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캐릭터 사망 주의, 우울함 주의
거기서 제일 반짝거리고 아름다운 것을 가져와서 너에게 선물로 줄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 다짐을 덧붙였던 오하라 마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문제였던가. 천재지변에 휩쓸렸던가. 정신이 이상한 이의 무차별 공격에 휩쓸렸던가. 이제는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오하라 마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쿠로사와 다이아가 제일 먼저 보인 반응은 부정이었다. 거짓말이죠? 끔찍한 농담이죠? 부정하고, 부인하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멋대로 단정 짓고. 핏발 선 눈으로 그녀는 몇 번이고 현실에서 도망치려 노력했다.
그러나 향냄새가 진동을 하는 좁은 공간에서 웃고 있는 오하라 마리의 사진과 끝내 눈을 마주치게 되자, 힘겹게 힘겹게 짜낸 부정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커다란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깨져서 보수조차 할 수 없는 머리로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리 씨.
미친 듯이 떨리는 입술에 겨우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발음한 그 이름을 듣고 대답해 줄 사람은 있는가.
오하라, 마리.
다시 한번 불러봐도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린 방랑자는 현실을 뒤돌아보지 않는 법이었다.
들고 있던 술잔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말릴 수도 없이 심하게 떨리는 입술은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아아. '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본능적으로 내는 '소리'를 내며 쿠로사와 다이아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 나는 이제 평생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거울
그 뒤는 어떻게 지나갔더라. 그래, 바다를 봤었지.
그날 이후부터 다이아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 모습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더 이상 사고를 할 수 없는 인형을 선택한 것 같이도 보였다.
인간의 꼴이 아닌 채로, 그녀는 하루 중 절반을 해변에서 보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번개가 치든, 거친 바람이 불든 간에 해변에 앉아서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빛나지 않는 눈동자가 뻑뻑해져서 눈물이 저절로 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쭉.
살아 있다는 의미가 전혀 없는 시간만을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핼쑥해진 오하라 마리의 어머니가 어딘가 색이 바래버린 미소를 지으며 준 것은 가장자리에 약간 얼룩이 지고 반으로 접힌 A4 종이 한 장이었다.
며칠 전에 겨우 용기를 내서 그 아이의 방 정리를 했어요. 그러다가 발견했는데... 쿠로사와 양이 꼭 읽어봐야 될 것 같아서 말이죠. 거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본 여자는 한숨이 섞인 씁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제가... 이걸..."
"사양 말고 받으세요. 아니, 받아주세요. 제발"
"하지만..."
"그 아이도 이걸 원할 거예요"
그거, 너무나도 치사한 말이 아닌가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게 더 치사한 일이라고 생각됐기에. 어쨌든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이유까지 얻었으니, 남은 것은 저걸 받아서 읽어보는 일뿐이었다. 다이아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여자가 내밀고 있는 종이를 잡았다. 그리고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짧은 시간 동안 눈빛과 눈빛이 서로 부딪혔고,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없었지만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먼저 눈을 질끈 감아 버린 여자는 숨을 고르더니 다시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만. 짧은 작별 인사만을 남기고서 여자가 등을 돌려 저 멀리로 사라졌다. 얼마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이아는 문득 제 손이 쥐고 있는 종이의 존재를 느꼈다. 봐야 하나. 보지 말아야 하나. 머릿속이 웅웅 울리고, 식은땀이 주르르 목뒤를 타고 흘렀다. 그러나 참으로 우습게도 손가락은 어느새 제멋대로 반 접힌 종이를 펼치고 있었다. 이젠 아주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건가. 비웃음이 한 번 새어 나왔다.
종이 위에 너무나도 익숙한 필체로 쓰여 있는 글은 유언이었다. 맨 아래 있는 작성 일자를 보니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쓴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시작 문구 역시 그것을 증명했다.
'물론 마리는 만수무강할 거지만, 혹시나 싶어서 이 글을 써봅니다'
후훗. 얼마 만에 지어보는 건지 모를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그녀 다운 시작 문구가 너무나도 웃겼다. 아하하, 아하하하. 한 번 터진 웃음은 무너진 댐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듯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가슴팍이 아플 정도로 콸콸.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끅끅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다이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 버린 것은 어느 한 문장을 읽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더라도 앞을 곧게 바라보고 웃으면서 내일을 살아가주세요. 내가 보지 못할 미래의 반짝임을 대신 마음껏 누려주세요.
너무 이기적이야? 그렇다면 미안해요. 그렇지만 용서해 줘요. 내가 제일 원하는 건 이건 걸'
부자연스럽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벼랑 끝을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다가 결국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느낄 법한 아찔함이 온몸에 퍼졌다. 당신은, 당신은 정말이지...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공기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기에는 헛웃음도 섞여 있었다. 인간은 정말 신기한 존재지. 울면서 웃을 수 있다니, 신기하잖아? 빙글빙글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 때문에 어지러워서 그냥 뒤로 누워 버렸다. 그러자 벌건 노을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메마르고 튼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저 하늘에 말을 걸었다.
당신은 너무 다정한 사람이죠, 라고.
다음 날, 쿠로사와 다이아는 다시 인간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
최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여기에서도 도움을 요청하고, 저기에서도 자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부르는 데 가서 일을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러니 저절로 수면은 부족하고, 체력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조만간 일에 눌려 죽는 게 아닐까.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을 중얼거린 다이아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다이아는 무심하게 '네, 들어오세요' 라고 대답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저기..."
"무슨 일인가요?"
이 집에서 일해주시는 분들 중 한 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공포도 품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건가 싶어 몸을 돌려 그쪽을 바라본 다이아의 얼굴은 순간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다, 이아..."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머리에 가득 찬 말은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거품처럼 서로 부딪혀 터지고 사라졌다. 호흡은 자연스럽지 못하고 제멋대로 빨랐다가 느렸다가 난리를 쳤다. 온몸은 누가 본드로 붙인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이아, 다이아... 다이아"
그만. 제발 그만.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 당신은 누구야. 당신은 대체 누군데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너는, 대체, 너는 누구길래, 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건데, 도대체 왜.
자신을 향해 걸어온 '존재'가 자길 꽉 껴안았다. 비에 몸이 젖었는지 축축함이 느껴졌다. 미지근한 체온도 함께 느껴졌다. 그걸 똑똑히 느낀 순간,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도망가야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된다.
"죄송합니다"
지독히도 잔혹한 말을 툭 던지고는, 그 몸을 밀쳤다. 그러고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헐떡이며 재빨리 달아났다.
뒤에서 오열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다이아는 다른 이들에게 저분을 손님방으로 모시라고 지시하고는 멍하니 마당을 뱅뱅 맴돌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해 다시 돌아가자, 방은 고요했다. 힘이 빠져 의자에 철퍼덕 앉자 날뛰고 있는 심장의 거친 박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주 잠시 방 한 쪽을 노려보더니,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해야 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자신을 방에 가뒀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방 안에 틀어박혀 일만 했다. 밥은 다른 사람들이 방에 가져다줬고, 볼일은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먹고 비우는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일만 하다가 체력이 완전히 사라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터벅터벅 침대로 걸어가 죽은 사람처럼 잠을 청했다. 어수선한 꿈에 시달리다가 다시 눈을 뜨면, 또 책상으로 가서 일을 했다.
그야말로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그만두지는 못하는 이 모순적인 삶이여. 원래도 스스로를 그닥 좋아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요 며칠간은 정말 자기혐오에 빠져 살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지만, 이것들조차도 외면한 채 멍청히 숨을 이어갔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다이아,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말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여자의 목소리가 다이아를 움찔하게 했다. 고개를 돌릴 생각도 못 한 채로 제자리에 멈춰 버린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 여자는 딱딱하게 굳은 어깨에 제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다이아"
"...대체 누군가요, 당신은"
다이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수많은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어줄 수 있어?"
"..."
"그럴 수 있니?"
제멋대로에 이기적이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착한 사람. 그래서 더 매혹적인 사람. 그런 사람이기에 더 빛나고, 더 사랑스럽고,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당신인 거죠.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이 세상의 '오하라 마리'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어. 나는... 다이아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던 오하라 마리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이아가, 사라진, 세상. 내가 사라진 세상. 두어 번 곱씹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문장을 이해했다는 거지만.
"내 세상에서 다이아는 숨을 거뒀어. 잡을 수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
"..."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어"
"..."
"다이아가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고 싶지가 않았어"
여자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도망쳤나요"
"응"
"그런데, 왜..."
"모르겠어. 눈을 떠보니까 여기였어"
여자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번에는 다이아의 뺨에 갖다 댔다.
"다이아도 지금 나랑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네"
"저는..."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근본적인 의문"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곡을 찔렸기에.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결론 내렸어"
"...뭔가요"
"내가 사랑하는 건 어느 특정한 세상의 다이아가 아닌, 쿠로사와 다이아 그 자체라는 것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을 만져보는 것처럼.
"그렇지만, 저는..."
도망가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답은 딱 한 가지였다. 불안. 극심한 불안 때문이었다. 저 존재가 불현듯 나타났다가 다시 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 만약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겠냐는 불안. 거기에 더해서, 방금 전 추가된 '사랑의 대상'에 대한 불안까지.
솔직하게 인정한다. 바로 앞의 저 존재가 이 세상의 '그녀'가 아니고, 그 세상의 '자신'을 잃은 그 세상의 '그녀'라는 걸 알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달고 나타났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의 '그녀'.
저 존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세상의 '나'.
한 여름밤의 괘씸한 장난에 빠져 자신의 진짜 연인이 아닌 다른 이의 연인을 사랑하게 된 이들이 나오던 글이 떠올랐다. 그 상황과 지금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도 똑같지 않은가. 이성적으로 보면 결국 저 존재는 내가 원하던 존재가 될 수 없고, 저 이가 원하는 나는 나일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마음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빼액 소리를 지르고 있는 건가. 얽히고설킨 사실에 잔뜩 지친 마음이 자꾸 칭얼거렸다. 그래서, 세계가 뭐? 어쨌다고? 제일 중요한 건 저 존재가 그 사람이라는 거지.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 망설이는 거야? 뭘 불안해하는 거야? 너도 특정 시간의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잖아?
"다이아"
"저는..."
피로에 지친 몸이 비틀거리자, 여자는 재빨리 그 몸을 껴안았다. 무척이나 괴로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던 다이아는 잠시 후 말을 내뱉었다.
"미치도록 만나고 싶었어요"
이 선택이 저를 최악의 결말로 이끌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마리 씨-"
몇 년 만에 불러 본 이름이 너무 달고, 너무 써서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지금 자기 옆에 있는 오하라 마리는 자기가 사랑했던 오하라 마리가 아니고, 그 오하라 마리의 옆에 있는 자신은 그녀가 사랑했던 쿠로사와 다이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 사랑하게 되는 두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함께 있어도 가슴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메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주보며 진심으로 웃을 수는 있는 어쩐지 약간 비뚤어진 둘의 사랑이 보고 싶습니다...
평행 세계의 같은 사람, 복제인간, 기억이 이식된 AI. 한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지 항상 고민되게 하는 소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