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석부리 수염을 멋지게 기른 늙은 군인이 으슥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식사 시간으로부터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해는 야트막한 산에 걸려 있어 겐트의 드높은 성벽이 동쪽의 성하 마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깃불은 거의 꺼져 있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 같았다. 드문드문 켜진 호롱불만이 살아남은 이들의 생명을 대변할 뿐이었다. 그는 싸구려 궐련에 불을 붙였다.
잭터 에를록스의 걸음이 멈춘 곳은 촛불 간판을 단 선술집이었다. 약간 부서진 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은은한 곰팡이 향기가 익숙한 듯, 그는 살짝 웃었다.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더러운 걸레로 원탁을 닦고 있는 키 작은 곱추 노파와, 촛불도 안 켜진 구석자리에서 커다란 럼주 잔을 흔들고 있는 남자 한 명뿐이었다. 이글아이는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일찍 오셨구려.”
“원수 각하.”
칼렙은 존중하는 듯 말했지만 잭터에게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늙은 군인은 킬킬거리며 그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두 남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노파가 어기적거리며 다가와 이글아이의 앞에 럼주 잔을 놓고 돌아섰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는 과묵한 노인의 침묵이 고의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산대 한구석에는 중년 부부와 자녀들의 오래된 사진이 있었다.
두 남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잔이 몇 번이고 다시 채워질 때까지 대화가 오가지도, 취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참으로 비밀스럽군요.”
“따라붙는 사람만 없으면 그만이오.”
“저 할멈은…… 안심해도 되는 거요?”
“이 장소를 물색한 건 내가 아니오. 라이오닐 대령에게 물으시오.”
칼렙은 잇새 사이로 침이라도 뱉는 것처럼 대꾸했다. 그러나 별 성의 없는 대답에도 에를록스는 만족한 것으로 보였다. 칼렙은 낮게 코웃음을 치더니 덧붙여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보증하겠소.”
“공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에를록스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아까부터 물고 있어 거의 필터까지 타 버린 궐련을 테이블에 있는 시커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말했다.
“전하를 만나셨소?”
“그랬지요.”
칼렙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이글아이는 이름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의 면면을 훑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 만하군.”
“독심술이라도 배웠소?”
“아마 태어날 때부터.”
“천재가 납시었구려.”
그들의 건조한 웃음이 모래먼지처럼 흩뿌려졌다. 칼렙은 에를록스가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에를록스는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이제 어쩔 셈이오?”
질문을 들은 칼렙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독한 알코올이 그의 마음에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잠시 말없이 그림자에 스스로를 가리고 있던 그는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각하는 어때요, 제국군을 믿을 수 있소?”
에를록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큰 소리로 킬킬거렸다.
“그런 술주정을 하려고 이 바쁜 늙은이를 성하 마을까지 불렀소?”
“내가 본 바로는 그다지 바빠 보이지는 않던데 말이오. 진짜 바쁜 사람은 불쌍한 당신 부관이겠지.”
“어허!”
잭터는 아픈 곳을 찔린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칼렙은 그것이 우스웠는지 입 꼬리를 슬그머니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저 친애하는 황국의 원수 각하를 좀 떠볼 생각이었소.”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드는구려.”
두 남자는 다시 비웃음인지 흥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웃기를 멈추었을 때 칼렙이 말했다.
“그 친구도 따라왔소?”
“밀착 경호하겠다고는 하던데, 이목을 끌 수 있으니 좀 떨어져서 오라고 했소.”
“과연 부관은 부관이로군.”
그는 중얼거리며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흔들던 술잔을 응시하던 칼렙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벤 황국에는 새로운 동맹이 필요하오.”
“그 동맹을 찾겠다는 거요?”
“그렇소.”
칼렙의 말은 칼날만큼이나 단호했다. 아무것도 드러내 주지 않는 건조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글아이 원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혔다.
잭터 이글아이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전하를 위해 그렇게 일해 주는 거요?”
“신기하군. 안톤을 토벌할 때에는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는데.”
칼렙이 비꼬듯 반문했다. 그러나 에를록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적당히 넘길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칼렙은 빙그레 웃었다.
“좋은 점을 지적했지만 틀린 점이 한 가지 있소.”
잭터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칼렙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황녀 전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오. 인간 베가 에르제 폰 필라시아 개인을 위해 일했다면 이 고생을 사서 할 게 아니라 그냥 고향으로 돌려보내서 다시금 평범한 여염집 소녀처럼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게 더 온당한 선택이라는 것을 당신도 모르지 않을 텐데.”
칼렙이 황녀의 휘(諱)를 입에 담은 것과 굳이 ‘여염집 소녀’를 언급한 것에 움찔했으나, 이번에도 잭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살은 조명도 없는 어두컴컴한 자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게 찌푸려져 있었다. 칼렙은 그것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노파가 어기적대며 다가와 뚜껑을 딴 새 술병을 놓고 빈 병을 챙겨 돌아섰다. 먼젓번의 것과는 달리 고급 위스키였다. 잭터는 팔짱을 낀 채 노파를 돌아보았다. 백내장 때문인지 희뿌옇게 변색된 동공이었으나, 그는 그 안의 날카로운 통찰을 엿볼 수 있었다.
잭터가 약간 이를 악물고 물었다.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데까지……. 자, 이제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내가 원수 각하를 여기까지 불러낸 용건에 대해 말할 때가 됐소.”
칼렙은 두 개의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그는 자기 잔을 들어올렸다.
“에를록스 원수, 이건 진지한 질문이오. 당신은 지벤 황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기를 원하오?”
이글아이는 더더욱 미간의 골을 깊게 팼다. 칼렙의 질문은 수동이 아닌 능동의 답을 원하고 있었다. 차가운 위스키 한 모금이 목을 타넘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생각들이 장군의 뇌리를 스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그가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썩어빠진 정치군인으로 보이는 거요?”
“글쎄, 지벤 황국은 지금 정치군인이라도 필요로 하지 않을까요?”
칼렙은 그 질문에 물 흐르듯 대답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 모금에 잔의 반이 비었다. 에를록스는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거 위험한 생각이로군.”
“내가 알기론, 명령에 그저 복종만 할 줄 아는 군인은 별로 좋은 군인이라고 할 수 없소.”
“동감이오. 상황이 좋을 때는 그냥 허수아비이고, 나쁠 때는 공범이지.”
“웬일로 우리 의견이 맞는군요.”
그들은 잠시 킬킬거렸다. 이글아이는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제대로 봤소. 난 공의 말마따나…… 정치군인이지.”
그의 목소리는 약간은 자조하는 것 같았다. 원수는 술잔을 흔들었다. 미약한 소용돌이가 생기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는 잠시 그 과정을 눈에 담았다. 칼렙은 그런 노장군의 면면을 유심히 새기고 있었다.
이내 에를록스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 말씀을 들었다면 전하를 황녀로 옹립하자고 제안한 게 나라는 사실도 알겠구려.”
“애초의 계획은 황제를 옹립하는 것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렇다면 더 숨길 것도 없겠군.”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을 교환했다. 노파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여전히 더러운 행주로 상을 닦고 있을 뿐이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 이글아이의 눈이 노파를 향했다가 돌아왔다.
“다른 이야기를 먼저 좀 해야겠는데, 지금 황도에는 암 덩어리가 설치면서 나라를 망치고 있소. 공이 보기에 황도의 암 덩어리는 무엇이오?”
“암 덩어리라?”
“말 그대로요. 공도 여기에 얼마간 머물러 왔을 테니 이쪽 사정을 좀 알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요. 예를 들자면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나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귀족들이나 이 틈을 타서 슬그머니 기어들어오는 데 로스의 버러지들이 있겠군요.”
“우연찮게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에를록스는 그렇게 대답하며 칼렙의 답변에서 언급된 두 가지를 뇌리에 새겼다. 그는 칼렙이 그 의견을 입에 담은 데에는 단순히 생각이 같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국은 뭐 얼간이 귀족들의 관점을 빼고 나면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으니 제쳐두고, 바로 그 귀족들에 대해 말해 보자면, 용의 전쟁 이후로 이 황도를 다스리는 건 귀족들이었소.”
“왕은 없었군요.”
“폭룡왕 때문이지. 그 이후로 ‘한 명의 절대 권력’이라는 것 자체에 천계의 모든 사람들이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거요. 우습기도 하지, 옛날 사람들은 ‘한 명’이 아니라 ‘하나’의 절대 권력은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오…….”
에를록스는 신경질적으로 킬킬거리더니 위스키 잔을 단숨에 비웠다.
“최고 사제라는 허울 좋은 사장님을 세워 두고 잘나고 높으시고 고귀하신 혈통의 후손들께서 끼리끼리 머리를 맞대고 해 먹는다는 거요. 물론 처음에는 나라가 그런대로 잘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500년의 재난이 이제 막 지나간 참이니 다들 잘 해 보자! 으쌰으쌰! 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마따나, 지금이 그렇소. 오랜 시간 동안 황도에서 가장 드넓은 땅인 웨스피스, 시쳇말로 무법지대는 범죄자 유배지 취급이고, 이튼이라고 해서 대우가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지요. 모든 부와 권력, 무력,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귀족 나리들이 머무는 황도, 특히 이 겐트 인근으로만 모여들고, 소외되고, 차별받고…… 영광스런 지벤 황국의 황금기라는 건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겐트의 황금기라고 해야 맞을 거요. 그 결과가 카르텔이고,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던 게 전대 최고 사제인 벨드런 님이고, 그게 어그러져서 생긴 괴물이 카르텔의 두 번째 침공이고, 그 일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지금의 자랑스러운 지벤 폐허 황국이오.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들이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보따리를 싸 일사불란하게 노스피스로 달아나는 꼴을 공이 봤어야 하는데.”
“흥, 나도 비슷한 추태는 수도 없이 보아 왔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만 같군요.”
“하! 어딜 가나 귀족이란 놈들은 똑 같은 모양이로군.”
이글아이는 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칼렙은 빙긋 웃었다. 떠보려는 것 같은 미소였다.
“유르겐 같은 예외 사항도 있긴 있는 모양이던데, 아니오?”
“공은 정말로 그 구렁이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몸 바치고 싶어서 겐트에 남았다고 믿는 거요?”
“그럴 리가!”
두 남자는 발작하는 것처럼 껄껄거리며 웃었다. 대상은 명백하게 다를지언정 그들의 분노는 동일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보시오, 이젠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이고 있군. 바로 그 친애하는 네빌로 유르겐 공이 말이오. 아직도 섭정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자기가 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오. 그러나 그게 오롯이 유르겐 혼자의 생각이겠소? 아무리 그의 리더십이 특출하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왕이 아니라 귀족들의 대표일 뿐이오. 나머지도 잘 봐 줘야 최소한 반대는 안 한다는 게지. 게다가 한 나라의 섭정이라는 자가 다른 나라 황제에게 작위까지 받다니…… 말 같지도 않은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다는 건 공도 잘 알고 있겠지요. 놈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요.”
칼렙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열정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불길이 이글아이의 눈에서 작렬하는 것을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내가 지벤 황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고 싶으냐고 물었지……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썩어빠진 귀족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단 한 사람의 황제 아래 누구도 사용하는 언어와 고향에 의해 차별을 받지 않는, 누구나 자신의 말과 자신의 능력으로 말하는 땅으로 만드는 것이오. 내가 에르제 님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소.”
오랜 침묵이 흘렀다. 칼렙은 깍지를 끼고 잭터 에를록스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원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은 마음에 지혜와 자비와 정의와 강인한 의지를 겸비하고 있소. 나는 전하를 믿소. 나이도 어리신 분께 이렇게 큰 책임을 지워 드리는 것이 못내 죄송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일, 더 커다란 선, 이 천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자리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난 아직 보지 못했소. 이거면 대답이 되었소?”
검사는 여전히 대답 없이 마주앉은 노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글아이는 연신 위스키를 들이키면서도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였다. 오히려 모든 내면의 나신을 보이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심상의 수술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파가 술병을 두 번 갈았다. 마침내 칼렙이 입을 열었다.
“잘 알았소.”
그는 한동안 손도 대지 않고 있던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많은 알코올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뺨조차 붉히고 있지 않았다. 칼렙은 천천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수 각하께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 주셨으니, 나도 대답해 드리는 게 예의일 테지. 자, 알고 싶으신 게 뭐요? 내가 왜 황녀 전하를 돕느냐는 것이었지요? 어디에 적(籍)을 두지도 않은 모험가가 말이지.”
“지금으로서는 그렇소.”
“아라드의 나라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소?”
“대개 제국에게 멸망당하거나 속국 신세가 된 몇을 제외하면 자세히 들은 적은 없소만.”
칼렙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분명 평범한 인간의 이빨일 그 치아는 이글아이가 보기에는 어째서인지 굶주린 맹수의 것만큼이나 날카로운 살기를 품고 있었다.
“황제도 왕도 귀족도 없는 나라를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뭐……?”
에를록스도 그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무법지대에서 구르고 굴러 온 그라고 할지라도, 제사장도 귀족도 없는 세상은 꿈에서조차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생소한 나머지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학대하지 못하고, 이리로도 저리로도 임의로 보내지 못하며, 누구든지 자신이 할 말을 하고,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대로 말하는 땅 말이오. 하지만 아라드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지요. 제국이 이 땅에 존재하고 철권을 쥔 황제가 그 나라의 권세를 휘두르는 한은 말이오.”
웃음 같은 신음 소리가 흘렀다. 이글아이는 가만히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물론 내가 그리는 나라와 원수 당신이 그리는 나라, 그리고 황녀 전하가 그리는 나라의 모습이 완전히 같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소. 다만…….”
“다만?”
칼렙은 잠시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창 밖으로 향했다. 전깃불 한 개도 켜지지 않은 밤이었기에 점점이 박힌 별이 더욱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장 밝은 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원수가 말하는 불완전한 평등의 비전을 존중하오. 그러므로 원수가 받드는 황녀 전하의 비전도 존중할 만한 것이라 믿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국의 들개들이 이 상처 입은 땅까지 그 더러운 마수를 뻗치는 꼴을…… 그 추잡스러운 종놈들이, 승냥이와 들개들이 아라드의 수많은 약소국들을 짓밟고 집어삼킨 꼴을 더 볼 수가 없소.”
“그렇군.”
그는 마지막 문장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하고 있었다. 에를록스는 그 선별된 말의 내부에 숨겨진 저의를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잠시 서로의 눈을 파헤치는 것처럼 깊이 응시하였다. 말 한 마디도 오가지 않고, 숨을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흘렀다. 노파는 더 이상 오가지 않은 채, 테이블을 닦는 것도 멈춘 채 우두커니 서서 벽에 걸린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잔을 들어올려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