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던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차츰차츰 느려지다 이내 그친 걸음을 뒤따르던 발자국은, 속절없이 내리는 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수가 쏟아져 내린다 한들 이토록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빗줄기에 맞는 것이 아프다 하면 보통 과장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결코.
시체의 상태는 온전했다. 붕괴액의 영향을 직접 받고도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그리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스스로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그저 오랜 도피행에 지쳐 잠든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석비에 기댄 그 모습은 조금 창백하고, 조금 수척해 보일 뿐이니까.
뻑뻑한 눈알을 겨우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가 내리는 꼴이 안개처럼 보였다. 태양도 달도 보이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질척이는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숨을 들이쉬고 있음에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허공에 질식하는 것처럼.
나흘 전, 간신히 듣게 된 소식에 나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설령 가본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열차에 올랐고, 국경을 넘었으며, 맹목적으로 충동을 따라간 끝에,
“…이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어.”
어깨를 때리는 비는 매서웠다.
“…마스터.”
힘겹게 내뱉은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정신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특히 지난 나흘은 더욱 그랬다. 눈코 뜰 새 없는 사건과 격전의 연속을 되짚던 장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지금은 끝났다. 본국, 신소련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객석에 파묻히듯 기대앉은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쉴 수 있었다. 비록 베오그라드 곳곳이 파괴되었지만, 시민들은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방벽도 복구 작업에 들어갔고, 철혈공조도 물러갔다. 그 하얀 세력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조금,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잠들기 직전, 장시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현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알려진 그리폰&크루거에 대한 IOP 제조회사의 지원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도착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녀의 세계가 뒤집히는데 걸린 시간 또한 그러했다.
공기가 얼어붙었고, 숨이 일순간 멈췄다. 예상치 못한 날벼락이란 이런 것일까 싶을 만큼 기습적이었고, 예상을 너무 벗어난 방식으로 찾아와 황당하기까지 했다. 장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언론은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선포했다.
역에 있는 스크린에 드리운 뉴스는 여러 글귀를 내뱉었다. 5개월 전부터 누명이 씌워진 혐의 – 불법 인형 개조 및 화기 유통, 군 측을 향한 테러 등 –를 비롯한 아는 소식들이 나왔고, IOP와 그리폰 사시의 관계에 주목하는 추측도 나왔다. 유출된 내부 문건이나 녹음 파일을 비롯한 모르는 소식 또한 나왔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상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알리는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손목만 움직여 꺼낸 그것을, 장시안은 눈알만 굴려 확인했다.
안전국의 연락이었다.
[대기하라.]
통신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게 떨어졌다. 지나칠 정도로 간결한 탓에, 그 정도의 단호함을 품지 않았다면 무슨 말인지 되물을 뻔했다. 장시안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지령도, 정보도 없이, 그저 ‘대기하라’라는 말 앞에 그녀는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호출에 응한 장시안은 서둘러 IOP 제조회사 사옥 S11 지부 향했다. 5개월 전, 정규군 특수작전사령부의 공격을 피해 모든 그리폰 병력의 도주 포인트로 설정되었던 그곳은, 현재 IOP의 지원 하에 새로운 기지가 마련되어 그리폰의 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유리를 통해 사옥 밖에 몰려든 기자들의 모습을 본 장시안은 종이가 구겨지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서둘러 벗어나듯 회의실로 들어가자, 장시안을 맞이한 건 회의실 화면 너머의 젤린스키와 힘없이 앉아있던 하벨이었다. 늦었다는 핀잔,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과 함께.
굳어버린 장시안을 대신하여, 하벨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젤린스키 양반…. 알잖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 IOP 측은 더는….”
[그리폰을 지원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건 이미 알고 있다.]
장시안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런 줄 알라고? 튀어나오려는 반문을 애써 삼키면서 그녀는 젤린스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시에, 당장 지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어차피 베오그라드에서의 활약에 대한 포상 휴가를 내릴 생각이었다. 돌발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현장 판단을 통하여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또 주석까지 구출해낸 그 공로는 확실히 인정할 만한 것이니까.]
개소리를 이보다 더 그럴듯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젤린스키의 그 말은 다른 방식으로 장시안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그리폰의 모든 인원이 범법자로서 사회 활동이 완전히 불가능하고, 자체적인 교통수단은 죄다 압류 혹은 파괴당한 상태에서 보급까지 끊기게 된다면,
포상 휴가? 꼴에.
말려 죽게 내버려 두는 걸 저렇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끝은 아닐 테지? 자네 입으로 말한 그 베오그라드에서의 사건으로 안전국 측의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그 ‘공로’를 세운 이들을 내팽개쳐봐야 제 살만 더 깎아 먹을 뿐일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이후 있을 처분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
하벨의 흥정에도 불구하고 젤린스키의 태도는 냉정했다. 그는 애당초 장시안이 이 방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알아만 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철저히 그녀를 대화에서 배제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지. 별도의 명령을 전달하기 전까지 그리폰&크루거의 모든 병력은 대기 상태를 유지하도록. 애당초 이건 자네들이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 말야.]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통신이 종료되었다. 공기가 가라앉은 듯한 어색한 침묵이 내려왔다.
그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하벨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군. 유감스러운 일일세, 그리폰의 지휘관.”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의도하신 바가 아니니까요.”
겨우 입을 연 장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서 있었다. 방에 남겨진 두 명 모두 자신의 역량을 넘은 문제에 부딪쳤고, 이 상황에 대한 원망이나 책임을 서로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진짜 원인은….
하벨은 노구에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젤린스키, 그 양반이 워낙 말을 못 하는 만큼 이 내가 상황을 나름대로 풀어 말해줘야겠구먼. 괜찮겠나?”
“부탁드립니다. 저희로선 정말 지푸라기라도 닥치는 대로 잡아야 할 처지니까요.”
“젤린스키 양반이 저렇게 태연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안전국 측에게 가해지는 피해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네. 아니, 오히려 자기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기회일지도 모르지.”
IOP 제조회사, 인형 사업을 독점함에 따라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기업이다. 신소련 정부는 분명 이번 사건을 빌미로 그 위세를 눌러놓을 것이 분명했다. 국가 전복을 꾀했단 말을 덧붙인다면 그의 회사가 국영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정치판을 오랫동안 지켜본 하벨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둘 다 현 정부와 관련된 기밀을 여럿 알고 있네. 그들이 자네들을 나름대로 등용하여 쓴 이유도 그 때문이지. 예를 들어… 카터, 그 친구가 꾀한 정규군 내 내부분열 같은 것 말일세. 안전국의 입장에서 자네는 풀려나선 안 될 비밀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셈이지.”
그래서 포섭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리라. 그마저도 하벨이 나름대로 힘을 쓴 덕분에 성립된 것이고. 장시안은 석 달 전, 패러데우스에게 납치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겨우 풀려난 직후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받았다. 안전국 밑에서 일할 것이냐, 아니면 당장 숙청 당할 것인가.
그런 최소한의 편의마저 이제 더는 봐줄 필요가 없어진 걸까.
“미안하게 됐네. 이제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언론의 추궁이 자네들까지 다다르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뿐일세. 물론 페르시카, 그녀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벨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장시안을 바라보았다. 이젠 자신의 운명 또한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체감했다.
“…앞으로 IOP 제조회사는 그리폰&크루거 앞으로 어떠한 물자적 지원도 할 수 없네. 최소한 당분간은 말이지. 기껏 제공한 기지도 더는 쓸 수 없을 거야. 언론의 추적은 집요할 걸세. 악담은 환담과 달리 집요하기 짝이 없으니까. 훗날 그 추적을 떨쳐내어 자네들을 다시 도울 수 있으려면, 우선 그 치들이 꼬투리 잡을 거리를 최대한 없애야만 하네.”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권력이란 무형의 힘, 그것이 마비된 이상 하벨은 그저 늙은이에 불과했다.
“…그럼, 슬슬 일어나겠네. 이제 벌떼처럼 몰려온 기자들을 상대해야겠지. 약간의 꿀을 뿌려야만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건투를 비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금속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울하게 퍼졌다. ‘IOP와 그리폰의 미래를 부탁하네’, 그 말을 자신의 자리에 대신 앉혀놓은 채 하벨은 사라졌고,
장시안은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혼자 있고 싶어.
지휘부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만 하고서 개인실에 틀어박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보는 지휘관의 차가운 모습에 의아해하는 인형들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쓸 수 없었다. 처음으로, 장시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만 하잖아. 다섯 달 전부터, 정규군의 배신, 하얀 세력의 등장, 납치, 감금, 심문, 석 달 동안의 수색, 그리고 타국에서 벌인 작전. 충분히, 계속해서 힘냈잖아. 그러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정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는, 정말 뭘 하면 좋은 걸까.”
망연히 흘린 중얼거림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문득, 귓전을 울리는 소리에 장시안은 개인 디바이스에 눈길을 줬다.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도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그것의 제목이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안젤리아. 짧은 이름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메시지를 열람했다. 본래라면 베오그라드에서 만났어야 할 사람, 그 이름이 이것에 적혀있다면 혹시, 이 일 또한 그 사람과 연관이 되어있는 걸까?
메시지엔 내용이라곤 하나 없이, 첨부파일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저장과 함께 열람하자 이내 화면에는 글자판이 꽉 채워졌다.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장시안은 이내 그것이 누군가의 ‘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 건지 모른다. 무의식적인 현실 도피였던 걸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녀는 모니터가, 그 안의 글자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소년이 최초의 ‘신’을 마주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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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같은 사람이 직접 올지는 몰랐는데.”
“어이쿠, 이런 일이니까 직접 오는 거지. 나야말로 몰랐다네. 우리 IOP 제조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하려든 사람이 이렇게 어린 꼬마아이일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
노인은 너털웃음을 지었고, 소년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반항기 어린 눈길을 받으며 하벨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 인상 깊어. 그러니 이제 자네의 뛰어난 자질을 눈여겨보고 스카웃하면 되는 겐가?”
“이미 난 팔린 몸이야. 당신도 알잖아. 애당초 그래서 여기 온 거겠지. 날 본 게 아니라, 내 주인을 보고서.”
텅 빈 금속이 바닥과 맞부딪치는 것처럼, 소년은 살짝 긁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렇게 자란 머리카락에 얼굴이 그늘졌음에도 보안 요원에게 얻어맞은 흔적은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하벨은 그의 노구를 살짝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부정하진 않겠네.”
“마스터는 어딨어?”
하벨은 서론을 말하려고 입을 벌렸고, 소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참 갸륵한 마음씨군. 나도-“
“안젤리아.”
하벨은 서론을 더 말하려 했고, 소년은 본론을 꺼냈다.
“내 주인은 도대체 어디 있어?”
이 땅에서 12년 만에 붕괴액이 기폭한지 정확히 13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리고 그리폰&크루거가 알 수 없는 하얀 세력에게서 지휘관을 구출한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날이기도 했다.
“모른다, 라고 한다면 믿어주겠나?”
“그 대답을 들은지도 같은 시간이 지났어. 그래서 직접 알아보기로 한 거야.”
“흥, ‘요즘 젊은 것들은’ 하고 운운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인 거 아나? 터무니 없이 혈기왕성하군. 솔직히 보안 경고가 울렸을 땐 가슴이 철렁했네. 지금 같은 흉흉한 시국에 그런 장난은 좋지 않아.”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하벨은 조금, 아주 조금 당황했다. 소년이 반응한 지점이 예상과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장난처럼 보이냔 상투적인 말 대신 이 꼬마는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당신네들이 납품하던 회사가 실은 테러조직이었다, 불법 화기 유통에 군 측을 향한 발포 행위까지. 이런 이야기 말하는 거야? 확실히, 진짜 흉흉한 시국이긴 하지.”
“뭐라고 부르면 되나?”
자네 이름, 하벨은 그렇게 운을 뗐다.
“데레라고 불러줘. 편하게 말하고 싶은 거면, 나도 당신 하벨 할아버지라 불러도 될까?”
“그것도 이름인가?”
“내 누나는 제레야. 뭐, 돌림자 같은 거. 알잖아.”
데레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벨도 마주 그리하며 입을 열었다.
“데레 군.” 하벨은 잠시 입을 다물었고, 다시 열었다. “힘들 거라고 생각하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지. 갑자기 주변 사람이 실종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 하나 없는 건 충분히 심적으로 힘든 일이네.”
“다 좋은데, 날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처럼 대하진 마.”
기분 나쁘거든, 그 조막만한 입 사이로 악문 치아가 보였다. 자넬 꼭 닮았군, 안젤리아.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향해 하벨은 속으로 뇌까렸다.
“미안하네. 안젤리아에게서 자네 남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어도, 자세한 사정까진 몰랐으니 말이야. 좋아, 자네 고용주가 국가 안전국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알 만큼은 알고 있어. TV에서 하는 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서, 고작 인형 두 기만으로 군대를 막으라는 터무니 없는 명령이 있었단 사실까지.”
“그래, 그럼 뭐가 더 궁금하나? 내 생각에 자네는 이미 충분히 아는 것 같네만.”
“왜?”
이해하는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모르는 건 ‘왜’야.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내려졌고, 왜 끝내 마스터가 실종되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정규군은 이상행동을 보였던 건지. 마스터가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만큼이나 묻고 싶은 것들이지.”
하벨은 난처하단 뉘앙스의 몸짓을 취했다.
“안젤리아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네만, 반역자 혐의를 진 몸일세.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얼마 되지도 않아.”
“또는 ‘그런 것으로 되어있거나’. 여기서 묻고 싶은 것 하나 더, 그렇다면 왜 ‘테러조직’ 그리폰&크루거는 안전국의 산하에서 움직이게 되었을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하벨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안젤리아가 운용하던 그 용병 소대. 한 달 전, 전술지휘관 구출 작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 소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 꼬마는 분명 그들의 기술적 지원을 맡고 있으리라. 자기 회사의 보안을 모조리 뚫어버린 걸 생각하면, 적어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만큼은 확실하게 알겠지. 인형 몇 기의 블랙박스를 조회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더욱 곤란한 것일세. 자네는, 결국… 민간인이잖나.”
하벨의 그 말에 데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초조함,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 손톱 물어뜯기가 있었다.
“알고 있네.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게 잔인한 일이란 건 말일세. 나는 안젤리아를 오랫동안 봐왔으니 더욱 그러한 걸 잘 알고 있지. 앞서 말했듯 직접 입에 올린 적은 많이 않았지만, 자네들 남매를 거둬들인 때 이후로… 그 전과 비교할 때 사람이 많이 긍정적으로 바뀐 걸 느꼈으니.”
“그러니까.”
파란 눈알이 살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살아는 있는지라도,”
“그러니까, 믿어주게.”
하벨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내가 그녀를 믿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자네는 안젤리아를 믿고 있을테니까.”
부탁함세, 하벨이 그렇게 말을 뗀 직후 그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보호자…가 온 모양이군.” 액정을 확인한 그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게. 그녀를 생각하는 자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가끔은 그런 자네를 마음 쓰는 사람도 신경 써주게.”
데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어?”
거처로 돌아가는 길 내내, 남매는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누나도 동생도 서로 모르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불편한 침묵만이 자욱이 깔려 있었고, 결국 도착하기 직전,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렇다면 왜 넌 아무것도 안 하는데, 제레?”
또 다시 불편한 침묵.
“이런 일까지 벌일 필요는 없었잖아. 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서버실까지 직접 뚫고 들어가다니.”
“필요하면, 언제든 그럴 수 있어. 그리고 오늘은 필요했을 때였고.”
“도대체 뭐가 필요한 건데, 데레. IOP 무작정 처들어갔다가 얻는 거 없이 들켜서 맞고 돌아오는 거?”
“나만 절실한 거야?”
동생은 누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만 마스터가 걱정되서 어쩔 줄 모르는 거야?”
“나도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그렇담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건데?”
데레는 피로한 듯 시선을 내린 채, 입구 계단 맡에 앉으며 물었다.
“404? 그 구출작전 이후로 일 없잖아. 한 달 동안 우리 제대로 모인 적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돈 알아서 유지보수 하러 오잖아. 네 말대로 일만 없을 뿐이지.”
“그래, 각자 개별활동하는 게 휴가가 따로 없네. 그러니 나도 개별활동한 것뿐이고.”
“우리는 남이 아니야, 데레.”
그리고 제레도 입구 계단 맡에 앉았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자기 동생을 쳐다봤다.
“둘밖에 없는 가족이지.”
“엄청 상투적인 말인 거 알면서 한 맞지?”
“맞아. 그러니까 누나가 동생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냔 상투적인 말도 할 거야.”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정상적이게 됐어?”
한 번 더 정적. 동생도 누나도 작금의 말을 한 차례 곱씹었다.
“우린 아무것도 믿지 않았잖아, 제레. 기억 나?”
“어떻게 잊겠어. 우린 그 저택에서 10년은 살았는데.”
“나와서도 몇 달은 더 그렇게 살았고. 마스터와 만나기 전까진.”
“서로 아는 사연을 굳이 짚는 이유가 뭐야?”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이렇게 하면 이해가 될 거라 생각했어.”
남매는 열일곱 살이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년도에 태어났음을 뜻했다. 이 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몸에 맞지 않은 상복을 입고서 누군지도 모를 자기 부모의 빈소에 있던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자라나는데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남매에겐 오직 돈만이 있었다. 다섯 살 짜리 꼬마들이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는, 쓸데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몇 멍인지 기억 나? 부모님 친구였다, 친척인데 기억 안 나느냐, 은사였다, 직장 동료였다… 그런 식으로 왔던 사람들 말야.”
“세다가 그만뒀어. 넌 어떤데, 데레?”
“세 자릿수는 안 되는 게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
살기 위해선 조숙해져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한몫 챙기기 위해 찾아왔고, 가끔 ‘나는 고아들을 챙기는 좋은 사람’이란 선전을 위해 얼마간 거두고 다니는 부류 또한 왔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 조금이나마 오래 보호자로 있을 사람을 잡으려 애쓰며 남매는 15살까지 살았다.
열다섯 겨울에 일어난 철혈폭동은 그런 삶까지 날려버렸다.
“그랬던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게 됐어?”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 데레. 그건 나도 동감하는 거고. 하지만,”
제레는 문득, 자기 동생에게 손을 뻗었다.
톡, 쓰라리게 닿아온 손가락이 찼다.
“내겐 네가 더 중요해.”
“그것도 상투적인 말이네.”
“…그렇게 꼭 삐딱하게 봐야해?”
대답 대신 데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좀 있다 들어갈게. 그렇게 많이 안 늦을 거야.”
그냥 들어오라고 말하려다, 제레는 열린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한참동안, 동생이 간 뒤에도 누나는 계단 맡에 앉아있었다.
…세 달, 그리고 조금 남짓. 헬리안은 대중의 관심이 생각보다 빨리 소강되었단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폰&크루거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올 적엔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었다. 인구 밀집지역에 갈 땐 여전히 마스크와 선글라스가 필수지만, 이런 외곽 지역의 카페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늦은 저녁을 대신하는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그러나 정작 손도 안 대고 있었다. 자리를 잡자마자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을 시도했다. 모든 운송수단이 몰수되어 발이 묶인 지휘관 측을 대신하여, 헬리안은 외부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역이었다.
정기연락 시간, 하지만 그 순간 얄궂게도 배터리는 방전되고 말았다.
“저기, 혹시 핸드폰 충전기 있습니까?”
카운터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부정적인 대답뿐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안전국에게 감시당하는 지휘관에게 도청 위험이 없는 연락을 받을 시간은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이 헬리안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때,
“어, 그… 괜찮으시면 제 전화 쓰셔도 괜찮은데….”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자기보다 한참은 어린 남자아이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내밀어왔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일곱 살? 평소 같았음 사양했겠지만, 헬리안은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못되었다. 양해를 구한 그녀는 서둘러 지휘관과의 연락을 시도했다.
완벽한 접근이었다. 통화 내용이 정상적으로 녹음된 걸 확인한 데레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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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섭 1001일에 맞춰 돌아왔습니다.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
멋진 신판 표지를 그려주신 토모루(@TomAnvil_3)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소설은 포스타입에서 모아 보실 수 있습니다.]
잘 보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