다의 함대를 공격할 것을 명했는데, 일본에서도 구리다의 함대를 엄호하기 위해 3함대에 공습을 가합니다.
이에 38.3전대가 공습을 방어에 나섰으나 경항공모함 1척과 경순양함 1척을 잃고 맙니다. 공습은 두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루손섬에서 출발한 1차 공습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항공모함 함대에서 출발한 함재기들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루손섬으로 도망갔습니다.
미끼 역할을 하기로 했던 항공모함 함대는 함재기마저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8.3전대가 공습을 방어하는 사이에 38.2전대는 구리다의 함대를 향해 맹습을 가합니다. 함재기들의 공격은 거대한 전함인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에 집중되었습니다.
38.2전대에 이어 38.3전대의 함재기들도 방공을 마치고 공습에 나섰고, 멀리 떨어진 38.4전대와 재보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38.2전대의 2파 공격까지 이어지자 구리다의 함대는 버티지 못하고 퇴각합니다.
이 공습의 피해로 인해 전함 무사시는 퇴각 과정에서 침몰했고 중순양함 1척도 대파됩니다.
구리다의 함대가 퇴각하는 것을 확인한 3함대는 구리다의 함대가 격퇴되었다고 판단했으나, 구리다는 미국의 정찰기가 보이지 않자 다시 함수를 돌려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으로 향합니다. 이 전투가 1번 시부얀 해전입니다.
시부얀 해전의 결과로 구리다가 퇴각했다고 판단한 홀시 제독은 원래의 임무였던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방어하지 않고, 그 대신에 북쪽에서 발견한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를 추격하기로 합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는 개전 초기의 위상을 잃은 신세였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항공모함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 항공모함 함대에는 미 해군의 주요 목표였던 진주만 공습의 원흉인 즈이카쿠가 남아있었기도 했습니다.
홀시 제독은 휘하 전대 셋을 모두 동원해 북상했고, 보급을 받고 귀환하던 38.1전대에게 방어를 명합니다. 하지만 38.1전대는 이 해전에 합류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구리다의 함대는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통과합니다.
한편 지상군 지원 임무를 맡은 7함대는 레이테만에서 포격 지원을 하던 전함 위주의 77.2부대와 필리핀해 방면에서 항공지원을 맡은 77.4부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77.2부대는 남쪽 방면에서 진입한 별동대를 상대로 교전했고, 77.4부대는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통과한 구리다의 함대를 상대하게 됩니다.
일본의 별동대는 레이테만에 도착하기 전부터 3함대에 들켜서 공습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뢰정의 기습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하지만 일본 별동대는 야간에 작전을 끝내기 위해서 진군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들이 레이테만에 진입하려면 좁은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한편, 미국 7함대는 이들이 진입한다는 보고를 받고 수리가오 해협을 향해 포격진을 미리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별동대가 사거리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전함 웨스트버지니아가 포문을 먼저 열었고, 이윽고 전함과 순양함들의 대규포 포격이 이어졌습니다.
일본 별동대는 나름대로 응전에 나섰지만, 비 오듯 쏟아지는 포격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일본 별동대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퇴각하고 맙니다. 이 해전이 수리가오 해협 해전입니다.
이 해전이 벌어졌을 때, 맥아더 장군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함대 포격전이 벌어진다는 소식에 7함대에 참관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해군은 안전상의 문제로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상륙함에 남아있던 육군 지휘부는 상륙하여 아예 필리핀 내륙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안전하게 상륙작전에 전념해야 했을 7함대가 적에게 공격당한 것은 그 자체로 큰 위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77.2부대는 일본의 별동대보다 더 전력이 강했기에 안전하게 적을 격퇴할 수 있었지만, 적의 주력을 맞이한 77.4부대의 사정은 많이 달랐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구리다의 본대는 산 베르나르디도 해협을 통과해 필리핀해에 진입합니다. 이들은 원래 작전 목표대로 레이테만에 진입하기 위해 남하합니다.
한편 77.4부대 소속 분대인 태피 3는 지상공격을 준비하면서 북쪽 방면에 대잠 정찰기를 보냈는데, 이 정찰기가 구리다의 본대를 발견합니다.
당연히 3함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일본 함대가 나타나자 태피 3는 당황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피 3는 호위항공모함과 구축함만으로 이뤄진 함대라 함대전을 벌이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양측의 전력 차이는 태피 3의 모든 함선의 배수량을 합해야 야마토 1척과 겨우 비빌 수준이었습니다.
당황한 것은 일본 함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리다는 눈앞의 함선들이 3함대라 착각했고, 항공모함의 함재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공진형을 갖추고 남진합니다.
태피 3의 지휘관 스프레이그 제독은 모든 함재기를 일단 이함시키며 후퇴합니다.
마침 동쪽에 스콜이 생겨서 함대를 스콜 속에 숨기고 연막탄까지 친 덕분에, 레이더가 없는 일본의 함대는 태피 3에 명중탄을 쉽게 내지 못합니다.
그나마 낸 명중탄도 호위항공모함이 함재기용 무장까지 과감히 버린 덕분에 관통만 했을 뿐도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10월 25일 08시 기준 사마르 해전도. 호위항공모함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지만 구축함들은 적함을 향해 돌진한다.(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레이테만 해전/경과")
이때 태피 3의 구축함들이 적함을 향해 돌진합니다.
군함은 더 클수록 더 강하고 사거리가 긴 함포를 탑재하기 때문에, 작은 함선으로는 큰 함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해전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구축함이 전함과 중순양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향해 돌진한다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구축함 함장들은 제독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함대를 구하기 위해 이런 무모한 싸움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처럼 이 선택이 태피 3과 함대를 살립니다.
미국 구축함들은 일본의 함선들을 향해 어뢰를 날렸고, 일본의 함선들은 어뢰를 회피하기 위한 기동에 들어가며 대열이 흐트러집니다.
이 과정에서 주력인 전함들이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태피 3의 함재기들과 인근 7함대 다른 부대에서 보낸 함재기들도 격렬히 공격하면서 일본의 함선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있었습니다.
분명 규모만 놓고 보면 일본 함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지휘관인 구리다 제독은 자기가 맞서는 함대가 미국의 주력인 3함대라 착각하고 있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리다 제독에게 후방에서 적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이대로 적에게 발목을 묶인 채로 시간을 끌면 전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구리다 제독은 퇴각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국의 가장 큰 위기였던 사마르 해전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한편 원래 방어해야 했던 위치를 버리고 북진한 3함대의 홀시 제독은 일본의 항공모함 함대를 일방적으로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일본 해군은 미국 해군과 공중전을 벌일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항공모함 함대의 지휘관 오자와 제독은 3함대를 성공적으로 유인했다는 무전을 구리다 제독에게 전했지만, 구리다 제독은 이 무전을 받지 못합니다.
이는 구리다 제독이 사마르 해전에서 오판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숙련된 통신요원들이 개전 초기에 지휘함이 침몰하며 사망하며 구리다 함대의 통신 능력은 크게 약화된 것이 큰 후폭풍을 불러온 것입니다.
3함대는 이렇게 엔가와 곶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진주만의 원수인 즈이카쿠를 비롯한 여러 함선을 침몰시키거나 대파시키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동안 3함대가 엄호해야 했을 7함대는 일본 해군의 별동대와 본대에 공격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7함대는 3함대에 꾸준히 지원 요청을 했지만, 3함대는 이미 북쪽으로 멀리 나와버린 상황이었습니다.
7함대가 자력으로 일본 함대를 격퇴해서 망정이었지, 만약 구리다 제독의 본대가 공격을 지속했다면 일본의 계획대로 레이테만의 상륙부대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7함대의 선전 덕분에 미국은 작전 목표를 모두 달성하여 필리핀을 탈환할 수 있었고, 일본은 필리핀을 잃으며 그나마 남은 함대조차 반쪽짜리가 되고 맙니다.
동남아에 남은 함대엔 탄약을 보급하거나 수리를 할 수 없었고, 일본에 남은 함대에는 연료를 보급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해전을 끝으로 일본은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고, 연합국은 차례차례 일본이 점령한 섬들을 점령해 나갑니다.
사실상 전황을 반전시킬 방법은 없었지만, 일본은 전 국민을 희생시킬 기세로 저항합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도 일본은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생각보다 큰 피해를 본 미국은 그동안 개발해 온 신무기를 투입해 일본의 의지를 꺾고자 합니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연달아 원자폭탄에 떨어졌고, 일본이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하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은 종료됩니다.
https://www.koreaboardgames.com/magazine/menuDetail?boardCd=contents&postNo=1154
진짜 해보고 싶은 게임이었는데 사놓고도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결국엔 걍 팔았음. ㅠㅠ
한글판 나오면 접근성이 높아져서 할수 있을꺼에요 동호회나 번개같은거 쳐서 인원을 모아보세요~!!
오 한글판이 나오나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https://bbs.ruliweb.com/userboard/board/700227/read/23137?search_type=subject&search_key=%EC%BD%94%EB%B3%B4%EA%B2%8C
와 감사합니다
판매페이지 열리면 정보올라갈테니가요 그때 구입하시면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