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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단 인물소개
사령관
더치걸과 코코가 가족 그림을 그리다 자신의 머리색을 비워 둔 걸 보고 검은 머리로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한, 인류를 재건하고 연합을 창설한 영웅치고는 너무나도 동네 형 같은 인간. 참고로 현재 머리색은 빛을 받을 때마다 바뀐다. 본인의 취향.
가족여행을 나가면 깨지는 돈의 액수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가족여행을 결정할 수 없다. 안드바리. 두고 보자.
좋아하는 것은 조용한 아침. 싫어하는 것은 외로운 아침.
블랙 웜
'컴페니언에는 리리스, 배틀 메이드에는 블랙 웜' 이라는 칭찬을 들은 적 있는 사령관의 든든한 호위. 조용하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지만, 그렇기에 웃었을 때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사령관의 심정지를 유발한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아이들이 자신의 무표정을 무서워해서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하고 있다.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는 모양...
좋아하는 것은 주인님. 싫어하는 것은 주인님의 적.
생명의 세레스티아
수도 남쪽에 아름다운 자연도시를 건설한, 과거 요정 마을의 리더였던 여왕님. 단순히 마주 보고 앉는 것만으로도 사령관에게 휘몰아치는 번뇌를 선사할 수 있다. 본인에게는 자각이 없는 모양...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쏙 빼닮은 딸 그레이스와 함께 루피너스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의 고민거리는 동물들이 그레이스를 더 잘 따른다는 것.
좋아하는 것은 사령관 머리 쓰다듬기. 싫어하는 것은 딱히 없다.
그레이스(일러스트 미완...)
사령관과 세레스티아 사이에서 태어난 현세대의 막내. 외모도 성격도 어머니를 쏙 빼닯은 소녀. 어릴 적부터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었다. 막내인 만큼 이복남매들에게 엄청나게 예쁨받았다.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아이가 최근 연락이 끊겨 의아해하고 있다. 아직 10대지만 나이트 앤젤의 질투를 제대로 산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은 아이들 돌보기. 싫어하는 것은 딱히 없다.
탈론페더
사령관과 그 가족들(자신 포함)을 위성까지 동원해 모두 도청 및 도촬하고 있는 사령관 직속 정보원.
얼마 전 그레이스와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아이를 탐지하고 무서운 누나들을 보내 엄한 사진 요구하지 말라고 혼냈다.
안드바리
사령관의 지갑을 박살낸 주범. 덕분에 사령관은 한동안 절약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혼낼 수는 없다. 안드바리니까. 오랜만의 여행에 신난 나머지 언니들을 데리고 신나게 놀고 있다. 언니들이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은 컵떡볶이. 싫어하는 것은 창고에 숨어 있는 누군가.
브라우니 137
자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흔한 브라우니". 사령관과 그 누구보다도 절친했던 친구. 다만 애인은 아니다. "누가 그런 인간이랑 사귄답니까?"
과거 전쟁에서 사령관을 위해 전장에 남았다가 실종되었다.
좋아하던 것은 전우들과 마시는 술. 싫어하던 것은 혼자 마시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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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휴가를 만끽하고, 12시가 다 되어서야 세레스티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웜은 얼마 전에 왔었을 텐데. 가본 곳을 또 가는 거라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예요. 주인님과 함께라면 어딜 가든 즐거운걸요.”
“그렇다면 좋겠지만...”
쓴웃음을 지은 내 맞은편에 이제 막 씻고 나온 참인 블랙 웜이 앉아 긴 흑발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장발, 그것도 허리를 우습게 넘겨서까지 내려오는 길이이니 힘들겠다 싶어 말없이 빗과 수건을 들고 도와주기 시작했다.
“제가 하면 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동안 말없이, 눈앞의 슬며시 달아오른 어깨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목욕타월 만세- 수건으로 긴 흑발을 톡톡. 두드려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조용히 사락거리는 소리만 들리길 10분쯤.
“된 것 같은데?”
“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물기도 없어졌고, 꼬인 머리카락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웃음소릴 내자 머리카락을 묶어올린 블랙 웜도 웃었다.
평소처럼 땋아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하고, 곧 잘 시간이니 땋아 주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자.
자연스럽게 침대로 들어가 머리받침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다가, 마찬가지로 옆에 앉은 블랙 웜에게 물었다.
“...허리 안마해 줄까?”
=shall we?
우리끼리만의 신호를 슬쩍 보내 보았지만,
“...오늘은 좀.”
“음.”
거절당했다.
이 방법의 장점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보다 눈치가 덜 보인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럼에도 어색한 공기가 감돌 정도로는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 그래... 으음, 영화나 볼까.”
내 전형적인 화제 돌리기 시도에 블랙 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보지, 근데.
일단 뭐라도 시도해 보기 위해 tv를 켜 이제는 문화의 중심이 되어 가는 탈론-플릭스를 틀었다.
탈론페더가 재미삼아 구인류의 영화 같은 걸 올리던 사이트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아무튼 나는 이것저것 화면을 넘기다,
“이거 볼까? 뽀끄루랑 내 아들 주역인데...”
“음...”
패스.
“이것도 괜찮은데. 고전 명작...”
“음...”
...패스.
“아, 이것도 있네. LRL이 재미있다고 하더라.”
“...”
“...”
... ...패스...
그 뒤로도 약 10분가량 뭘 볼지 해매던 우리는 결국... 찾지 못하고 껐다.
그리고 침묵.
“...”
“...”
아까 전까지 흐르던 부드러운 분위기는 어디로 간 걸까?
한순간의 말실수로 모든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는 건 몇 번이나 증명한 적 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이 분위기 어쩔 거냐, 사령관.
어쩔 거냐고!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했잖아!
“...”
“...”
어쩌지? 진짜로 어떻게 하면 되지?
이 침묵을 깰 수단이 필요...
“주인님.”
“으, 응?!”
속으로 필사적인 두뇌회전 중이던 날 부르기에 움찔하며 그녀를 보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나와 달리 블랙 웜은 조용히 말했다.
“불 좀 꺼 주시겠어요?”
“...응.”
뻘쭘하게 일어나 불을 끄자 어느새 누운 블랙 웜이 딸깍 하고 간접조명을 켰다.
그러고도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으아악!
진짜 미치겠네! 단둘이잖아! 뭐라도 좀 해 봐, 니가 그러고도 남자냐고!
하, 하지만 물어봤는데 오늘은 좀이라고 대답했잖... 으아악! 머리에 이것밖에 없냐, 난! 왜 그런 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내가 이 나이 먹고도 연애를 어려워하는 이유 찾았다!!
내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움켜쥐고 끙끙거릴 무렵, 내가 고민에 빠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블랙 웜이 말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응? 아, 뭐...”
...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된 날 내버려두고,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무례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주인님게서는 죽은 동료들을.... 얼마나. 기억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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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주인님게서는 죽은 동료들을.... 얼마나. 기억하시는지요.”
조용한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가.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한 듯이 눈을 깜빡이는 그를 보며, 블랙 웜은 대답을 기다렸다.
얼핏 무례하게도 들릴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그는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부.”
그리고 그의 대답은... 짧고도 간결했다.
블랙 웜은 잠시 그를 멍하니 응시하다가, 농담하지 말라는 듯이 되물었다.
“...전부. 요?”
“응. 전부. 모두 기억해. 이름도, 군번도. 아... 하지만 세세한 특징은 헷갈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앞에 그 애들이 있다면 바로 누군지 알 거야. 라며 담담히 말한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
“응. 그런데 그건 왜?”
부드럽게 웃는 표정인 그에게서 농담이나 거짓말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서 그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전부... 그럼 주인님께선... 그 전부를 기억하고 계시면서도... 그들 모두의 죽음을, 이겨내셨다는 건가요...?”
아직도 그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잊지 못하는 저와는 달리...?
그 질문에, 사령관은 서글픈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걸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하진 않아. 블랙 웜.”
씁쓸한 울림을 담은 그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잊으려고도 해 봤어. 그런데 그럴수록 더 선명해지더라고. 난... 잊을 수 없었어. 잊어서도 안 되고.”
사령관조차... 그녀가 아는 한 가장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조차 그 기억을 털어내지 못했다면.
나는?
그마저 그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나는 이 기억을 마주 볼 수나 있을까...
지금도 계기만 있으면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들.
흔들리는 총구. 피에 물든 방패. 떨리는 손에 튄 것은 선혈.
그걸 보면서도 비명도 지르지 않고 발포하는 것은 그녀 자신. 총구가 향한 곳은...
단편적으로 떠오르고 만 기억을 애써 흩어놓았다.
얼마 전 들은 사령관의 말로도 벗어날 수 없었던 끔찍한 피의 기억.
표정을 굳힌 블랙 웜을 보고, 사령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거였구나.”
“...”
“...한세기 반 동안이나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블랙 웜?”
그 눈동자에 힐책하는 기색이 보인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고개를 숙이고 만 블랙 웜은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괜찮을까.
이 기억을, 내 과거를. 그에게 털어놓아도?
다른 모든 걸 말했어도 단 하나. 이것만은 말할 수 없었는데.
어쩐지 춥다는 생각이 들어 팔을 쓸어내렸다.
사령관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목소리가 너무 상냥해서. 털어놓고만 싶었다.
얼마 전, 폭발의 잔재가 남은 방에서 그랬듯 그에게 안겨. 모든 걸 털어놓고...
하지만 난 그럴 수 없겠지.
털어놓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령관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는 블랙 웜을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난할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며 다정한 말로 위로해 주겠지.
하지만...
만약... 아주 만약에. 그가 자신에게 정이 떨어진다면.
약간이라도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왔다.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기우라는 것은 안다.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는 분명 다정한 말로, 따스한 팔로. 블랙 웜을 조용히 안아 위로해 주겠지.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였다. 자꾸만 머리 한구석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달라진 그의 표정을.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를.
몇 번인가 입술을 떼었다가도 다시 다물기를 반복하는 그녀를 보며, 사령관은 착잡한 듯이 탄식했다.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억지로 들으려는 건 아니야.”
“...죄송합니다.”
“괜찮아. 잘못도 아닌데 사과하고 그래.”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쓴웃음이었지만... 블랙 웜은 차마 그 표정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상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편히 주무시지요.”
“... 그래...”
역시 안 돼겠어.
아직은.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말할 수 없겠지.
차가운 누군가의 팔이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듯한 오한을 느끼며, 블랙 웜은 돌아누운 채 눈을 감았다.
사령관의 작은 한숨을 애써 듣지 못한 척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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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늦은 시간에 미안해. 응? 웜? 아아... 방에서 자고 있어.”
“...다른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혹시...”
“응. 그 애 이야기야. 아는 거 있어?”
“...”
“...”
“...그래. 그랬구나. 알았어.”
“아니... 내일 어딜 갈지 생각하고 있었어.”
“응. 늦은 시간에 미안.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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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어젯밤의 일을 머릿속으로 돌이키며, 나는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악몽을 꾸시는 듯 해서...’
걱정스레 나에게 물어보던 블랙 웜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아직도 창백한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 가려는 날이면, 나는 항상 꿈을 꾼다.
오늘은 유독 심한 꿈을 꾼 탓에 침대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렸겠지.
“주인님... 어디로 가시려고요?”
“응... 가 봐야겠다 싶은 곳이 있어서. 같이 가 줄래?”
“물론 함께 가겠습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손을 잡고 저택을 나섰다.
“…오늘 오려고 한 곳이 여기라서 그런가? 옛날 꿈을 꿨네…”
농담하듯 말하고서 차를 멈춰세웠다.
다른 아이들은 세레스티아와 함께 숲을 산책하고 있거나 동물들과 함께하고 있거나 할 테지만, 나와 블랙 웜은 조용하게 이곳을 찾아왔다
“여긴...”
“묘지.”
그러고 보니 블랙 웜과 함께 온 적은 없구나.
“알고는 있겠지만... 여기에는, 옛날에 우리와 함께했던... 그 아이들을 위한 장소야.”
“네... 주인님께서 리더께 직접 부탁하셨다고...”
“응. 여긴 말 그대로 아름다우니까.”
다만 이 안에서 안식을 취해야 할 시신은 거의 없다.
...내 친우의 시신도.
이곳은 묘지.
내 전우들... 즉 날, 우릴 위해 사라져버린 아이들, 그리고 숨은 공로자들이 잠들어 있는.
씁쓸한 기억들과 즐거운 기억들이 뒤섞여 잠든. 시간이 멈춰버린 장소.
“난 반년에 한 번은 여길 오거든.”
“반년에 한 번이요?”
“응. 옛날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왔었어.”
담담하고 쓸쓸한 묘지 안으로 발을 들이자, 입구 양옆에 선 군인들이 날 보고 경례했다.
“수고하네.”
“...”
가볍게 거수곙례하는 나에게 군인 한 명이 말했다.
“총사령관 각하. 오늘은 체험학습을 온 인원이 있어 조금 소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아이들 좋지.”
이상한 놈들이 와서 깽판을 치는 것만 아니라면야 불편할 이유가 없다.
가볍게 웃은 뒤, 최대한 조용한 걸음걸이로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머리장식이 놓인 곳도 있고, 좋아하던 음반이 놓인 곳도 있고...
고요한 비석들이 가져다주는 향수에 답답한 심정을 느끼며 쓰게 웃었다.
입구에서 한참 들어가면, 가장 높은 위치에 쓸쓸한 빛을 띈 위령비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른 묘비들보다 조금 더 큰 주제에 장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청백색 묘비가 놓여 있다.
브라우니 137.
특무부대 대장.
‘무너지고, 구르고, 흙투성이 만신창이가 되어 울부짖어도. 언젠가는 우뚝 설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들.
그것이 전부.
“이 묘비는...”
“...응. 몇 번 봤었지. 이 녀석이... 내 절친. 137이야.”
아마, 그녀는 “친구는 개뿔이, 상관이 치근덕대는 게 어떻게 친구임까?” 하며 짖궂게 웃었을 것이다.
귀에 선한 목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비석에 손을 올렸다.
“나 왔어.”
술부터 주시지 그러심까. 술 내놔!
...그래. 1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귀에 선히 들려온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네가 어떻게 대답해줄지. 어떤 몸짓으로,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말할지. 그 전부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야 난 녀석의 절친이었으니까...
“오늘은 블랙 웜하고 같이 왔어. 기억하지? 내 호위 중 한 명. 가장 든든한 경호원.”
대답할 수 없는 비석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기다렸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 술... 오늘은 귀한 것도 들고 왔지. 20년 묵은 와인이라고.”
어깨에 맨 가방에서 천천히 유리병을 꺼내들고, 잔을 꺼내 따른 뒤, 묘비 앞에 놓았다.
“실컷 마셔.”
이젠 더 이상 긴장할 필요 없어.
만취한 채로 하루종일 있어도 돼.
비석을 토닥이며,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정말로 이 술을... 같이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어지려던 말을 간신히 참았다.
그야말로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슬슬 지겨울 때가 되었지.
술잔을 들어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술을 마신 뒤, 다시 따랐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나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묘비를 세우는 날이 온다면, 술은 붓지 말고 마셔 달라고.
아까우니까. 라는 너다운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따르고, 마신다.
그러고서 한 발짝 물러선 나에게, 블랙 웜이 나직하게 말했다.
“주인님.”
“응.”
“...저도 한 잔 올려도 될까요.”
“...그래.”
별 말 없이, 비운 술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번 잔이 마지막이야. 이 이상 마시면 내가 취할 것 같아.”
아, 그런 게 어딨슴까! 귀한 거 들고 와 놓고! 더 따라 주시지!
“안 돼. 아껴뒀다 밤에 마실 거야.”
치사해! 치사함다!
울상을 지은 표정까지 선명히 떠올라 웃고 만 나의 옆에서, 블랙 웜은 조용히, 나긋한 손가락을 뻗어 잔을 들고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동작으로 술을 따라. 옷자락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릎을 꿇고는 조용히 놓았다.
그러고서 일어난 그녀의 옆에서, 가만히 몇 분 정도 묘비를 응시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내 입으로는 잘 하지 않는. 옛날에 있었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 우린 전에 없는 위기를 맞았어. 오르카는 항행불능 상태라 지상에서 수리 중이었고... 때를 맞춘 듯이 철충이 나타났지. 평소라면 격퇴라는 선택지를 골랐겠지만 수가 너무 많았어. 그래. 많았지. 시야 끝에서 끝까지가 전부 철충이었으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블랙 웜은 가만히 들어 주었다.
고개를 살짝 저어 뇌리에 떠오른 그때의 기억을 떨쳐내며 말을 이었다.
“...설상가상이었지. 해안가에 꼼짝없이 멈춰선 채 몰려오는 철충에게 죽을지... 아니면 바닷속에 들어가 천천히 절망하며 질식할지. 둘 중 하나였어. 그래.. 선택지가 없었어...”
눈을 감자 그 순간 느낀 절망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끝인가.
그 생각이 1초에만 수십 번 떠올랐다.
“...나는 선택했어. 나와, 날 지켜줄 몇 명만으로 구성된 미끼 부대를 만들어, 오르카에게서 철충을 멀리 유인한 뒤, 오르카의 수리 시간을 벌겠다는 생각이었지. 수리가 끝나면 스노우 페더와 슬레이프니르처럼 공중에서 이탈이 가능한 아이들이 와서 우릴 구해 주는 게 작전. 이었어. 작전이랄 것도 없었지. 뭐... 애초에 내가 목적일 테니까. ...말이 좋아 ‘날 지켜줄 몇 명‘이지 실상은 총알받이 몇 명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어...”
정해진 인원은...
나와 리리스, 네오딤과 금란. 그리고... 137.
“우리 다섯 명은 죽을 각오로 뛰고 또 뛰었어. 녀석들의 시선은 확실하게 끌었지. 이상할 정도로 잘 끌었어. 아무튼 오르카는 항행 가능한 수준까지 수리할 수 있었으니까. 가는 곳마다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더라. ‘저기다’하고... 그 순간 우리의 전투능력은 확실히 최고조였어. 네오딤은 손짓 한 번으로 수십 마리를 박살냈고, 리리스가 막지 못하는 공격은 없었지. 금란이 적을 탐지해 내면 나와 137이 머리를 날려버렸어. 아마 우리 다섯이서 1개 대대는 끝장냈을 거야. 그랬는데도... 끝은 오더라고.”
처음에는 상상 이상으로 순조로웠다. 시선은 이상할 정도로 잘 끌렸고, 오르카는 시간을 벌었다. 사상자가 나오기 직전이었던 전선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어 퇴각도 성공했다. 그러나...
끝은 오고야 말았다.
당연하겠지. 고작 다섯이서 너무 깊숙이 들어갔으니까.
“... 마지막 순간에... 137은... 나를, 우리를 구하기 위해 혼자 남았어.”
자세히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붙들어 두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려 왔으니까...
“... 난 지휘에서 실수를 저질렀어.”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마지막 순간, 각오를 한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더라면...
하지만 나는 손조차 뻗지 못했다.
당신은 살아남아 주십쇼.
당신만큼은.
그것이 내 친우에게 들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 뒤로 137의 신호는 2시간가량 지속되었다가. 끊겼어. 사라졌지. 신호가 있던 자리에서 발견한 건 그 애가 늘 하고 다니던 팔찌뿐...”
손목을 쓰다듬어 팔찌의 감촉을 확인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137도 여기 있는 아이들도.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하아...
한숨 뒤에,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웜?”
“네?”
“난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면 달력을 먼저 확인해.”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멍하니 묘비를 바라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우선 날짜를 확인하고. 년도를 확인하지. 그리고 항상... 아무 말 없이. 내려놓아.”
그것은 내 오래된 버릇 중 하나였다.
아니, 강박이라고 하는 게 좋으리라.
고치려 한 적 없고 고칠 수도 없는.
“항상 생각하는 거야.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그 순간 137이 떠나 버린 것도. 지금까지의 모든 일도. 단순히 힘들고... 기분 좋은 꿈이었던 거지. 일어나 보면, 그래. 어쩌면.. 아직도 난 그 잠수함에서 살고 있는 거고.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아이들이... 137, 그리고 헤어져버린 아이들이... 날...”
후우.
가빠지려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저었다.
“날 보고 인사하고. 그럼 난 똑같이 인사하고. 웃고. 떠들고. 평소처럼. 그래. 지금까지의 세월은 긴... 기나긴 꿈이었던 거야. 사실 아무도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았고. 단순한 악몽이었던 거지. 그리고 앞으로도 누군가 죽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야. 연합도, 전쟁도 전부 꿈이었던 거고... 그러면... 137... 그 녀석과 난... 다시는 마시지 못할 줄 알았던 술을 마시고. 웃고... 농담도 던지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발키리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발키리 역시 내 습관을 눈치채고 조용히 위로해 준 것일 뿐 내가 먼저 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젖어든 눈가를 슬며시 누르고 말했다.
“...바보같지?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전부 현실인데. 꿈일 리가 없는데...”
“...아니예요.”
한동안 말이 없던 블랙 웜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 고뇌가 엿보이는 그 눈동자를 향해, 나는 나직히 말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넌 알겠지?”
“...”
너에게도 이런 기억이. 회한이 있지 않느냐고.
행간으로 물어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난 너를... 그리고 너희를 사랑해.”
그러니 겁내지 말아 줘.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지만...
“...죄송해요...”
그녀는 탄식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내심 탄식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내면서도, 나는 조용히 웃었다.
“...괜찮아. 힘들 테니까... 원래 힘들지. 이런 게.”
“...”
“죄송할 거 없어.”
나는 조용히 그 어깨를 토닥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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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휴가편 3부입니다.
원래는 결말부분까지 쓰려고 했는데 손가락 통증이 와서 내일로 미뤘습니다.
추천주구가여...
뭔가 씁슬한 이야기군요 뭐 저 미래(현재)를 개척해 나가기까지 희생 하나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기억하는 것도 참 용합니다, 사령관은.
사령관은 그 당시 있었던 바이오로이드들을 '일단 본 적이 있다면'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재주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브라우니 137의 경우 사령관에게 유독 특별한 존재였던 탓에 더욱 선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리스 금란 네오딤이란 인원들 사이에 끼어들 정도의 브라우니라면 진짜 영웅 소리 들을만 하군요. 그나저나 전술핵조차 막는 리리스가 있음에도 밀릴정도라면...ㄷㄷ
초간단 인물소개 보고 ㅋㅋㅋ 하다가 브라우니 소개 보고 뭔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ㅠㅠ 소설은 반갑지만 왼손생각하시면 진짜 조심하시길 무리하다가 몇달 더 고생하시진 마시길...