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떠들썩한 언더풋 한복판.
...과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시궁창의 달빛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같이 걷고 있던 금발 소녀의 시선이 나에게로 고정된다.
이 소녀로 말할 것 같으면, 강하고 아름다우며, 올곧고 자애로운 성격에, 가볍게 찰랑이는 눈부신 금발, 새하얀 피부와 촉촉한 입술을 타고 떨어지는 갸름한 턱선, 균형잡힌 몸매에 가슴은 크고, 늘씬하게 뻗어 있는 새하얀 다리를 감싸는 하얀색 가터벨트라는, 사랑스럽다 못해 홀려버릴 것 같은 외모의 소녀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한 가지의 문제점이 있는데,
"왜 그러세요?"
자신의 외모의 파괴력을 스스로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도 얼굴이 너무 가깝고, 조금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쇄골 아래로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아니 막아야되잖아.
애써 평정을 되찾고 거리를 벌리며 답한다.
"아니, 별 건 아니고..왜 달빛 주점이냐고. 언더풋에도 주점이 얼마나 많은데."
"후훗..엘 양이 고집을 피우는걸요. 어쩔 수 없죠."
이렇게 우리가 다른 싸고 좋은 주점들을 내팽개치고 축축하고, 낡고, 무엇보다도 대전이 이후로 망한-단골들은 여전히 좋아하는 모양이지만-달빛 주점으로 향하는 이유는 순전히 단 한 사람 때문이다.
그제 우리 파티의 의뢰 뒤풀이 겸 식사 자리였다.
의뢰 진행에는 큰 이상 없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붉은 머리 소녀가 개인적인 일로 연구 재료를 모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향후 계획을 잡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서, 이틀 뒤에 주점에서 다시 만나는 걸로."
"그래요."
"잠깐만요 두 분, '주점'이라고 하기에는 언더풋에 주점이 너무 많지 않나요?"
"아, 그러네. 미안, 대전이 전 버릇이 나와서.. 그러면 언더풋의 '사룡의 콧물'주점에서 보기로 할까?"
"싫어요. 이름이 더러워."
"값은 싸다고. 맛있고, 위치도 괜찮아. 이름은 저 모양이지만...."
"이 나이에 주점을 맛으로 판단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확실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그 조그마한 소녀 정도의 '인간'아이에게 함부로 독한 술을 권했다간 잡혀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넌 마계인이잖아. 제국법으로도 마계인들은 나이 먹는 게 달라서 문제없지 않을까?"
실제로 마계는 치안이 말 그대로 개판이라, 나이와는 상관없이 조금 심한 경우의 마도학자들의 경우에는 고성능 환각제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술 정도는 일상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종족차별 아니에요 그거?"
"아니, 실제로 그런걸."
"아무튼, 달빛 주점은 어때요?"
"달빛 주점? 설마, 그 시궁창에 있는 거기? 망한 곳?"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녀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울컥했었다.
"주점은 오로지 달빛주점 뿐이에요! 그 외의 주점은 주점도 아니라구요!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고집만 피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 뚜렷한 이유를ㅡ"
"동선이 꼬여도 상관없어요! 술이 조금 맛없어도 상관없어요! 낡아서 그윽한 분위기는 커녕 의자도 앉기 전에 무너지지 않을까 두들겨 봐야 한다던가 술집 구석으로 가 보니 왠지 흑노립단 단원이 조용히 앉아있다던가 하는 것도 상관없다구요! 확실히 말해두겠습니다. 저는 달빛 주점이 아니면 오지 않을 거에요!?"
"마지막 거 조금 문제되지 않아?!"
...
...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제만 해도 그런 식으로 얼토당토않은 고집을 피웠던 주제에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도도하게 앉아 있는 붉은 머리 소녀의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도도한 표정과는 반대로 귀엽게 양 갈래로 묶은 붉은 빛깔 머리. 작은 몸집에 군살 하나 없이 마른 상체와는 달리 꽤나 균형잡혀 보기 좋은 하체를 강조하는 듯한 적색 가터벨트와 스타킹이 뿜어내는 그녀 특유의 고풍스러운 존재감.
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손님이 없는 탓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이 이끼라던가, 테이블 잔해였으니까...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아, 물론 테이블 잔해 다음으로 눈에 띈 건 이 여인이다. 슈시아. 달빛 주점의 주인.
"아, 먼저 와 있는 일행이 있어요. 맥주 하나 주세요."
가끔 오는 손님들과 한 두잔 하다가 취했을 때에는 잘 나갔을 때 들어 놨던 보험사들도 대전이로 망해서 보험금을 타지 못했다던가 하는 한풀이를 늘어 놓는다는 소문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는 듯 하니 이쪽에서도 굳이 신경 쓰지 않도록 하자.
무덤덤한 인사를 먼저 건넨 것은 소녀의 쪽이었다.
"왔네요."
"응."
대화 내용과 마찬가지로, 차갑기 그지없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다.
하지만 아마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엘 양, 기다렸어요?"
예상대로 금발 소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소녀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풀어진다.
"리프 언니!! 아뇨아뇨, 저도 막 왔었어요!"
"아하핫, 다행이네요~ 엘 양 혼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조마조마했지 뭐에요!"
"에이, 언니도 참, 제가 아무리 그래도..."
참고로 말해두자면, 같은 파티라 하더라도 모험가들끼리 이름을 묻는 것은 서로 꺼려하는 것이 보통이다.
모험가 일 자체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는 좋다. 명성을 위해 모험하는 모험가도 있으니까.
그러나 죽어버리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괴로움과 그리움, 슬픔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런 것은 좋지 않다.
다행히도 우리 파티는 3인인 주제에 꽤나 오래 아무 사고 없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했을 두 소녀는 언젠가부터 서로에게 통성명을 한 듯하다. 나는 아직 하지 않았다.
"...불렀으면 대답을 해요!"
"아?"
정신을 차려보니 두 소녀는 어느 새 잡담을 마치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미안. 생각 좀 하느라고. 다시 한 번만 얘기해줄래?"
"으으...바보..."
"엘 양이 얘기했던 건 다음 의뢰에 대해서에요. '공어의 뼈'가 필요하다는데,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그러고보니 최근 이틀간은 진탕 놀았었지. 미처 다음 의뢰조차 읽어보지 않았었다. 술이 참 맛있었는데....
따라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공어의 유산'은 알고 있지만, '공어의 뼈'는 몰라."
아, 농담이 나와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파티 내의 분위기 메이커인 나의 오랜 경험으로 쌓인 풍자적이면서 번뜩이는 농담을 앞세워 이 자리의 분위기를 보다 가볍게 바꾸어야겠다.
"참고로 '공어의 유산'은 '극한의 물기둥'이라는 길드에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놀이로서..."
어떻게든 살려 볼까 했지만, 두 소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틀렸다. 이 농담은 살릴 수 없는 농담이다. 포기.
"...."
"...하하..하.."
"...재미없어요."
"미안. 그..술김에."
와중에 리프는 웃는 척이라도 해 줬다. 감동이다..
"반성하세요. 여자 둘 앉혀놓고 혼자 술 먹으면서 아저씨 농담이나 치고 있고."
"그거야, 리프는 술을 안 마시고, 너는....잠깐 너 왜 우유를 먹고 있어."
"...다른 주점에서는 안 준다구요."
"아니 무슨 주점에서 우유를 팔아..."
원조 맛집의 손님 다루기 노하우같은 건가. 슈시아가 저 멀리서 엄지를 조용히 들어올린다. 뿌듯해 하지 마.
머쓱해져서 조용히 잔을 비우다가 왠지 억울해져서 빈 잔을 내려놓으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너 어디 다른 파티랑 주점가서 혼자 우유먹으면 겉돌아."
"....."
소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어라, 곤란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저기, 미안, 나는 별 뜻 없이.."
"...그런 일 없어요."
"..."
소녀는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나에게는..."
"엘 양, 진정해요."
"...아."
리프의 나직한 한마디에 엘의 어두운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 정도로 리프에게는 사람을 안심시켜주는 어떤 힘이 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어의 뼈를 어디서 구하죠? 공어는 대전이 전에도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일단 베히모스 쪽으로 가 봐야 되나..GBL이 까탈스럽게 굴긴 하겠지만, 로터스 사건 전보다는 낫겠지."
오필리아 베이그란스가 이끄는 학술단체 GBL은 최근 로터스의 봉인이 약해졌다는 제국군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큰 피해를 입은 후로는 이전처럼 출입을 통제하기보다는 지역 복구와 치안 유지에만 힘을 쏟고 있다는 듯 하다.
리프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표정이었지만, 엘의 기색은 뭔가 이상했다.
"미, 미들 오션으로 들어간다구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 천계의 안트베르 협곡같은 곳에는 전혀 없을 것 같고."
"아니 그, 그건 그런데..."
"엘 양, 왜 그러시나요?"
평소에는 어떤 의견에도 "그러죠." "싫어요."정도의 반응이었던 엘이 이렇게까지 이례적으로 반응하는 일은 여지껏 없었다.
얼굴도 왠지 평소보다 조금 붉고. 감기인가?
"그러니까, 그, 리프 언니..."
엘은 머뭇거리며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귓속말로 리프에게 뭔가를 소곤대기 시작한다.
그런데 리프도 가만히 듣고 있는가 싶더니, 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잖아요. 그쵸?"
".....아으...그건 확실히..."
흠, 뭘까. 나한테 말하기는 어려운 건가.
여자경험이 없는 내가 귀납적으로 추론해 봤을 때, 이런 반응은 확실히....
"아하하, 너희 수영 못하는구나?"
"아니야!!!!"
틀렸다.
"...그럼 뭔데 나한테는 말 안해주는거야!"
"앗...그게..그..러니까 그..물이..."
대화조차 되지 않는 엘에게 듣는 것은 포기하고, 리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랄까...리더 님, 저희 옷을 좀 봐 주시겠어요?"
옷?
엘은 붉은색 원피스에 스타킹, 가터벨트.
리프는 노출이 조금 있는 녹색 갑옷에 하의는 가터벨트에 스타킹...
아, 왠지 알 것 같다.
"아, 팬티가 보이려나?"
"말하지 마!!!!!!!!"
엘한테 한 대 맞았다.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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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겠지만 오버마인드=엘, 가이아=리프 입니다. 직업명으로 부르긴 뭐하잖아요.
지금까지 '던전 앤 가터벨트'를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던전 앤 가터벨트'는 집필자의 사정으로 장기간(6주) 휴재합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복귀하면 바로 완결인가요
복귀는 아니고 전역쯤 되지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