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빈은 울다가 지쳐 잠든 보닌을 칼리만의 옆에 눕히며 말했다.
“칼리만, 네가 은퇴하면 사람이 죽는다.”
칼리만이 은퇴하기로 마음먹던 그 순간 유스빈이 끼어들었다. 칼리만과 셰리드의 시선이 유스빈을 향했다. 유스빈은 셰리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셰리드, 비용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말하지 마라. 그 비용이라는 말 안에 사람의 목숨이 들어가 있다.”
그걸 누가 모를까. 아니, 칼리만은 모르지만 셰리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셰리드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칼리만이 희생해야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셰리드는 울컥해서 유스빈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다.
“오라……”
말을 내뱉기 전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기본적으로 분쟁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방금 전 보닌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여러 요소가 결합한 특별한 상황이었다. 기본적으로 보닌을 싫어하는 감정이 깔려져 있었고(지금은 그 감정이 애매해지긴 했다.), 보닌의 잘못이 컸던 데다가, 상대가 보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다르다.
유스빈? 말하자면 좋아한다.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셰리드가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몇 안되는 어른으로서 말이다. 셰리드의 주관과는 다르지만 유스빈의 주장은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대가 유스빈이다. 논쟁을 벌여서 유스빈을 이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셰리드는 자신이 그게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셰리드는 질게 뻔히 보이는 논쟁을 할 정도로 호승심이 강한 성격이 아니었다.
“……버니의 말이 맞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응, 그렇네요.”
셰리드는 칼리만을 바라보았다.
“용사님,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칼리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용사님이……”
“셰리드.”
다시 유스빈이 끼어들었다. 평소보다 강한 어조였다. 그 어조에 움찔하여 셰리드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다시 유스빈을 바라보았다.
“물러서지 마라.”
셰리드는 유스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셰리드의 말의 오류를 지적했으면서 지금은 물러서지 말라니? 혹시 싸우고 싶어하는 건가?
‘사람을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유스빈의 평소행동이 장난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대신 셰리드는 유스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셰리드, 네가 말했지. 용사란 괴물을 퇴치할 수 있는 도구라고.”
“……네. 용사님은 용사니까 그 일을 해야 하잖…….”
유스빈은 조금 거칠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셰리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유스빈은 셰리드가 한 말 중 가장 크나큰 오류를 지적했다.
“셰리드, 용사는 괴물을 퇴치하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했다.
셰리드는 생각했다.
어째서 유스빈이 도구라는 말을 사람이라는 말로 바꿨을지.
유스빈은 칼리만을 바라보았다.
“칼리만, 은퇴하고 싶나?”
칼리만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루하니까?”
“응.”
“지루하게 살기는 싫지?”
“응.”
유스빈은 미소 지었다. 아까 전 보닌이 성장했음을 깨달았을 때 지었던 그 미소다.
도구는 생각할 줄 모른다. 자신을 위해 살 줄 모른다.
사람은 생각할 줄 안다. 자신을 위해 살 줄 안다.
칼리만은 생각할 줄 안다. 자신을 위해 살 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유스빈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 셰리드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닌 칼리만을 위해서 한 말이었다면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네가 물러서면 칼리만은 네가 말한 대로 괴물을 퇴치할 때 쓰는 도구로 계속해서 살아야한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다.
사람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다른 한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셰리드가 가장 용납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었다.
“칼리만이라는 사람을 죽이면 더 많은 사람이 살겠지.”
유스빈은 보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닌이 용납하지 못한 것이 그거다. 보닌에게는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보다 칼리만 한 사람이 더 소중하니까. 폭력적으로 대하긴 해도 가장 칼리만을 생각하는 게 보닌이다.”
“오라버니는 안 그러신 건가요?”
유스빈의 손길이 멈췄다.
“오라버니는 10년 동안 용사님의 옆에서 용사님을 도왔잖아요. 아니 보살펴왔잖아요. 보통사람은 그러지 못한다고요.”
“지금까지 칼리만을 가장 잘 이용해 먹은 사람이 나다.”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나는 흔하디흔한 모험가다. 무기를 다룰 줄 알지만 내 몸이나 간신히 지킬 줄 알지. 지식은 있지만 깊지는 않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어정쩡한 모험가처럼 옛날에 아무도 모르게 죽었겠지. 지금까지 운 좋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술이나 퍼마시면서 있지도 않은 과거를 들먹이는 퇴물이 되어 있겠지.”
유스빈은 웃었다. 방금 전에 지었던 미소보다 더욱 짙게.
“고맙다, 칼리만. 네가 있어줘서 나는 2류 모험가가 아닌 용사의 동료로서 살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너에게 구원받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네가 용사를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영원히 나의 용사다.”
셰리드는 엄청 낯부끄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유스빈도 그렇게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칼리만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유스빈의 잔뜩 붉어진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은퇴하겠다는 것을 말리겠다. 누가 뭐래도 네가 은퇴하면 사람이 죽는다. 여러 사람보다 칼리만 너 하나가 죽는 게 낫다.”
“나 은퇴 안하면 죽어?”
“그래, 하지만 대신 수많은 사람이 살지.”
유스빈은 다시 셰리드를 바라보았다.
“셰리드, 나를 설득하지 말고, 칼리만을 설득해라. 왜 은퇴해야하는지.”
셰리드는 이해했다. 유스빈이 지금까지 셰리드에게 물러서지 말라고 한 이유를.
“그리고 나는 칼리만을 설득하겠다. 왜 계속해서 용사로 살아야하는지.”
“그거 참 걸작이군!”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웃었다. 어딘가의 괴물의 피가 섞인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될 정도로 커다랗고 근육질인 남자다.
“그러니까 네가 은퇴하겠다고 하니까, 유스빈은 그러지 말라고 설득하고, 셰리드라는 아가씨는 은퇴하라고 설득했단 이 말이지?”
“응. 그리고 보닌도 나중에 일어나서 나보고 은퇴하라고 설득했어.”
“2:1이로군. 그 유스빈이니 그 정도 페널티는 있어야 공평하겠지.”
다시 한 번 크게 웃고는 거구의 남자는 술을 들이켰다. 물에 희석해서 마셔야하는 독한 증류주였지만 주스라도 된다는 냥 호쾌하게 자신의 목구멍으로 술을 쏟아 부었다. 칼리만은 과일주스를 홀짝였다.
술 한 병을 비운 남자는 새로운 술병을 열면서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사람들이 손을 쓰기 힘든 괴물이 나타날 때에만 내가 나선다.”
“프리랜서 용사님이시군. 적당히 타협을 본건가. 하긴 극단적인 선택만이 정답인 건 아니지.”
남자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칼리만은 양념에 졸인 고기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래도 아쉽군. 네가 은퇴했다면 내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응? 나 당분간 시간 많은데? 도와줄까?”
남자는 손사래를 쳤다.
“관둬. 네가 날 도우러 오면 보닌이라는 꼬맹이가 따라 올 텐데. 그 꼬맹이는 내가 누군지 알자마자 죽이려 들 거다.”
“왜?”
“용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너를 달달 볶았던 꼬맹이가”“야, 칼리만! 셰리드랑 같이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고 내가 말했지!”
소란으로 가득 차 있는 술집에 새로운 소란이 합류했다.
한 명의 장년의 남자와 한 명의 소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또 다른 한 명.
그들은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칼리만과 거구의 남자가 있는 탁자로 곧장 걸어왔다.
“누가 뭐 사준다고 해도 아무나 따라가지 말랬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셰리드는 30대 남자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살짝 뒤로 물러나 일행이 아닌 척 했다. 부끄러웠으니까.
유스빈은 또 칼리만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하는 것에 대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화를 위해서 거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유스빈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다.
거구의 남자는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유스빈.”
“……펠링.”
칼리만이 모르는 사람의 꾐에 넘어가서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을 안 유스빈은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칼리만과 나의 옛 동료다.”
“모험가야?”
“……옛날에는.”
그랬다. 옛날에는.
“그러면 지금은?”
유스빈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고민했다. 진실을 말한다면 보닌이 어떤 행동을 할지 눈에 뻔히 보였다. 그렇다고 진실을 숨긴다면 보닌이 나중에 그것에 대해 추궁을 할 게 뻔했다. 그러면 방법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게 진실을 말하면 되는 거다.
그러나 고민에 빠진 유스빈은 대답하는게 한 발 늦고 말았다. 유스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 한 칼리만이 말했다.
“마왕이야.”
칼리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술집이 폭발했다. 하지만 그 폭발의 와중에 신의 힘이 개입한 덕분에 다친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다친 한 사람. 그러니까 마왕 펠링 마르즈 헐레이 시스폰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데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만족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리고 보닌에게 맞은 얼굴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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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