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지부장들을 둘러보던 에스라는 어느새 자신의 목을 감싼 채 내려다보고 있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차가운 그 감촉은 안도감마저 주었다. 실바늘 같은 두 눈동자가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치하하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림시커가 견고해지기까지, 그것의 목소리를 따라 이곳에 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것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바로 엊그제처럼 생생히 느껴졌으니까...
과거를 되짚는 에스라의 가면 속 눈이 아득해져 갔다.
“고통은 순간이고 진리는 영원을 찾을지니, 너희의 희생으로 하여금 모든 이치가 바로 설지어다.”
남자는 움직일 수 없었다.
뱀에게 온몸이 휘감겨서가 아니다, 차가운 뱀의 눈 너머로 전해오는 아스라한 절대자의 목소리에 전율이 일어서였다.
그는 공국의 땅 귀퉁이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밭을 일구며 지내는 소작농이었다. 가뭄과 기근으로 홀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그는 공국에게 애걸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무시였다.
그에게는 전부이며 일생인 것들을 그렇게 손쉽게 무너져 버렸다.
유일한 혈육이던 어머니의 부재와 함께 모든 의미가 사라졌다. 분노와 원망도 해봤고 신에게 매달려도 보았다. 하지만 그 끝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현실과 자괴감. 수년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죽지 못해 살았던 그를 가득 채운 것은 텅 빈 허무함이었다.
아무 의미도 감정도 없이 살아가던 그때, 목소리가 찾아왔다. 깊은 어둠 속 까닥거리는 위험한 손짓처럼, 조심스럽게 잠식한 그 목소리는 이제 바로 코앞에 뱀의 눈빛을 번뜩이며 속삭이고 있었다.
뱀은 말했다. 이 모든 고통이 숙명을 지기 위해서라고. 그 숙명으로 하여금 많은 것들이 완벽해지고 진리를 찾을 거라고.
이 모든 고통은 진리를 찾기 위해… 이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한 것…
그러자 모든 것들이 편안해졌다. 차갑게 느껴지던 그 목소리는 구원의 목소리가 되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시작은 우연일지라도 끝은 필연적일 것이니, 내 일곱의 열매를 거둘 때 떨어질 씨앗은 반드시 이유가 있으리라.”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것 같은 그것이 빤히 그를 내려다보며 웅혼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일곱의 열매로 하여금 씨앗이 돋아나매 부정한 것은 사라질 것이며, 모든 것은 본래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자신의 머릿속에 흘러가듯 보여지는 이 불온한 것들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이다. 그녀가 말한 진리가 영원을 찾으면 모든 것이 완벽해지리라…
어딘지 모를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에스라의 그늘진 두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며칠 뒤, 가난한 농부가 살던 집에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채 농부만이 사라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똑바로 붙잡아! 녀석이라도 데려가야 상부에 면목이 서니까!”
“크윽…”
무장한 공국의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눌린 사내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바닥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있는 사내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건물 사이에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별안간 필사적으로 얼굴을 움직이며 외쳤다.
“안돼!”
포승줄에 묶이지 않으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가 했지만 남자는 곧 얌전해졌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인 탓에 처참하게 바닥에 갈린 남자의 뺨에 핏물이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안심이라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군인들의 손에 붙들려 끌려갔다.
그 모습을 건물에 가려진 그늘 속에서 바라보던 한 인영이 참지 못하고 한 걸음 움직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냉랭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베릭의 말 못 들었어? 지금 우리가 나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돼.”
감정이 비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표정마저 숨겨지지는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벽을 노려보고 있는 패리스의 표정은 살벌하면서도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안쓰러웠다.
그런 패리스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숙연해진 루이제는 발걸음을 돌린 채 주먹을 쥐었다.
“이해할 수 없어…”
주먹 쥔 그녀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억울함과 분노에 주먹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는 듯했다.
“더 큰 죄를 짓는 인간들은 멀쩡하게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있는데, 우리가 왜…”
패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들지 마.”
“여왕도 귀족도 하지 못 하는 일을 우리가 대신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우릴 못잡아 안달인 거지? 이해가 안 가!”
“그자들을 이해하게 되면 뭐가 달라질 거 같아? 어쩌면 그들을 증오할 수 있는 지금이 나은 것일지도 몰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의문스러운 루이제의 말에 패리스는 등을 돌린 채 손을 휘휘 저었다.
“동료들이나 부르자. 베릭의 작별식을 해 줘야지.”
“주인공도 없는 작별식 따위…”
웅얼거리는 루이제의 말에 패리스가 싱긋 웃으며 어깨동무를 했다.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은 뒷골목 생활을 하며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고 가슴 쓰린 일이기도 했다. 그럴수록 남은 이들끼리 의연하게 대처해야 이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것을 패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패리스는 축 처진 루이제 앞에서 일부러 초연한 척하며 다음 의뢰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불거렸다.
며칠째 계속되는 두통에 루이제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 두통이라기 보다는 머릿속에서 어떤 영상이 수없이 반복되고 재생되어서 두뇌가 과열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뱀의 눈빛과 자신을 둘러싼 여섯 명의 인영들… 그리고 무수히 지나치는 사건과 장면들… 모든 게 뒤엉켜서 머릿속 장면들과 현실마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수많은 장면과 수없이 메아리치는 비명소리와 목소리. 그 중에서 신기하게 뇌리에 각인되는 말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그녀의 의지를 전달받은 일곱의 영혼이 모이게 되면, 어그러진 현실이 바로잡히고 꿈꾸던 미래가 자리 잡을 것이란 거였다.
어그러진 현실과 꿈꾸던 미래라는 부분이 뇌리에서 맴돌았지만, 정체 모를 의식에 대한 거부감 또한 남아 있었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이 일련의 말들과 그 말들에 흔들리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신의 자아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최근 익명으로 된 의뢰자의 지시로 무기 운송 의뢰를 수행하던 동료들이 대거 공국에 체포되는 일로 인해 두통이 더해진 탓도 있었다. 그 일로 인해 패리스가 큰 부상을 입었고, 그녀의 순발력 덕에 체포는 면했지만 뒷골목은 많이 침체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뒷골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패리스가 만신창이가 된 것이 루이제에게도 뒷골목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못 돌아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 생각까지 미치자 루이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래 어쩌면, 자신이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섯 명의 그들과 하나의 의지를 잇게 된다면, 이런 불공평한 세상이 아닌 목소리가 말한 본래의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진리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깨질 것 같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자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지고 목표는 분명해졌다.
루이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곰팡이가 슨 낡은 문을 반쯤 밀어 열었다.
일렁거리는 희미한 촛불에 의지한 채 어둠 속 낡은 침대에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패리스의 얼굴이 비쳤다. 그런 그녀의 옆에 간호를 하다 잠든 듯한 동료의 등도 보였다.
한참을 빤히 그들을 바라보던 루이제는 서서히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나중에 패리스를 만나면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을 생각에 피식 조소를 흘린 루이제가 씁쓸한 얼굴을 한 채 낡은 판잣집을 빠져나왔다.
“곧 검은 대지로 간다 들었다.”
에스라를 대신해서 기록을 정리하던 만다린이 장승마냥 우두커니 앉아있는 로젠버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
대답도 없이 묵묵히 시선을 마주하는 그의 모습에 껄껄 웃음을 터뜨린 만다린이 말을 이었다.
“성지가 있는 그곳에 미리 기반을 닦아 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그곳이 그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발판이 될 테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인 로젠버그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듯 다음 말을 이었다.
“용병 출신이라 들었는데…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느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묵묵히 마주하는 시선에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뒷말을 붙였다.
“물론 그분의 의지를 보았다면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개인적인 소명이나 목표가 있는가 물은 거다.”
그녀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절대자의 의지를 보아서가 아닌, 자신이 꿈꾸던 소명과 절대자의 의지가 같았기 때문에…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신조차 보살피지 못하는 가엾은 생명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낼 수 있는 미래를 만드는 것. 절대자의 의지에서 그녀는 그 미래를 보았고 순응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버려진 자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로젠버그에게 흥미를 품고 있었다. 별다른 의사 표현도 의견도 없지만, 침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적인 무게감과 단단한 의지가 그에게서는 느껴졌다.
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낮게 울렸다.
“흉측한 몰골을 한 나를 누구도 원한 적도, 필요로 한 적도 없었습니다.”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임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그런 이 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제 소명이고 앞으로의 목표가 되겠죠.”
망설임 없는 목소리에 만다린이 잠시 멍해져 있던 찰나, 문이 열리며 파란 가면을 쓴 남자가 들어섰다. 에스라의 임무를 받고 나섰던 청면수라 로즈베리론이었다.
그리고 그 뒤, 미라즈와 그녀가 돌보는 소륜이라는 소녀도 함께 들어섰다. 모두가 그분의 의지를 이은 자들이었다. 하나둘 모이는 계시자를 보며 만다린은 때가 가까워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일으켜 자리를 비켜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라가 문 속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로는 처음 보는 여인이 함께였다. 독이 발린 자신의 손톱을 손질하고 있던 그녀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자연스레 에스라의 옆에 마주 섰다.
“이제야 일곱의 의지가 다 모인 것 같군.”
에스라의 웅혼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닿았다.
에스라는 과거의 그때와 같이 한자리에 모인 지부장들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달라진 것은 어렸던 소녀가 여인이 되었으며, 받아들인 의지 속에서 서로 다른 미래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세 자리가 공석이 되었지만, 그 분의 계획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말은 다 갖춰진 채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에스라를 바라보는 지부장들의 시선에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때가 가까워졌다.
목을 감은 그것의 형체가 희미해질수록 에스라는 순교의 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