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
정가 : 22,000원
정보 : 427쪽
왜 울창했던 조선의 산림이 민둥산으로 변했을까? 250년간의 산림 황폐사를 낱낱이 추적한 역작. 조선시대에는 산림이 울창하고 숲이 깊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과 달리 중기 이후 조선의 숲은 황폐화로 치달아 한일 병탄 직전 조선 산림은 삼남 지방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 은퇴한 산림학자가 조선의 숲이 사라진 이유와 과정을 탐구했다.
임진왜란 당시만 해도 단기간에 수십 척의 전함을 건조할 수 있을 만큼 풍성했던 조선의 산림은 무려 250년 동안 황폐화가 계속된다. 조정의 미봉적인 소나무 중심의 산림 정책, 왕가와 권문세족의 이기적인 산림 사점과 남벌, 소빙기로 인한 한반도 전역의 온돌 보급과 땔감의 급증, 산림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벌목 등이 조선의 숲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저자는 조선시대 공식 기록물은 물론 사대부의 문집과 향리에 낙향한 무신의 일기까지 뒤져 조선의 산림이 황폐화된 과정을 추적했다. 부족한 양묘 및 조림 기술, 수목의 가치에 대한 지도층의 인식 부재, 부실한 제재 도구와 목재 운송 수단 등 지금까지 학계에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기술적, 사상적 후진성까지 이 추적 과정에서 드러난다.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산림의 효용과 가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부각되는 요즈음 조선시대 산림의 참혹한 파괴 역사를 충실하게 톺아낸 이 책은 역사를 거울로 삼아 산림 관리의 중요성과 방법론을 일깨워주는 생태사, 미시사 분야의 걸작이다.
머리말
1부 조선의 숲은 언제 사라졌나?
2부 조선의 소나무 정책이 불러온 산림 황폐화
1장 조선의 송금 정책
2장 18세기 봉산 금양
3장 조선 후기 부실한 봉산 관리가 불러온 산림 황폐화
4장 17~19세기 조선과 외국의 산림 정책 비교
3부 18~19세기 조선의 조악한 조림 기술과 산림 황폐화
1장 18세기 정조의 현륭원 식목 사업
2장 19세기 국가 관리 산지의 소나무 식목
3장 19세기 외남산의 산림 조사
4장 낙후된 조림 기술이 불러온 조선 후기의 산림 황폐
4부 조선 후기 민간의 산림 황폐화 대처
1장 노상추의 산림 육성
2장 송계(松契)를 통한 산림 금양
3장 사찰의 산림 금양
4장 민간의 참여 부재가 불러온 산림 황폐화
5부 조선 후기 목재 유통 체계의 미비와 산림 황폐화
1장 민수용 목재 조달
2장 관수용 목재 조달
3장 국용 목물 조달
4장 목상의 봉산 침탈과 취약한 목재 유통 구조가 촉진한 산림 황폐화
6부 조선 후기 분야별 임산물 소비량과 산림 황폐화
1장 조선 후기 가옥 건축재 소요량
2장 조선 후기 조선재 소요량
3장 조선 후기 임산 연료 소요량
4장 수공업용 임산 연료 소요량
5장 조선 후기 가정용 땔감 소비 증대가 불러온 산림 황폐
7부 산림의 지속 가능성 훼손과 산림 황폐화
1장 지속 가능성과 산림
2장 산림의 지속 가능성 훼손과 산림 황폐화
8부 조선 사회의 산림 인식과 산림 황폐화
1장 조선 사회의 수목 인식
2장 조선 정부의 수목 인식
3장 조선 사대부의 수목 인식
4장 산림에 대한 조선 사회의 무관심이 불러온 산림 황폐화
맺는말 과거에서 배우는 교훈
부록 조선의 지리지와 문집에 수록된 수목
우리 숲의 발자취를 탐구하는 산림학자의 집념
250년에 걸친 조선 산림의 황폐화 이유를 추적한
미시사, 생태사 분야의 걸작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
지배층의 인식 부족으로 사라져간 울창했던 조선의 숲
250년간 지속된 조선 산림 황폐사를 샅샅이 추적하다
조선 후기 삼남의 산은 모조리 민둥산으로 변했다
오늘날 한국은 단위 면적당 산림 축적 증가율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헐벗은 산림 환경에서 출발해 조림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일제 강점 이전의 조선의 숲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산업도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식민 착취가 시작되기 이전이었으니 한반도 전역이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1910년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산림조사에 따르면 당시의 전체 산림 면적(15,849,619정보) 가운데 1/3이 채 안 되는 32.3%만이 무성한 숲일 뿐, 나머지는 조악한 어린나무로 구성된 숲이거나(41.8%), 아예 나무가 없는 헐벗은(25.9%) 상황이었다.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남부 지방의 산림 황폐화는 극심해서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었다.
조선의 숲은 대체 왜 이렇게 황폐해졌을까? 산림은 쉽게 복원하기도 어렵지만, 쉬 망가지지도 않는다.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의 숲이 망가지고 사라졌는지, 완벽하게 입체적으로 추적한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가 나왔다. 책은 조선의 산림 황폐화가 이미 임진왜란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증언한다.
1611년의 실록은 벌목으로 인해 도성 안팎의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한 책임을 한성부 당상에게 묻고 있다. 나라에서 금령을 엄히 다스려도 “도성 사방에 있는 산들이 볼품없이 벌거숭이가 되어 이미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는 1621년 기사는 산림 파괴의 심각성을 증언한다. 18세기에 이르러 헐벗은 한양의 사산(四山)에서 유출된 토사가 청계천의 하천 바닥을 높여 도성에 물 난리(1752. 1. 27.)가 발생하고, 종국에는 청계천 준설(1760)로 이어져 도성 주변이 모두 헐벗었음을 전한다. _41p,
저자에 따르면 조선 숲의 황폐화는 적게 잡아도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말까지 250여 년 동안 진행되었다. 정밀한 연구에 바탕을 둔 추정을 통해 저자는 조선 건국 초기(1400년)에 비해 조선 남부 5도의 임목 축적량이 1700년에 이미 절반으로, 1900년에는 1/3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인구 증가까지 감안하면 정조 시대였던 1800년 1인당 임목 축적량은 건국 당시의 9%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250년에 걸친 조선 숲의 황폐사를 책은 절절한 마음으로 담아낸다.
기술적 검토와 문헌 추적으로 밝혀진 지도층의 문제점
그렇다면 조선의 숲이 이렇게까지 고갈되고 황폐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인구 증가와 소빙기 도래에 따른 목재 사용량 증가 등 그간에 학계에서 추론하고 있던 사항 외에도 다각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공식 기록물은 물론 사대부의 문집과 향리에 낙향한 무신 노상추의 일기까지 뒤져 조선의 산림이 황폐화된 과정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기후 변화나 인구학적인 요인 외에도 조정과 사대부 등 지배층의 안이한 산림 인식, 왕가와 권문세족의 이기적인 산림 이용과 산림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벌목 부족한 양묘 및 조림 기술, 수목의 가치에 대한 지도층의 인식 부재, 부실한 제재 도구(켜는 톱)와 목재 운송 수단(수례와 도로) 등 지금까지 학계에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기술적, 사상적 후진성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예를 들자면, 산림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가까운 산의 나무를 남벌한 데에는 운송 수단의 미비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그 이면에는 지배층의 이념적 성향이 작용했다.
조선 조정이 도로 정비와 수레 개선을 도외시했던 배경에는 잘 정비된 도로가 외적의 침략 통로가 되어 한양이 쉽게 점령당할 수 있다는 군사적 우려와 수레의 보급이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반하는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잠재되어 있었다. _275p,
목재 유통의 또 다른 제약 요인에는 제재도구도 있다. 원목을 판재로 제재하기 위해서는 성능 좋은 철제 톱이 필요했지만 켜는 톱을 제작하는 전문 장인이 많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도 못했고, 때문에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 같은 활엽수종은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자연히 도끼나 자귀 등으로 쉽게 다듬을 수 있는 소나무 위주로 목재 사용이 편중되어 산림의 황폐화에 일조하게 된다. 열악한 종묘 및 조림 기술 또한 산림 황폐화를 막지 못한 큰 원인이었다. 저자는 18세기 정조의 현륭원 식목 사업에 관한 문헌 『현륭원등록』, 『일성록』 등을 샅샅이 뒤져 그 기술 수준을 따져본다.
한정된 능역에 많이 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처럼 식목 후 생존율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이 두 자료는 18세기 말에도 조선에는 제대로 된 양묘 기술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재배 수종 뽕나무는 15세기에 이미 양묘 기술이 개발되었지만, 산림 수종 소나무와 참나무와 가래나무의 양묘 기술은 현륭원 식목 사업이 진행된 18세기 말은 물론이고 20세기 초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19세기 말에도 나라 전역에서 이루어진 소나무 조성 사업은 대부분 파종 조림으로 이루어졌다. _107~108p,
현륭원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 사도(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곳이다. 왕조 시대에 임금이 직접 관장한 국책 조림 사업조차 인근에 자라는 소나무를 옮겨 심어야 했기 때문에 10그루 중 겨우 2그루나 살릴 수 있을 만큼 조림 양묘 기술이 극히 낙후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헌과 기술적 분석, 분야별 목재 사용량에 대한 자세한 추정 등 입체적으로 진단한 끝에 내린 저자의 결론은 조선 지배층이 산림 지속성 유지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의 산림 황폐는 산림 정책 부재, 조림·양묘 기술 미비, 민간 참여 배제, 권력층의 부패, 목재 및 땔감 생산 체계 부재와 온돌의 전국적 보급이 결합한 결과였다. 산림 황폐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이 모든 원인은 산림 자원의 가치와 중요성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조선 사회와 그 당시 지배층의 잘못된 산림 인식 탓이었다. _14p,
노상추의 일기와 70대 노 산림학자의 집념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는 우리 숲의 장기적 생태사를 정리해낸 생태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저작인 것은 물론,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는 탁월한 미시사 분야의 역작이기도 하다. 책은 관의 부당한 벌목이 얼마나 자행되었는지(196쪽), 민간에서는 조림을 위한 공동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한 경제적 수익은 어느 정도였는지(197~214쪽), 당시 일반 주택 한 채를 짓는 데 목재가 어느 정도 소요되었는지(291~295쪽) 등 나무를 매개로 한 선조들의 생활사를 눈앞에 그려질 듯 펼쳐 보인다.
이 책의 상세한 분석은 많은 문헌 검토와 고증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정조 시대 퇴역 무인이었던 노상추의 일기이다. 노상추(1746~1829)는 17세부터 84세(1829년)까지 67년간 한문 일기를 썼고, 그 중에는 산림 조성과 관리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 일기가 조선 후기 산림 육성과 송계 활동, 당시의 산림 상황을 생생히 전하는 주요 자료라고 평가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낙향한 무신이 평생 기록한 일기가 조선의 숲 탐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저자 또한 70대에 접어든 은퇴한 산림학자로서 우리 산림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하며 많은 책을 집필한 인생 행로가 2백여 년의 세월을 넘어 노상추의 행적과 아름다운 동행을 이룬다.
조선 후기의 산림 황폐화 연구는 관심을 둔 연구자도 드물고 관련 자료조차 구하기 쉽지 않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는 칠순의 산림학자가 도전하기 좋은 과제였다. -머리말에서
『조선의 숲은 왜 사라졌는가』는 이처럼 평생을 우리 숲 연구에 바친 노학자가 집념으로 써내려간 역작이며 역사, 생태학, 산림학 분야의 귀중한 성취이다. 푸르른 우리 강산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이 찾아낸 역사의 교훈을 소중히 돌아보아야 하겠다.
일단 대전제가 중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무역이라고는 없는 조선의 경제 한계를 알고 가야함. 이런 폐쇄 상황에서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인 식생활의 필수품 소금은 바닷물을 끓인 자염으로 채취할 수밖에 없었음. 16세기 이전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의복과 침구만 잘 갖추면 그럭저럭 겨울을 날 수 있었는데 소빙기 이후 겨울이 무진장 추워지면서 온돌이 민간에도 널리 보급됨. 그리고 이 온돌을 작동하기 위해 나라에서 금지했음에도 너도나도 앞산뒷산옆산할 것 없이 나무란 나무는 죄다 베어버려 삼림 황폐화를 가속시킴. 특히 온돌은 보온과 방열이라는 측면에서 최악의 가성비, 최악의 연료효율을 가진 난방 방식임. 숲에서 나무가 급속도로 사라지니 서식지로 삼던 동물들도 사라지고 이에 먹이가 없어진 호랑이가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호환이 급증하게 됨. 결국 호랑이도 먹이와 서식지를 찾아 북으로 북으로 가다보니 백두산 일대에서만 살게 되고 호랑이=백두산이라는 개념이 이 즈음 탄생함. 또 숲은 산사태 등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었는데 온 산이 벌거벗다 보니 비만 조금 내렸다 하면 토사가 흘러내려 논밭을 다 엉망으로 만들어 농작물 생산에도 악영향을 미침. 르네상스를 전후로 인구가 급증하던 유럽은 산림자원이 풍부한 나라들과 무역을 하거나 겨울이 없는 해외 식민지 및 개척지 등에서 목재를 조달 공급함.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석탄 이용이 활발해지면서 이후 목재를 뗄감을 쓰는 일은 없어짐. 중국은 이미 송나라 때부터 석탄 사용이 일반화돼 있었음. 일본 또한 사람이 거의 안 사는 홋카이도나 동남아 나라들과 무역을 통해 목재를 공급하다가 18세기 무렵부터 석탄을 이용하면서 산림 훼손을 막음. 한반도에도 석탄(흑토)은 있었고 석탄을 운반하다가 침몰한 고려시대의 배가 발견되는 등, 분명 석탄을 이용한 흔적이 있었음에도 민간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점은 역사의 미스터리. 그래서 19세기 말 러시아 회사가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에서 대규모 석탄 채굴은 이뤄지지 않고, 자연형성된 노천탄광에서 소규모 채굴말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음.
조선의 생태환경사(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작가 전작)에서도 탐구한 내용인데 화전이 일단 가장 큰 역활+온도변화로 난방필수가 된게 컸음
우리나라도 석탄을 쓰고 난 뒤로 삼림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았지, 만약 오늘날까지도 부칸처럼 땔감을 연료로 썼다면...
구한말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죄다 민둥산이던데 이런 이유가 있었네
조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후기 산림자원 파괴 실태에 대해서는 다들 잘 인식하는 사실인데 이렇게까지 책 한 권으로 분석한 역작이 나올 줄은 몰랐네... 참고로 유럽에 널린 평지 자연숲을 우리 나라에선 전혀 발견할 수 없는데, 기본적으로 산악지형인 탓도 있지만, 한반도 평지숲이 사라진 시기를 생각보다 이른 삼국시대 말 ~ 통일신라 무렵으로 보고 있더군요.
전후의 산립복원사업이 큰 성과를 이뤘네요
우리나라도 석탄을 쓰고 난 뒤로 삼림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았지, 만약 오늘날까지도 부칸처럼 땔감을 연료로 썼다면...
... 그렇지 ... 어딘가의 누구 얘기는 절대 안함 ...
근데 유럽에서는 반대로 숲은 귀족이나 왕족의 사유지인 경우가 많아서.. 함부러 땔감 채취도 못해, 얼어죽는 경우도 있었다 함.
일단 대전제가 중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무역이라고는 없는 조선의 경제 한계를 알고 가야함. 이런 폐쇄 상황에서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인 식생활의 필수품 소금은 바닷물을 끓인 자염으로 채취할 수밖에 없었음. 16세기 이전에는 비교적 따뜻해서 의복과 침구만 잘 갖추면 그럭저럭 겨울을 날 수 있었는데 소빙기 이후 겨울이 무진장 추워지면서 온돌이 민간에도 널리 보급됨. 그리고 이 온돌을 작동하기 위해 나라에서 금지했음에도 너도나도 앞산뒷산옆산할 것 없이 나무란 나무는 죄다 베어버려 삼림 황폐화를 가속시킴. 특히 온돌은 보온과 방열이라는 측면에서 최악의 가성비, 최악의 연료효율을 가진 난방 방식임. 숲에서 나무가 급속도로 사라지니 서식지로 삼던 동물들도 사라지고 이에 먹이가 없어진 호랑이가 민가를 습격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호환이 급증하게 됨. 결국 호랑이도 먹이와 서식지를 찾아 북으로 북으로 가다보니 백두산 일대에서만 살게 되고 호랑이=백두산이라는 개념이 이 즈음 탄생함. 또 숲은 산사태 등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었는데 온 산이 벌거벗다 보니 비만 조금 내렸다 하면 토사가 흘러내려 논밭을 다 엉망으로 만들어 농작물 생산에도 악영향을 미침. 르네상스를 전후로 인구가 급증하던 유럽은 산림자원이 풍부한 나라들과 무역을 하거나 겨울이 없는 해외 식민지 및 개척지 등에서 목재를 조달 공급함. 그러다가 얼마 안 가 석탄 이용이 활발해지면서 이후 목재를 뗄감을 쓰는 일은 없어짐. 중국은 이미 송나라 때부터 석탄 사용이 일반화돼 있었음. 일본 또한 사람이 거의 안 사는 홋카이도나 동남아 나라들과 무역을 통해 목재를 공급하다가 18세기 무렵부터 석탄을 이용하면서 산림 훼손을 막음. 한반도에도 석탄(흑토)은 있었고 석탄을 운반하다가 침몰한 고려시대의 배가 발견되는 등, 분명 석탄을 이용한 흔적이 있었음에도 민간에 널리 보급되지 않은 점은 역사의 미스터리. 그래서 19세기 말 러시아 회사가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에서 대규모 석탄 채굴은 이뤄지지 않고, 자연형성된 노천탄광에서 소규모 채굴말고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음.
상업이 발전하지 않고 길이 발전하지 않아서 일부 산간 지역에서 석탄을 생산 한다고 해도 인구 많은 지역으로 운송하고 판매할 적당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힘들었을듯. 석탄 생산에 상당히 많은 자본 투자가 필요한데 그럴 경제적 기반이 없었고. 거기다 유럽은 옛날부터 산림과 숲이 사유지로 관리가 된 측면도 있고. 산림 자원으로 돈을 벌기도 수월하니 개인이 알아서 자원관리도 가능했음. 그런데 한국은 국가에서 관리하기는 하는데 산림 관리할 정도로 행정 여유도 없었으니 그냥 너도 나도 쓰는 공유지고. 결과적으로 이런 공유지의 운명이 그렇듯 자원관리 안되고 고갈나니...
온돌은 방열이라는 측면에서 최악의 가성비, 최악의 연료효율이라는 글에서 신빙성이 없어진다. 석탄이나 석유에 비해서 열량은 낮지만 열보존과 가성비에서는 나무떼는 온돌만한게 없는건 세살먹은 나도 알 수 잇다. 반박시 당신이 옳습니다.
조선의 생태환경사(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작가 전작)에서도 탐구한 내용인데 화전이 일단 가장 큰 역활+온도변화로 난방필수가 된게 컸음
구한말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죄다 민둥산이던데 이런 이유가 있었네
소빙기가 빌런이었군.(하멜일행도 그 따듯하다는 제주도에서 얼어죽을듯한 깡추위를 겪었다고 하죠.)
우리나라에서 1차조림할땐 땔감용으로 조림한거엿음~
조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후기 산림자원 파괴 실태에 대해서는 다들 잘 인식하는 사실인데 이렇게까지 책 한 권으로 분석한 역작이 나올 줄은 몰랐네... 참고로 유럽에 널린 평지 자연숲을 우리 나라에선 전혀 발견할 수 없는데, 기본적으로 산악지형인 탓도 있지만, 한반도 평지숲이 사라진 시기를 생각보다 이른 삼국시대 말 ~ 통일신라 무렵으로 보고 있더군요.
환경생태학 관점에서 한국에서의 자연림은 매우 헐겁고, 식생들의 분포가 낮을 수 밖에 없는게 높은 고원지대인데다(외국에 비해 비교적) 강우량이 계절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는 혹한의 환경이기 때문 이것을 조림이란는 정책으로 산업화하고 이만큼 투자해서 가꾸어 낸것은 분명하게 우리나라 산림사업의 성공으로 봐야 한다. (유네스코) 임업이 돈이 안되는 사업인건 분명하나 그 환경적인 가치와 자연환경생태적으로 만들어내는 직간접적인 수익은 한 두 세대로서는 알 기 힘든 아주 긴 결과이다. 민둥산을 겪어오고 보셨던 나의 조부모/부모세대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 과정은 한국을 떠나 전세계적인 성공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식목일 공휴일 지정 부활시켜라!!!!
소빙하기가 원인이라고 들은것 같음.
책 서적에 대한 윗 댓글들 말만 봐도 조선시대 왜 삼림이 사라졌는지 이해가 가네요 한반도의 추위는 가혹하고 석탄이나 석유로 따뜻하게 할 기술은 없고 그나마 나무를 베어서 불을 때웠지만 문제는 과학기술이 아직까지 발달한건 아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거군요
역사관련 책 서적은 언제나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